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일대에는 사적 제471호인 위봉산성이 있다.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시작하여, 숙종 8년인 1682년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처음 찾아갔을 때는 벌써 7 ~ 8년 전 이었나보다. 당시에는 지방문화재였던 이 산성이, 2006년 4월 6일자로 사적으로 변했다.

위봉산성은 성벽 둘레가 약 8,539m에 성벽 높이는 1.8 ~2.6m 정도이며, 높은 곳은 5 ~ 8m에 이른다. 성 안의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와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와 포루지 13개소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추정 건물지 15개소에 수구지 1개소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

비가 오는 날 위봉산성을 향하다

2월 27일, 토요일에 온다던 비가, 일요일 아침 일찍 눈을 떠보니 후줄근하게 내린다. 카메라가방을 몇 번이고 들러 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가까운 곳은 몇 번이고 다녀온 터라,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위봉산성에서 조금 더 지나면 있는 위봉사라도 다녀올 마음에서다.

위봉사를 가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위봉산성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에는 비구름이 가득 끼었다. 정작 고개 정상에 있는 위봉산성 서문지 일대는, 그래도 짙은 구름은 끼지는 않았다.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가득 비구름이 끼어있다.



위봉산성은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위봉산성을 축성한 것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한 성이라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둘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제로 1894년 동학혁명 때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이 되자, 이곳으로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옮긴 적이 있다.



7개 군의 군민이 동원되어 쌓은 위봉산성

위봉산성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다. 올 봄에 날이 풀리면 시간을 내어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서문일원은 성문의 성벽과 옹성, 그리고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도로를 내느라 끊어진 산성은 산 위로 길게 쌓아올렸다. 길 건너편 성곽을 둘러본다. 급한 경사면을 이용해 축성을 한 위봉산성은, 경사면이 바로 성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산성을 축성할 때는 인근 7개 군민이 모여서 쌓았다고 한다. 8년이나 걸쳐서 쌓은 성은 산에 있는 돌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 일대의 민가 축대에서도 성벽을 쌓은 돌과 같은 석재들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골짜기에 축대를 쌓고 그 안쪽으로는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




여장을 쌓은 돌도 다듬은 돌이 아니고, 성벽을 쌓기에 적당한 돌을 이용했다. 위에는 큰 돌을 올려 무게를 주었는데, 이 돌은 전투시에는 공격용 무기로 사용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총안으로 밖을 내다본다. 저 밑 계곡에서 밀려오는 적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할 듯하다.

옹성이 있는 서문지를 돌아보다

서문지를 돌아본다. 아치형으로 문을 만들고, 그 위는 서문의 위에 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위가 뚫려있다. 서문 밖으로는 옹성을 쌓았다. 대개 옹성은 낮은 편으로 쌓지를 않는다. 적이 공격을 하기가 어렵도록, 높은 곳을 골라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다. 위봉산성 서문지의 옹성이 터진 곳도, 가파르게 성벽이 산을 타고 올라가는 쪽에 내놓았다.



만일 적이 성문을 깨기 위해 옹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옹성은 성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꼭 필요한 구조였을 것 같다. 이 산성을 돌아보는데 빗줄기가 더욱 강해진다. 괜한 걱정을 한다. 예전에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성벽 위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은 어떻게 비를 피했을까? 비가 오는 날 오른 위봉산성에서, 지나간 옛 시간을 돌아본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이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눈이 덜 녹은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부릅뜬 눈과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귀부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바로 귀부의 머리이다.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귀부의 왕방울 눈을 보면, 무섭다기보다 친근감이 먼저 앞선다. 아마도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닌지. 커다랗게 뚫린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길지 않은 목이 몸체에 달라붙은 듯 표현을 해, 이 귀부의 힘을 더 느끼게 만든다. 마치 강인한 역사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등에는 이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그 육각형의 귀갑문이 중앙으로 가면 한 단계 높게 조각을 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위에 비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비좌를 돌출시켜 조각하였다.      




이수의 용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귀부의 머릿돌인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앞면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 한 옆에 따로 보관을 해 놓았다. 이 이수는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이 넘친다. 금방이라도 이수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면의 용은 좌우로 밖을 향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뒤편쪽의 용은 안을 향하고 있어, 앞뒤의 용이 다르다. 옆면을 보면 비늘이 선명한 용의 몸체가 뒤틀려 감아 올라간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이수의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면서 조성이 된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하면 975년에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대사가 입적한 후 8년이 지나서 세워진 것이다. 이 귀부와 이수의 형태는 인근 원주의 거돈사지 등에서 발견되는 원종대사의 승묘탑비 귀부와는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탑에서 보이는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재답사. 그래서 고달사지의 귀부는 늘 발길을 붙잡는가 보다.


옛 고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소재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은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무덤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덤을 원래의 모습대로 폐쇄를 해놓아 안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 그려져 있는 자료를 통해 무덤 속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려시대의 고분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데, 무덤 한 기만이 자리를 할 수 있는 좁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급한 경사로 계곡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런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묘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묘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둔마리 묘

둔마리묘는 마을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를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비탈진 등성이에 묘가 몇 기 보인다.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민묘라고 한다. 네모나게 판석으로 석실을 두른 묘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석실 묘 한 기를 사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둔마리 고분을 찾았을 때는 답사를 온 사람들이 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실은 네모난 판석으로 주변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이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어보니, 흙으로 덮은 봉분 안에도 판석으로 덮여 있다. 주변과 덮개를 모두 판석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덤 안에는 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무덤 안에 그려진 채색의 벽화는 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참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안 그림을 묘 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묘는 이중의 무덤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서쪽 돌방에는 한 개의 나무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서쪽 돌방에는 이미 사용을 했고, 동쪽의 돌방은 배후자를 모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쪽 돌방의 석실 벽은 모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흑,녹,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 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에 보이는 그림으로 생각을 해보다.

무덤 앞에 세운 안내판에 그려진 벽화그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긴 장죽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 올려 그릇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안에는 과일 같은 것이 들어있다.

벽화를 사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그림의 형태로 보면 비천인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한 손에 공양물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라면 단순히 남녀의 그림이 아니라 비천인을 그린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발밑에 그려진 뭉실한 것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선녀들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이 그림이 비천인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저 안을 볼 수 없다는 갓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폐쇄를 시켜놓았다는 것에는 찬성이다. 고분 뒤로 돌아가 앞을 내다본다. 훤히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이 아름답다. 영원히 머무는 유택이라 했던가? 그 안에서 천인들의 음악을 듣고 저 건너 피안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둔마리 고분 앞에 서 있는 석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처음으로 창건을 한 절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실상사는, 이미 그 역사가 1,200년 가까이 된 고찰이다. 실상사는 홍척스님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실상사에는 옛 실상산문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보물 제35호인 석등은 실상사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등으로 장명등이라고도 부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화사석을 받치는 받침돌, 그리고 화사석을 덮는 지붕돌로 구분을 한다. 그런데 이 실상사 석등은 팔각기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는 달리, 장구의 형태인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이다.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받침돌의 고복형 간주석, 석조미가 일품

실상사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밑으로 3단의 받침을 쌓고 있다. 받침부분은 모두 3단으로 구성을 했는데,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의 귀퉁이에 조각한 귀꽃이 색다른 석등이다. 지대석은 밑에 팔각의 넓은 돌을 놓고 그 위에 안상을 새긴 팔각의 돌을 올려놓았다.

지대석 위에는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귀꽃 위로는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다. 중간 받침돌은 일반적인 팔각형이 아닌, 장고통과 같은 형태로 둥글게 조각한 간주석을 놓아 특이하다. 간주석에도 띠를 둘러 앙련을 조각하였으며, 위에 연결된 조각은 흡사 네 잎 크로버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어 색다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장구통처럼 생긴 간주석과(위) 기단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에도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큰 규모로 조형이 되어, 석조계단을 조성해 놓고, 그 위로 올라가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집혀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아름답게 조형이 되었다.

화사석과 머릿돌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화사석의 창을 보면 한 면은 크고, 남은 면은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불을 붙이는 창을 크게 낸 듯하다. 창 하나를 내면서도 조금 더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하다. 화사석 위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날렵하게 경사가 졌는데, 팔각면의 끝에도 귀꽃이 자리하고 있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실상사 석등의 간주석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형태로 팔작지붕의 날렵함을 지녔다. 그리고 돌출된 꽃모양인 귀꽃을 조각하여 멋을 더했다. 덮개석 위에 얹은 머리장식은 화려한 무늬를 새겼으며, 이 머리장식에도 화려한 무늬와 함께 귀꽃을 조각해 붙였다. 실상사 석등은 받침돌, 덮개석, 머리장식이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모두 귀꽃을 놓아 뛰어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사대의 뛰어난 석조미술품

이러한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실상사 석등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석조물 조형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원형 그대로를 거의 보존하고 있는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벌써 천년 세월을 서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화사석과 귀꽃(가운데) 그리고 머리장식

아마 실상사 일원이 사적 제209호(백장암과 약수암을 포함)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뿌리는 비에 몸을 적셔가면서도 답사를 그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실상사 답사를 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가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자본’이란 생각이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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