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 중기의 인물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8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애를 먹고도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한 곳이다. 관리인도 없고, 관리사는 텅 비어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각문은 새로 보수를 한 듯한데, 배부른 고양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덩달아 놀랐다. 담장 밖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서원만 겨우 몇 장 사진을 찍고, 뒤편 사당은 아예 오를지조차 못했다. 비가 왔는데 잡풀이 발목을 넘게 자라, 온통 신발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 계단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 풀이 가득 자라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문극겸 선생

문극겸(1122 ~ 1189) 선생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한 선생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 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의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드라마 무인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극겸 선생은, 의종이 선생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복관시킨 뒤 벼슬을 올려주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인척인 점으로 무사히 살아났다. 선생은 이의방과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이때 이공승 등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갔는데 서원 앞마당에는 풀이 발목을 덮어 물이 신 안에 가득고였다(위) 문이 잠겨져 있어 담 밖에서 촬영을 하였다.

원래 문신인 선생은 무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져, 문무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후에는 최세보 등과 함께 고려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의방의 사돈인 선생은,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의 장인이기도 하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7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퇴락한 송호서원,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원래 송호서원은 1777년에 삼가현 역평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이 복원되었다. 그런 송호서원은 합천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건한 것이다.



일각문과 담장을 새로 보수를 하였다.(위) 그러나 관리동은 비어있고,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깨져 있다. 말벌이 즐비하게 죽어있다. 

두 번이나 새롭게 자리를 튼 송호서원.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은 굳게 닫혀있다. 비에 젖어가면서 옆으로 돌아가니 관리사인 듯한 집이 있다. 그러나 퇴락한 집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으깨어져 있다.

죽어있는 말벌들을 보니, 누군가 약으로 말벌을 죽인 듯하다. 이왕 말벌 집을 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해 놓던지. 질퍽거리는 땅, 그리고 자라난 잡풀들. 송호서원은 그렇게 또 한 번의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배부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댄다. 아마도 갈 곳 없어 이곳에 묵는 녀석이지만, 녀석도 이렇게 퇴락해 가고만 있는 서원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수월정(水月亭)’, 이름대로라면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일 듯하다. 산청군을 답사하는 13일, 수월정을 찾아 나섰다. 이번 답사에 유일하게 찾아보고자 했던 정자이다. 내비를 이용해 주소를 입력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444번지. 수월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5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수월정의 지번 앞에 도착하자, 내비가 찾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내판을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수월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곳을 지나 수월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던 수월정.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수월정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길가 쉼터에서 쉬고 계시던 어르신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길에서 보인다는 정자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444번지 앞에서 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까지 가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보자고 아우를 졸랐다. 더 가파르다. 위로 올라가니 우측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수월정이 거기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문화재를 길거리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왜 수월정의 안내판은 없었던 것일까? 근 1시간 이상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수월하게 찾을 줄 알았던 수월정은 그렇게 애를 쓴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수월정의 측면과 나뭇가지로 막혀버린 입구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 수월정

수월정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방 두 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가운데 방을 둔 좌측에는, 뒤편으로 밀어 한 칸의 방을 두고 우측으로는 누마루를 깔았다. 마루 앞에는 양편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기둥은 외진주는 원형이며, 내진주는 사각형이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정자. 앞으로는 나무가 들어차 정면에서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사진에 담아냈다. 수월정은 1915년에 석초 권두희가 김재 권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대개 마루를 중심으로 구성을 하지만, 이 정자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산청지방에서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온돌방을 중심으로 구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천정에 달린 말벌집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기둥 아랫부분. 그리고 떨어져 나가버린 판문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다

산청군은 비교적 문화재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월정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생각이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주추위에 세운 기둥에 시멘으로 발라 놓았다. 아마도 기둥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다니. 아마 시멘트가 마르면, 이것을 주추처럼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 본다. 누마루 끝에 판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천정에는 커다란 말벌 집이 달려있다. 벽은 무너져 마루에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를 했다니.


벽과 찬정에서 떨어져 내린 흙더미

이 수월정을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고, 부수어져 가고 있는 수월정.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아마도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을 정자인데 말이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산 2-1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둔덕의 윗부분 노송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조선조 세조 2년인 1456년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가 지은 정자이다. 정자 이름을 ‘귀래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 명칭은 바로 신말주의 호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곳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이곳으로 내려와 뜻이 통하는 노인 열 명과 ‘십노계’를 결성하고, 이 귀래정에 올라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정자 주변에는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서거정, 강희맹 등의 귀래정기와 시문 등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귀래정. 현재의 간물은 1974년에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귀래정을 오르는 길에는 신말주의 후손들이 살았단 유지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신경준의 ‘고지도’ 등을 보관하고 있는 ‘유장각’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신말주의 세거지는 다시 한 번 거론하기로 한다. 노송이 높게 자란 언덕길을 오르면,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세거지를 지나쳐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다 보니, 각종 새들이 여기저기서 푸득이며 날아간다. 아마도 저 새들도 이 노송 숲길이 꽤나 좋은가 보다. 정자는 그저 바람을 맞으며 앉아 글 한 수 읊조리기 좋게 지어졌다. 정자 곁에는 고목이 되어버린 고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옛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귀래정’ 아마도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처가인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아픔의 역사로 뒤돌아 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흐르는 띰을 닦아낸다. 노송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6월 18일의 후텁지근한 날씨에 절어버린 나그네를 반긴다.



주추만 보고도 반해버린 정자

정자를 찬찬히 둘러본다. 정자의 중앙에는 한 칸 방을 뒤편으로 몰아 들였다. 누마루를 깐 사방은 난간 하나 장식하지 않은 단출한 정자이다. 기둥은 원형기둥을 이용했는데, 주추를 보니 꽤나 아람답다. 주추를 보면서 혼자 빙긋 웃어본다. 주추 하나에도 사람이 반할 수가 있는 모양이다.

밑은 넓고 배가 튀어나오게 둥글게 만들고, 위는 조금 역시 둥글지만 배가 튀어나오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 주추 가운데를 파 목재를 고정시켰다. 이런 주추를 만난 것도 처음이지만, 그 주추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렇게 주추 하나를 조형한 것도 귀래정 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그저 화려하지 않은 정자 귀래정. 그 누마루에 걸터앉아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처음 정자가 지어진지 벌써 550년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신말주 선생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일까? 천천히 정자를 내려와 세거지로 향한다. 세거지 곁 마을 집에서 백구 한 마리가 짖어대며 낯선 나그네를 경계한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산130-1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석산리마애여래좌상(石山里磨崖如來坐像)’ 이 마애불은 이번이 두 번째 답사이다. 첫 번째는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일몰 시간이 다 되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이 마애불은 적성면의 선돌마을을 지나, 도왕마을 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와서인가, 늘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이곳을 택해 답사 길을 잡았다. 6월 18일 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오늘도 어지간히 날이 찔 모양이다. 마애불이 500m 전방에 있다는 곳부터 걸어야 한다. 마애불로 인해 500m의 아픔이 있는 나이다. 예전에 500m 산 중턱에 마애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올랐다가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나서이다.


산길을 접어드니 마음만 바빠 오고

마애불은 대개가 깊은 산중에 있다. 요즈음은 교통이 좋아 차가 들어가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마애불은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석산리마애여래좌상도 산을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의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아무리 숲길이라고 해도 30도를 넘는 기온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목이 탄다. 그런데 물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참고 오르는 수밖에. 누군가 나무계단을 놓았다.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오르다보니, 불과 얼마 오르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이 난다. 그리고 가파른 암벽 위로 길이 나 있다. 쌓인 낙엽에 미끄러져 한 발만 실수를 해도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하다.



조심조심 바위를 지나고 보니 좌측으로 누군가 이곳에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돌 축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산죽이 자라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모기는 땀 냄새를 맡았는지 어지간히 달라붙는다. 산죽덤불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바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

바위는 약 2.5m 정도가 되는 듯하다. 몇 덩이로 나뉜 바위를 바라보니 좌측에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은 오른쪽 대좌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직으로 선 평평한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 불신, 대좌 등을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를 덮고 있어, 그 오랜 시간을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이다.



석산리 마애불의 머리 부분은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민머리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묘사하였다. 얼굴은 큼지막하게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큼직한 코와 두툼한 입술 등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입술은 가장자리는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왜 채색을 한 것일까?

삼도는 목이 짧아 몸의 상단에 걸쳐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얼굴에 비하여 유난히 작게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는 편이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왼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걸친 우견편단식 옷차림이다. 법의 자락은 배 부근에서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로 가는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대좌는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신광 안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광배의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선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두 번째 찾아가 만난 순창 석산리마애여래좌상.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얼굴 표현, 그리고 평행밀집형의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의 불신에는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상 조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마애불을 조성하고 채색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합장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말한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마애불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시원한 산바람이 산죽 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서원과 서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원은 앞에는 학동들이 배움의 장소로 이용하고, 뒤로는 선현을 모신 제각이 있다. 그에 비해 서당은 배움의 장소만 있는 곳을 말한다.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번지에는 ‘대각서당’이 있다. 하지만 현재 지정이 되어있는 명칭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344호인 ‘대각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물에는 조금 작은 현판인 ‘대각서원’과 그보다 큰 ‘대각서당’이라는 현판이 동시에 걸려있다. 선현을 모신 제각이 없어 서원으로서의 규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곡서원이란 명칭을 쓴 것은, 전에 이 서당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진주와 거창을 답사하면서 들린 사곡서당. 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을 당했다.


정교한 치목을 보이는 강당과 부속건물

이 서당은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앞으로는 문간채가 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후 툇집 형식이며, 정면의 기둥은 배흘림을 둔 두리기동이다.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꾸민 강당은 단면의 크기도 크고 훤칠하다. 이 서당은 원래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후에 다시 자리를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대각서원은 처음에는 각재 하항을 모시기 위한 ‘대각사’를 지었다가 그 뒤에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등 6분의 유학선현을 추가로 배향하여 일곱 분을 모시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대각서당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가장 답사가 어려운 곳이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거의가 닫혀있기 때문에 뒤 돌아서기가 일쑤다. 대각서당을 찾아 간 날도 대문이 닫혀있다. 그런데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이곳에는 서당 안 건물에 몇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강당과 동재, 서재에 모두 사람이 살고 있다.

강당에 사시는 분이 차 대접을 한다. 서원을 돌아보다가 이렇게 대접을 받아보기도 난생 처음이다. 알고 보니 이곳에는 동재와 서재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분들이 대각서당과 연관이 있는 분들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강당과 동재와 서재 모두가 사람의 온기가 배어있어 따듯한 느낌이다.



건물의 주초만 보고도 반하다

대각서당은 서원으로서 전체적인 배치가 무난하다. 또한 부재의 사용이나 적절한 비례의 적용, 그리고 동재의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법 등 조선후기 건축의 여러 기법들을 동시에 볼 수가 있다. 강당을 바라보면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두고, 두 칸의 대청과 또 한 칸의 방을 두고 있다. 잘 다듬은 네모난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운 강당은 주초만 보고도 반해버렸다. 팔각으로 조성을 한 주초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집 뒤로 돌아가니 뒤편은 사각의 마름보로 조성한 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전면과 후면의 주초를 다르게 논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동재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서원의 부속건물과는 다른 파격적인 형태로 지어졌다. 두 칸의 방을 두고 한 칸은 누마루를 깐 정자의 형태이다. 비탈진 터를 그대로 이용해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한 칸의 난간을 두른 정자방을 꾸민 것이다. 이 정자방의 주초는 장초석인데 역시 팔각이다. 밑에는 둥근 돌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장초석을 놓아 기둥을 올렸다. 이 서당을 조성한 치목이나 기타 부재보다 팔각과 사각으로 된 주춧돌만 보고도 감탄할 만하다.

 




세상에 변소인 줄 알았다가

대각서당은 원래 서원이었던 것을 자리를 옮기면서 제실이 사라졌다고 한다. 각재 하항의 후손들이 제실을 뒤편에 짓기로 해, 서원의 본 모습을 갖추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볼일이 급하다. 문간채를 나와 보니 문간채에 허름한 건물이 한 칸 붙어있다. 당연히 화장실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난다.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사람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볼일이 급하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여기 화장실 아닌데요”
“그럼 화장실은 어디에 있나요?”
“저 밭에 있는 건물예요”


서당 대문 앞에 붙은 건물. 화장실인지 알았다(위) 화장실은 밭 저편에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대문간에 붙은 임시건물은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화장실인지 알고 사람이 목욕을 하는데 문을 두드려댄 것이다. 안에 있는 여자 분이 얼마나 놀랐을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모처럼 차 대접까지 받고 서원이 서당이 된 사연까지 들을 수 있었던 진주 수곡면의 대각서당. 자연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모처럼 피곤한 자리를 쉴 수가 있었다. 밭 한편에 마련된 화장실 안에서 혼자 키득거린다. 조금 전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이다. 그러고 보니 이 화장실도 참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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