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내를 건너면 좌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나온다. 대모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작은 산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섬기던 장소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 학성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 대모암을 창건하였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700m 정도라고 하지만,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성의 길이는 100여 m 정도인 것 같다. 남은 부분은 넝쿨이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다. 성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았는데, 성벽의 넓이는 1.3m ~ 4m 정도가 된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대모암과 대모산성. 아마도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산당과 연결이 된 전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산당에 모셨다는 신격이 혹 홀어머니는 아니었을까? 성벽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본다. 그저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는 날이다.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윤영채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5월 22일 찾아간 집은, 일반적인 고택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집의 구조가 일반 양반집이나 민초들의 형태가 아닌 특이한 형태로 꾸며져 있다.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옛 고택을 나름대로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사람이 생활을 하는 고택은 아니었다. 현재 안채와 중문채, 문간채를 겸한 사랑채 등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은 원래 남원을 ‘방(坊)’이라는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48개의 방을 조성했는데, 그 중 ‘이언방(伊彦坊)’에 속하였던 곳이다. 이언방이란 아마도 선비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8방 중 최고의 명당에 자리해

이 이언방이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옆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집은 중종 6년인 151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돼, 5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집이다. 이 이언방은 48방 중 가장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언방이라는 마을에 있던 집으로 ‘동대(東臺)’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관청의 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이 건물이 남원 수령의 별장이었다고도 한다. 건물은 중앙에 안채인 듯한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편에 부속건물을 붙여지었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이 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우선은 집의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고택과 그리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중간에 살림집으로 개조를 하면서 약간의 형태가 달라진 듯하다.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현재의 문간채에 붙은 사랑채는 후에 다시 붙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청의 옆에 붙은 날개채 역시 근자에 들어서 사람이 살림을 할 수 있도록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높임마루가

윤영채 가옥의 사랑채는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방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 끝에는 판자문을 달아낸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 사랑채를 나중에 꾸몄다는 것은 집의 구조로 보아 알 수 있다. 낮게 막힌 담이 사랑채에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중문은 안채의 뒷마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으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이를 두고 한 층이 높은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 중문에서 대청까지는 모두 세 단으로 높아진다. 두 개의 방과 안채 건넌방 사이에는 높임마루가 있다. 일반적인 높임마루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뒤로는 벽을 막아 판문을 달고,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어느 집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집의 특성상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에 지형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지형에 맞게 축조를 한 것이란 생각이다.



활주조차 색다른 윤영채 가옥

넓은 대청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관청의 동헌을 보는 듯하다. 뒤로는 세 칸 모두 판문을 시원하게 달아냈으며, 마주보고 우측으로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림을 하기 위해 꾸민 집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집을 후에 살림을 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개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바깥 지붕은 활주를 따로 주추를 놓지 않고, 기둥에 기대어 건물 주추위에 올려놓았다. 윗방의 뒤편에는 벽을 돌출시켜 다락의 용도로 사용했다. 전체적인 집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중문채와 안채의 사이에 특이한 형태의 높임마루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꾸밈새 등이 특이하다. 옛 고택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새로운 것은, 바로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방아간댁’ 혹은 ‘회령댁’으로 불리는 집이 있다. 기와의 명문에는 건륭27년인 1762년과 도광 5년인 1825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62년에 처음으로 집을 짓고 1825년에 개축을 한 듯하다. 그런 명문으로 볼 때 이 집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250년 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속초시 도문동 1504호 김근수 가옥은,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4월 23일 찾아간 김근수 가옥은, 한 마디로 옛 정취가 묻어있는 집이다. 집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머니는 연세가 80이 훨씬 넘어 보이신다. 이 집을 40여 년 전에 매입을 하였다고 하신다.



함경도 형 집으로 지어진 김근수 가옥


김근수 가옥은 함경도 형태로 지어진 집이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에 붙어있다. 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진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비좁기는 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는 생각이다. 함경도식 온돌 겹집에 마루를 수용한 이 집은 안담과 바깥담을 두른 형태이다.


허리를 다치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는, 방문을 일일이 열어 주면서 잘 살펴보라고 하신다. 수많은 집을 돌아보았지만 이렇게 대접을 받기는 또 처음인 듯하다.




담벼락에 낸 굴뚝이 이채로워


김근수 가옥은 일반적인 고택의 형태는 아니다. 집을 바라보면서 몸채의 좌측 편에는 두 칸으로 된 사랑이 있다. 앞으로는 우물마루를 놓았으며, 방은 가운데에 문을 달아 두 개의 작은 방으로 꾸며졌다. 방문을 열어주면서 지금은 공부하는 학생이 묵고 있다는 할머니의 설명이시다.


사랑의 앞으로는 바깥담을 둘러놓았다. 그리고 담벼락에는 강원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벼락 굴뚝이 보인다. 마루는 툇마루 형태로 놓았다. 안채는 안방과 뒷방으로 꾸며져 있어 이중 겹집으로 구성이 되었다.





부엌에는 본채의 지붕에서 이어져 내려 온 마구간이 붙어 있으며, 부엌문을 열어야 드나들 수 있는 뒤 사랑이 있다. 뒤 사랑은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가묘를 모시는 벽장이 있다고 한다.


뱀의 형국에 해당하는 명당


원래 김근수 가옥은 현재의 몸채 앞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15 광복을 전후해 집이 축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은 풍수지리상 뱀의 형국에 해당하는 명당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저 윗집과 저 아랫집까지 모두 내 집이야.”

“할머니 부자시네요”
“이 집에서 아들 딸 다 대학을 보냈어.”

“정말로 고생하셨네요.”

“부엌에 붙은 것이 외양간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냥 광으로 써”





귀가 어두우신지 말씀을 드려도 잘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일일이 방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해 주시는 할머니가 고맙기만 하다. 허리를 다치셨다고 하시는 할머니,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번지, 학성산에 위치한 ‘인취사’. 2월 13일, 일요일에 찾아간 인취사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구불거리며 들어간다. 인취사 주변은 온통 연꽃이 즐비한 곳이다. 연꽃축제로 더 알려지기도 한 이 절은, 백제 무녕왕 18년인 518년에 창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지 ‘창암스님’은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 등에 넣어둔 절의 내력을 적은 복장물들이 다 도난을 당해, 절의 중창 년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인취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인취사(咽嘴寺)’라고 나와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과 같은 ‘인취사(仁翠寺)’로 적고 있다.


축대 밑에 자리한 연꽃단지

인취사를 둘러본다. 현재 주지인 창암스님이 이곳에 부임해 축대를 새로 쌓고, 안쪽에 있던 종각을 축대 앞으로 끌어내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밑에는 고무 통을 나란히 땅을 파고 묻어, 그곳에 연꽃을 심어 놓았다. 봄이 되면 각종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볼만 하다는 곳이다.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는 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공양간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을 딴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다. 공양간 좌우편 끝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석탑 2기가 서 있다. 그저 넓은 공간에 듬섬듬성 서 있는 탑이며 전각들이, 조금은 휑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산비탈에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시원한 정경이 펼쳐진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2기

인취사에는 옛 석탑이 2기가 서 있다.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이 석탑은 모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앞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것은 오래된 것이나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른쪽에 서 있는 탑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 석재로 구성한 이 석탑은 기단 갑석위에 삼층 석탑이 올려 진 상태로 있다. 기단갑석은 한 편이 떨어져 나가 상태이고, 탑신과 옥개석인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인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아래서부터 4-3-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2단의 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삼층석탑은 비례가 맞지를 않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깊게 떨어지고 있으며, 옥개석 끝의 반전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이고 있어,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5층으로 추정되는 인취사 석탑

탑의 맨 위에는 부정형의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절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모아 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갑석의 크기가 탑의 크기에 의해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아래 이층부분이 유실된 듯하다. 기단부가 없어지고 갑석만 남아있는데, 그 갑석의 크기로 보아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취사 삼층석탑. 비록 문화재자료이기는 하나, 그 또한 소중한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탑 하나에도 공을 들여 조성을 했을 당시 장인의 마음과 손길을 기억해 내는 것은,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2월의 찬바람에 올라간 인취사. 넓은 절터에 부는 한줄기 바람이 탑을 돌아 저 밑 연꽃마을로 사라진다. 곧 꽃피는 춘3월이 돌아오면 인취사는 각종 아름다운 연꽃으로 단장을 하게 될 테고, 그 바람 한 점이 꽃을 재촉하는 듯하다.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도로변에 자리한 괴헌 고택.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설 연휴 전인 1월 29일에 찾아간 괴헌 고택. 구제역으로 인해 영주의 여기저기 도로가 막혀있다. 특히 이산면 방향은 축산농가가 많아서 그런지 중간 중간 도로를 폐쇄한 곳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괴헌 고택까지는 도로폐쇄가 되지는 않았다.

영주 괴헌 고택은 연안 김씨 영주 입향조인 김세형의 8세손인 덕산공 김경집(1715~1794)이 정조 3년인 1779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낮은 비탈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었다. 괴헌 고택은 외풍을 막아주고, 바람이 불면 낙엽을 쓸어 모아 준다는 ‘소쿠리형’, ‘삼태기형’의 명당 터라는 것이다. 김경집은 아들 김영(1789~1868)이 분가할 때 이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구분

읍면동

개소수

시작지점

폐쇄일자

폐 쇄

설치물

종 류

노선번호

합계

2개

읍면동

7개소

 

 

 

1

이산면

(5개소)

이산면 지동1리덧재

2010.12.08

모래

리도207호

2

이산면 지동3리장수골

2010.12.12

모래

리도202호

3

이산면 신암1리배진기

2010.12.18

 

 

4

이산면 신암2리우금

2011.01.02

 

5

이산면 원리 솔고개

2011.02.06

나무

 

6

봉현면

(2개소)

봉현면 하촌1리한티재

2010.12.06

경운기

리도207호

7

봉현면 하촌3리 제방

2010.12.13

경운기

하천제방

답사 당일 영주시에 통행이 제한 된 마을들. 굵은 글씨는 답사시 막혔던 곳이다. 이산면에 집중적으로 길이 막혀있다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으로 짓다

김영은 이 집에 ‘괴헌’이란 당호를 붙였다. 그것은 집 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괴헌 고택은 고종 8년인 1871년 선생의 증손인 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가옥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 형으로 집이 구성되어 있다. 뒤편에는 동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한다.

괴헌 고택의 특징은 사랑마당과 안마당, 그리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사랑채 우측에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납공간과 쪽마루, 그리고 고방 등을 여기저기 펼쳐놓아 집안에 많은 기물들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원래 정침의 앞에는 ‘월은정’이라는 정자와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1972년 수해시에 유실이 되었다고 한다.



날아갈 듯한 사랑채의 처마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막돌로 쌓은 축대위에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모두 세 칸으로 지었으며, 동편 한 칸은 마루방으로 꾸몄다. 문간채는 바깥담을 판자벽으로 둘러놓아, 전체적인 집안 분위기를 대문간부터 부드럽게 했다.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툇마루는 사랑 동편까지 이어진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사랑채는 집 전체가 날아갈 듯하다. 그만큼 사랑채를 꾸미는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중문이 나 있다. 중문 위에는 ‘괴헌고택’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으로는 사랑에 불을 때는 아궁이와 고방을 마련했다. 중문 앞에 쌓여있는 장작더미가 정겹다.

중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광채가 자리하고, 맞은편에 안채가 조금 높게 막돌로 쌓은 축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채는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공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으로는 쪽마루를 놓고 바람벽으로 막았다. 이 쪽마루를 이용해 중문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쪽마루의 출입처는 사랑채 동편에 붙은 날개채에도 나 있다. 괴헌 고택에는 안방에 피난다락과 사랑방의 뒷벽에 은신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쪽마루가 그런 대피수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리 안되는 문화재청 자료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대개는 그 지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화관광 편을 찾아보거나, 문화재청의 문화재 설명을 참고한다. 그런데 괴헌 고택의 자료를 찾다가 보니, 영주시청 홈페이지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나와 있다. 2009년 10월 30일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 두 곳에 소개가 되어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였다가, 2009년 10월 30일자로 중요민속자료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승급이 된 괴헌 고택이,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직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소개가 된 것이 남아있어 혼란을 야기한다.


위는 괴헌고택이 경북 문화재자료라고 남아있는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창, 아래는 영주시 문화관광 창

우리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문화재청에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것인지. 이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문화재청에서, 과연 우리 문화재를 올바로 관리를 할 수가 있을는지. 그저 문화재를 사랑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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