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왕정동 482-1에 소재한 사적 만복사지. 만복사지 한편에는 전각이 한 채 있다. 이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복사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이상하게 이곳을 찾을 때마다 해가 떨어질 시간이다. 그래서 항상 전각 안에 있는 석불입상의 사진은 늘 그늘이 드려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만복사 절터 전각 안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 정도의 석불입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인데, 이 석불입상도 창건 당시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창건 당시 만복사의 사세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손과 발이 없어진 채 발견돼

이 석불입상은 민머리의 정수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자연스럽게 살이 오른 타원형으로, 눈과 코, 입의 형태가 자연스러워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법의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이 보인다. 신체의 굴곡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며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유려하게 처리하였다.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석불입상은 발견 당시 발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었으며, 광배도 후에 발견이 되었다. 최근 묻혀있던 부분을 들어내고, 깨어진 광배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석불입상은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이 석불입상의 얼굴은 원만하게 조형이 되었으며, 목 뒤에는 칼라와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손은 사라져버렸다.

석불입상의 뒤편에 붙인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어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화불을 새겨 넣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뒤편에도 선각이 된 불상을 새겨

손과 발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얼굴 부분에서도 눈 부분이 조금 손상이 되었으며,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팔이 보이지가 않아 불편해 보인다. 아마 팔과 다리가 제대로만 있었다고 해도, 이 석불입상의 가치는 더 있었을 것이다. 발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뒤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받침돌과 광배에 새겨진 화불
 
이 석불입상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처리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한 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이 된다. 이렇게 바위의 양편을 이용한 석불의 조형은 매우 드문 형태이다. 두 손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그 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름다움을 위해 손을 끼울 수 있도록 제작한 석불입상이, 오히려 두 손을 잃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뒷면에 선각처리한 불상은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한다.

이번 답사에도 석양에 그늘이 드리운 석불입상을 찍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실력이 있는 블로거라면 당연히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 내었겠지만. 그저 자료 정도를 찍는 실력밖에 없으니 어찌하랴. 다음에는 오전에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그늘을 길게 끌며 만복사지를 떠난다.

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11만 명이나 되는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군관민은 서로가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을 범하지 못하면 승전하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전주성과 남원성을 공격한 것이다. 우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고, 좌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병사 1천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군사로 남원성을 지키게 히였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13일부터 16일까지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성 안에 6천여 명의 백성들이 살았다. 군관민 등 이들 1만여 명은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만여 명의 군관민을 모신 만인의총과(위) 선조 30년인 1597년 8월 12일 1천여명의 아군 병사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위용을 떨치면서 행차를 하고 있다.(가운데)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아래)

만인의총, 그 역사의 현장

남원시 향교동에 자리한 만인의총. 사적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전으로 인해 해제가 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이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에도 수많은 폐해를 당한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597년 9월에 용성관 동편에 유택을 조성하였다. 그 후 광해 4년인 1612년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다.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충렬의사 액’이 하사되었고, 숙종 원년인 1675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고종 8년인 1897년 사우를 철폐하고 단을 설치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소를 파괴하고 칠백의총 재산을 압수하는가 하면, 제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들을 투옥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인의총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와 충의문, 그리도 성인문과 위폐를 모신 전각(위로부터)

만인의총, 역사의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이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따가운 햇볕은 땀을 솟게 만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 대문인 충의문을 지나 성인문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보인다. 충렬사다. 만인의 위폐를 모신 전각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오른다. 만인의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다.

묘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 한편에 만인의총이란 비가 서 있다.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목에 메인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봉문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당시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일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성내의 백성들은 곡괭이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항전을 했을 것이다.

고작 4천명의 군은 총으로 무장한 왜병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 밤낮을 성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만인의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참 편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선조님들의 이런 죽음으로 지켜낸 이 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구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경내에 세워진 순의탑과 만인의총 옆에 세워진 비, 그리고 팔충신 사적비와 기념관 내부(위로부터)

이렇게 9월의 한낮에 고요하기만한 봉분 한기. 저 안에 만 명이나 되는 나라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우리 선조님들이 계시다. 지금 우리는 저분들에게 어떤 후손들일까? 과연 저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오늘 이 자리에 고개를 숙인 또 하나의 모자라는 후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땅, 단 한 뙤기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전주 경기전 앞에 가면 성당이 있다. 전동성당이라 부르는 이 성당은 1908년에 불란서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립에 착수를 하여, 1914년에 완공했다. 벌써 역사가 100년이나 된 이 성당은, 중국에서 건너 온 100여명의 벽돌공들이 직접 벽돌을 구워 건축을 했다. 이 성당으로 인해 근처에는 중국인 거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전동성당은 현재 국가 사적 제2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전동 성당을 세운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조선조 정조 15년인 1791년 12월 8일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당시 32세)과 권상연(야고보, 당시 41세), 그리고 순조 원년인 1801년 10월 24일에는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당시 45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당시 37세) 등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



믿음의 순교지에 세운 성당

우리나라 첫 순교지인 이곳에 세운 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으로, 인접한 풍남문과 경기전 등과 함께 전통과 서양문화의 조화를 선보이고 있다. 첫 순교자인 윤지중은 현 충남 금산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1791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모친상을 당하면서 당시 유교식의 절차를 따르지 아니하고, 천주교의 제례절차에 따라 장례를 모셨다.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천주교식의 장례절차를 따랐다고 하여, 외종사촌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이 자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시체는 당시 국법에 따라 9일간이나 효시가 되었다.





피로 얼룩진 풍남문의 돌로 주추를 삼다

1801년 10월 24일, 사도 유항검과 윤지충의 동생인 운지헌은 대역모반죄라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 형을 당했다. 그리고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의 목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려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90년 정도가 지난 1889년 봄에 전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프랑스 보두네(한국명 윤사물) 신부에 의해서, 1908년에 착공이 되었다.

이 건물은 비잔틴풍의 건물로 지어졌으며, 설계는 프와넬 신부가 담당을 하여 1914년에 완공을 하였다.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주춧돌은 풍남문의 성벽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도 유항검의 피로 얼룩진 돌을 이용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최초로 주임신부로 부임한 보두네 신부는 1859년 9월 25일 프랑스 아베롱 지방에서 태어났다. 1884년 9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885년 10월 28일 한국으로 입국했다.




1889년 5월 전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26년간 재직을 하였으며, 1915년 5월 27일 선종에 들었다. 보두네 신부는 본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며, 이 두 건물이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전동성당은 호남 최초의 서구식 건물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지 위에 세워진 전동성당. 입구는 마치 우리나라의 솟을대문을 연상케 한다. 중앙을 높이 두고 양편을 낮게 조성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고성을 연상케 하는 앞면과 측면은 볼수록 웅장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촘촘히 놓인 기둥 위에 나란히 보이는 창문들이 이채롭다. 연인들 두어 쌍이 앉아서 밀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제관 앞에는 배롱나무의 꽃이 지기 시작한다. 나무 밑에는 젊은 연인들이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흡사 서구 어느 한가한 공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저 젊은 연인들은 이곳이 피의 역사로 얼룩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초가을 오후의 전동성당은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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