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다.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

2011년 12월 10일 찾아간 화성 행궁. 날이 쌀쌀하긴 해도,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돌아보자니 등줄기에 땀이 밴다. 언제나 그렇듯 답사는 늘 발길이 바쁘다. 그저 남들은 사진 하나 찍으려고 있는 대로 폼을 잡고는 하지만, 나 하고는 거리가 멀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제정의 옆에는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젯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납일(臘日)’이란 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을 말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그 날이 달랐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동지 이후 세 번째 미일(=양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 날은 궁에서는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향(臘享)'이라고 했다.



납향일은 그 해의 끝에 해당하므로, 일 년을 정리하면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도 이 납향일에 이곳 화령전에 와서 아버지인 정조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정의 물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제사는 정조의 어진이 화령전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우물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현재 복원이 된 화령전 안의 제정은 밑에 복원된 전사청 앞으로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다. 전사청은 ㄱ 자형으로 지었는데, 동편 끝이 한 칸 돌출이 되도록 하여 마루를 깔았다. 모두 8칸으로 지어진 전사청은 동편에 방과 툇마루를 놓고, 4칸 째에 문을 두었다. 이 문을 통하여 운한각으로 음식 등을 날랐을 것이다.

좌측 4칸은 한 칸의 광과 세 칸의 방으로 되어있다. 전사청 앞에 굴뚝을 보아 이곳은 온돌방을 꾸몄을 것이다. 납향일이면 추운 동지 때를 지나서이기 때문에, 온돌방이 아니라면 전각 안이라고 해도 추위 때문에 제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향대청과 제기고가 복원이 되는 날, 사라져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 맞춰질 것만 같다. 2011년 12월 10일에 찾아간 행궁 곁 화령전은, 그렇게 하나하나 역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왕권강화 정책의 상징인 화성행궁

현재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성행궁은, 그 일부만이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화성행궁은 화성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 이외에도 한양의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 때는 과천행궁과 사근참행궁을 건립하였고, 정조 18년 '시흥로'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 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인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안산행궁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이나 시흥, 안양과 안산, 사근참 등 속읍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다.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을 돌아보다

화성행궁에는 현재 어떠한 건물이 있으며, 그 전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복원이 된 행궁은 정조 당시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 행궁의 곳곳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냥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인 1795년에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정조 18년인 1789년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가 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 되었다.

내포사에 오르다

이 봉수당 뒤로는 팔달산이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에 작은 1평 남짓한 전각이 한 채 서 있다. 그저 행궁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이곳은 눈여겨보지를 않는다. 내포사(內鋪舍), 이 작은 전각은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에 알리는 신호를 하는 곳이다. 화성에 포루(鋪樓)가 있다면, 행궁 안에는 포사(鋪舍)가 있다.



화성 안에는 원래 서남포사, 증포사, 내포사 등 세 곳에 포사가 있었다. 이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뒤편 높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화성 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내포사 역시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었던 것을 2006년에 복원을 하였다.

소나무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내포사. 행궁 쪽으로 목어를 걸어두었다. 목어를 건 반 칸은 개방이 되었으며, 그 뒤편으로 작은 온돌방이 있다. 사시사철 이곳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궁은 화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빠른 신호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행궁 바로 뒤편에 자리를 한 듯하다.



작은 건물 하나가 얼마나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포사 위로 오르면 소나무 사이로 행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 행궁을 돌아보는 걸음을 이 내포사로부터 시작을 한다. 2012년 1월 29일,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다. 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행궁의 뒤편 내포사를 아이폰으로 촬영을 하였다.

화성 행궁 옆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풍화당은 이안청과 담을 사이로 그 뒤편에 자리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팔작집으로 조성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화당이 있다. 이 풍화당은 재실이다. 정조의 제를 올리는 날이면 제관들이 와서 묵던 집이다. ‘풍화당(風化堂)’이란 사회의 풍속과 기강과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순조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전각이다. 조선조 제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 재실(풍화당),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재인이 살았던 풍화당

화성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20년 정조의 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화령전은 운한각과 이안청, 그리고 풍화당 만이 남아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인 고 이동안옹은 재인청 출신이다. 재인청은 수원을 중심으로 모인 예능인들의 집단이었다. 재인청에 회원이 많을 때는 3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거대한 예능집단이었나 보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해있지 많은 사람은 기예조차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 이동안옹이 처음에 수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바로 운한각 옆에 이안청에 기거를 하면서 운한각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당시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이가 없단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이동안 옹에게서 춤을 전수받은 고성주(남, 56세. 팔달구 지동 거주)는 “처음에는 운한각에서 춤과 소리 등을 배웠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우다가 불이 났어요. 그래서 문화재를 태운다고 쫓겨나 풍화당으로 옮겨, 그곳 마루에서 배우고는 했죠.” 라고 한다.



고 이동안 옹의 딸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보유자였던 고 정경파 선생은 이동안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자, 풍화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고 정경파 선생의 첫 제자인 박경현 무용학원 원장은, “저희들도 운한각 안에서 춤을 배우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문화재를 보존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풍화당으로 나와 기거를 했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풍화당에서 기거를 하셨어요.” 라고 한다.


단아한 5칸 건물 풍화당

풍화당은 단아하게 지어진 - 자형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고, 중앙에 세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양편에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의 양편은 판벽으로 막았다. 마루방 세 칸의 뒤편으로는 판문을 내었고, 앞으로 낸 문은 열어 올려 위로 걸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의 주추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으며, 앞에 낸 협문을 통해 제를 지내러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은 재실로 지어졌지만, 딴 곳의 재실에 비해 화려하지가 않다. 아마도 전각의 이름인 풍화당이란 뜻 때문인가도 모른다. 한 때 재인들의 풍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화당. 역사는 그렇게 아픔을 놓고 이어가는가 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행궁과 그 북쪽에 정조 사후에 건립한 화령전으로 구분이 되어있으며,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행궁이야기를 시작하며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조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이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에 이어 행궁과 화령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이곳에서 읽어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날 찾아간 행궁과 화령전. 먼저 화령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고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0) - 동북노대와 적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척,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척 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가공할 위력의 쇠뇌를 날리는 동북노대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고 한다.




더욱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시와 공격의 효과를 노린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안문 양편에 적대를 조성한 까닭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 된다. 그 장안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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