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 홍천읍 진리 구인당한약방 옆에 보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4호인 홍천 진리 석불이 있다. 좁은 보호각 안에 있는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28m에 받침대인 대좌나 광배도 없이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머리가 없던 것을 주민들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석불입상이 입고 있는 옷의 형태나, 양편 팔목에 팔찌가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어깨에는 보살상의 옷인 천의가 길게 발목까지 늘어져 있고, 허리 아래서 부터는 치마인 군의가 여러 겹 주름치마로 표현이 되어 있다. 머리가 없어 시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으나, 거친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입상으로 보인다.

 

 

좁은 보호각 창살, 답답해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재를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막아놓거나, 좁은 살창 등으로 첩첩히 싸놓으면 그도 또한 불편하긴 마찬가지이다. 좁은 보호각 안에 석불입상이 있어 전체를 찍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면은 목책으로 만들어져 있어, 전체 석불을 찍기도 어렵다.

 

부분을 나누어 찍다가 보니, 밑에는 누가 치성을 드린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 역시 머리를 주민들이 만들어 붙였다고 하는데, 그 모양새가 이상하다. 머리는 민머리에 얼굴이 넓적한 것이, 보살이라고 하기보다는 나한상에 가까운 머리를 올려놓았다.

 

어울리지 않는 머리가 슬프다

 

요즈음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머리가 없는 석불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머리는 과연 언제 어떻게 해서 사라진 것일까? 숭유정책을 편 조선조 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정변을 통해서도 훼파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종교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도,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목 없는 석불들의 처리 방법이다. 석불은 지역마다 그 조각기법이 차이가 난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하기에 어느 지역, 어느 시기에 조성된 석불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목이 없는 석불이 보기가 좋지 않아, 새로운 두상을 올려놓을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는 가급적이면 전문가와 상의를 하여, 그 몸체에 걸 맞는 두상을 올려야 할 것이다. 자칫 전문가의 참여 없이, 보기가 흉하다가 하여 아무 두상이나 올려놓는다고 하면, 그는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다. 지나침은 오히려 부족함보다도 못하다고 하지 않던가.

 

 

수난을 당해 목이 사라진 석불을 보기도 마음이 아픈데, 거기다가 아무런 두상이나 마구 올려놓아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이왕이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어울리는 머리 부분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은 바위가 많아 ‘묘바위’, ‘검바위’, ‘금암’ 등으로 불렀으며, 이곳에는 모두 11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그 중 9기의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고인돌에 파인 성혈, 쇠붙이로 조형한 듯해

 

고인돌 덮개돌의 윗면에는 수직으로 파인 알구멍(=성혈(性穴))이 있다. 금암동의 고인돌 중에서 2호 고인돌에도 성혈이 나 있는데, 구멍의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산시 금암동에 분포한 9기의 지정 고인돌은 금암동 일대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와 논에 분포하고 있던 것을,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 중에서 덮개돌만 땅 위에 올려놓은 것을 개석식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금암동의 고인돌 군이 바둑판식이라고도 하지만(문화재청 설명) 이곳의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으로 보인다. 덮개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6m에 이른다. 각 덮개돌의 둘레에는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공원으로 조성한 금암동 고인돌군

 

5월 2일 찾아간 금암동 고인돌 무리.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바위 위에 조성한 한 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6호 고인돌은 바위 위에 커다란 덮개돌 하나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화강암 계통의 장방형 돌로 조성한 덮개돌이다. 그 곳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제5호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5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두 조각으로 깨어져 있고, 돌의 형태는 장타원방형에 가깝다. 그곳에서 고인돌 무리가 모여 있는 아래편으로 내려가면, 여러 기의 고인돌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 중에서 경사가 완만한 비탈에 놓여있는 4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장방형에 가깝고, 덮개돌 남쪽과 동쪽 부분의 단면을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 금암동의 고인돌 무리군에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있으며, 7기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다.

 

 

 

 

사적 지정 서둘러야

 

고인돌군이 펼쳐진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어, 학생들이 찾아와 고인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와 모양, 분포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명판을 붙여놓은 구조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운동을 하면서 걷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군이 펼쳐진 동편으로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마을을 위하는 돌이라고도 한다. 모두 9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자리를 하고 있는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군. 현재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개석식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사적’으로 지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갖고 구분을 짓는다.

 

탁자식이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바득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인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였다.

 

이 지석묘는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중앙을 손질하여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처음부터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처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고인돌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있는 고인돌을 찾아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멀리 장거리 답사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편이다. 외삼미동 안으로 들어가 북오산IC 입구로 가다보니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런데 거리는 적혀있지 않고 앞으로 가라는 화살표만이 보인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다음에 안내판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지만, 화성 동탄 끝까지 갔는데도 어느 곳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는다. 오산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으로 굴다리가 있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내판이 없고, 굴다리 안에는 또다시 좌측으로 굴다리가 있는데도 안내판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이란 초행길인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랑 길가에 하나 서 있는 안내판. 화살표 하나로 문화재 안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 담당부서의 무책임한 처사에 울화가 치민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더 설치를 했다면, 20km정도를 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닌다. 내 고장의 자랑거리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천보 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추운 날씨 탓인가 문은 모두 비닐로 막았고, 마당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이니, 그 이전부터 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천보는 숙종 24년인 1698년에 태어나, 영조 37년인 17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천보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이곳은 300년 이상 된 고가일 것이다.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이천보 고가.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에 소재하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이다.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가 안채로 쓰여

 

이천보 고가에는 안채가 없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 안채가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안채가 있었다고 하면 더 멋진 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사랑채와 행랑채다. 행랑채 맞은편 건물은 최근에 지은 듯하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각문이 원래 대문의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ㄱ(기억)자형으로 사이를 벌려 자리한다. 사랑채의 정면 담에 일각문을 내어, 현재는 그 일각문이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로 사용하는 사랑채는 고종 4년인 18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ㅡ(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지어졌다. 동향인 사랑채는 잘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높이 45cm 정도의 사다리꼴 주추를 사용했다. 사랑채를 마주하고 좌측에 보이는 목조건물인 누마루 방은 고종 때 사랑채를 중건할 때 붙여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마루의 끝과 맞춘 누마루 한 칸과 방, 마루방인 대청과 두 개의 방이 연이어 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붙인 누마루는 3면을 창호로 둘렀으며, 여름이면 문을 모두 열어 바람을 맞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누정과 같은 누마루는 밖으로 돌출이 되는데 비해, 이천보 고가의 누마루 방은 건물 밖으로 돌출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집 주인의 나아가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있다. 사랑채에는 상고당(常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항상 옛것을 기억하라는 뜻인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수령 300년의 향나무가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이천보 고가 누마루방 뒤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한 그루로 인해 이천보 고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고가가 6·25 동란 시에 화를 입었음에도 이 향나무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인가 이 향나무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기만 하다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는 이 향나무는 가슴높이의 둘레가 84cm에 높이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이천보의 선조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이천보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있다. 이천보는 1698에 태어나 1761년까지 생존했다.

 

이 나무를 이천보의 조상이 심은 것이라고 하면, 결국 이천보 고가는 300년이 훨씬 지났으며, 이 향나무의 수령도 300년 이상이어야 한다. 각종 공해에 잘 견디어낸다는 이천보 고가의 향나무. 아마 이 집안의 끈질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담 벽으로 멋을 낸 행랑채

 

행랑채는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방이 두 칸이 있고 부엌이 있다. 부엌 좌측에는 헛간과 곳간이 있다. 이 행랑채 곳간 쪽의 벽은 돌로 만들었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은, 사랑채에서 볼 때 집안의 전체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또한 무료하게 맨 벽을 바라보기 보다는, 돌담 벽으로 꾸며 나름대로의 멋을 부렸다.

 

 

6·25 동란 때 불이 나서 안채 등이 소실이 된 이천보 고가. 전체적으로는 집 구조가 어떻게 꾸며졌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사랑채와 행랑채의 위치로 보아, 안채의 경우 행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가 소실이 되는 바람에 고택으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하여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한 때 이 고가의 모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을 것 같다.

 

 

 

아픔의 세월이 느껴져

 

300년이 더 지난 이 이천보 고가의 사랑채 뒤에 있는 향나무나 행랑채의 담 벽, 이층으로 쌓은 장대석의 기단 등을 보아도 이 집이 얼마나 운치가 있었던 집이었나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일각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저 어느 시골의 토호쯤이 살았을 그런 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실록에는 이천보가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했다고도 전한다. 강직한 이천보의 성격상 그런 책임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 집이 퇴락해 버린 것도, 그런 주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음은 아닌지. 긴 세월 사랑채 뒤에서 온갖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 지켜 본 향나무는 알고 있으려나?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정자야 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릴하고 있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그러나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들어, 정자의 아름다움을 적은 게판들이 정자 안에 빼곡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남다르다. 그만큼 정자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웠던 주변 경치를 잃은 정자는 슬프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남면 입석리. 운암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 양요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5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정자

양요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양요 최응숙이 지은 정자이다. 이곳으로 난을 피해 낙향을 한 최응숙은, 강물이 산을 휘감아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곳에 양요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양요정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는지 정자 안에 걸린 게판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정자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들. 양요는 정자를 지은 최응숙의 호로, 당시 이 양요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수많은 편액 안에 잘 남아 있다.



원래 양요정의 원 위치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쪽으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섬진강 댐의 공사로 인해 양요정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1965년 이곳으로 이전을 하였다. 양요정은 지금도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옮기기 전의 양요정은 산을 감돌아 흐르는 강과, 산 밑으로 낙수치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강과 산, 그리고 폭포와 정자. 한 마디로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대단한 절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절경 잃은 정자, 이름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양요정은 운암호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도, 산 밑으로 낙하를 하는 폭포도 사라졌다. 그런 인위적인 공사로 인해 멋진 절경을 잃어버리고만 양요정.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양요정은 여느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 가운데에 방을 두었다. 이런 형태의 정자는 남쪽 자방에서 많이 보이는 방들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자는 처음 그대로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정자 가운데 들인 방의 벽면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홀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친구들과 바둑을 즐기는 모습. 그리고 가마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행렬. 아마 양요 최응숙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난을 피해 이곳으로 낙향을 했지만, 늘 임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양요정에 올라 운암호를 내려다보면서 문득 걱정이 된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또 어떤 절경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전국의 수많은 정자들.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정자 들이, 이 양요정처럼 또 다른 슬픔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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