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경내 한편에는, 눈에 발목이 묻혀있는 석불 한기가 보인다. 날이 추워서인가 박물관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한 듯하다. 이런 추운 날 밖에서 저리 서 있다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다가 괜히 웃고 만다.

석불입상을 보고 웃은 이유는 그 모습이 균형미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 추운 날 만난 석불입상의 입가에 흘린 엷은 웃음 때문이다. 커다란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 돌에다가 어떻게 저리도 따듯한 미소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웃음 하나가 세상 온갖 고통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하다.



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인근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이 거대석불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석불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석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크다. 전체적인 모습은 굴곡이 없이 일직선의 형태로 표현을 하였다. 어깨와 하체가 일직선으로 다듬어 마치 원통이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살이 올라 풍성한 느낌을 준다. 반쯤 감은 눈과 입술 등의 윤곽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밋밋한 장식의 표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린 법의는 아무런 무늬가 없이 발밑까지 내려져 있다. 법의는 가슴께까지 깊게 파여져 있으며, 어깨부터 팔을 따라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표현한 주름이 이 석불입상에서 가장 표현을 강하게 한 부분이다. 두 손은 가슴께로 올렸으며, 그 아래편으로 법의가 U자의 주름으로 발목까지 내려가고 있다. 

손은 투박하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이유도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 때문으로 보인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트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손가락의 표현도 어디인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멋스럽지 못하다.



충청도 일원에서 보이는 고려불의 특징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일원에서 발견이 된 고려불의 특징이다. 중앙의 장인들이 아닌,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된 석조여래입상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석불의 특징은 거대불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전 천왕사 인근의 작은 암자 전각 안에 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래 기단부는 눈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봄철 눈이 녹으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받침돌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균형미는 떨어지는 석불입상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런 석조여래입상의 위로 덕분에, 이 추운 날에도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지역에 있는 문화재 하나 주변 정리도 못하는 지자체가, 문화 운운하는 것은 정말로 짜증스럽다. 용인시는 딴 지역에 비해 월등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는 곳이다. 공연장만 해도 용인시청 청사 내를 비롯해, 수지 등 몇 곳에 어느 곳에도 뒤처지지 않는 공연장을 갖고 있다. 그런 용인시에 소재한 문화재가 방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어이가 없다. 문화재 주변에 가득한 말라버린 덤불이며, 누군가 갖다 놓은 농기구 등, 이렇게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문화재를 보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264번지에 가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된 공세동 오층석탑이 있다. 탑안마을이라고 하는 곳에 서 있는 이 공세동 탑은 몇 년 전부터 찾아다닌 탑이다. 아파트 공사를 할 때부터 찾아갔으니, 어림잡아도 몇 년은 지난 듯하다. 당시는 이 탑을 보기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썼지만 찾지를 못했다. 이번 12월 26일 답사 길에서 만난 공세동 탑. 혼자 그렇게 독야청청하게 버티고 있는가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인 용인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이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백제계열의 고려 석탑

공세리 오층석탑은 백제탑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탑의 높이 2.5m의 이 석탑은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에 서 있다. 그 옆에는 목이 잘린 석불이 한 기 마른 덤불 속에 방치되어 있다. 탑의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면 이 석불의 머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석불이 지금처럼 머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보다.

「높이 2.5m의 이 탑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백제계 석탑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지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윗면에는 낮은 받침이 있다.(하략)」

이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무너져가고 있는 담장 밑에 방치되어 있는 목 없는 석불 한기가 같은 절터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사라지고, 기단부의 상단은 앞뒤 판석이 없다.

옛 절터, 사전에 발굴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이 안내판을 보면서 의아한 점이 있다.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공세동 옛 절터라는 옆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몇 년 전인가 이 탑을 답사를 하려고 왔을 때는, 이곳에 아파트를 짓느라 부산했을 때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 탑 주변의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가 궁금하다. 아마 당시 아파트를 짓느라 이 일대를 다 파헤쳤을 텐데, 그런 절터에 관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가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문화재가 서 있는 곳을 발굴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더구나 이곳이 절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세심한 발굴이 이루어졌어야만 했다. 또한 아파트를 건설한 축대 밑에 있는 이 석탑과 불상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지자체에서, 이렇게 문화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안양사로 추정하는 절터라는 곳에 있는 석불좌상. 목이 없고 주변은 온통 말른 덤불투성이다.

일설에는 안양사라고 하는 절터였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 같다. 그리고 이렇게 덤불 속에 방치된 석불좌상 등 분노마저 느끼게 하는 문화재 관리이다. 만일 사전에 충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면, 그에 대한 조사보고 정도는 안내판에 적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름 섬세한 고려시대의 석탑

이 공세동 오층석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는 상당히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해 연꽃문양을 둘렀는데, 상면만 땅 위에 보일뿐, 흙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주변을 정리하고 흙이라도 좀 파냈다면 한결 보기가 좋았을 것을. 상층 기단부는 앞뒤의 판석이 떨어져 나갔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탱주가 없는 것은 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몸돌은 모두 오층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일층의 몸돌은 크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층은 탑 몸돌과 덮개석을 따로 제작했는데, 이층부터는 몸돌과 덮개석이 한 장의 돌로 꾸며졌다.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추녀를 두었는데 처마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비록 일부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약간 치켜 올라간 처마 등 나름 멋진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어떠한 형태였는가를 알 수가 없음이 아쉽다. 이제라도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을 정리를 하고, 문화재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근 아파트에 사는 자라는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소중한 문화재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될까 걱정스럽다. 가뜩이나 문화재가 홀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에.

기단부가 땅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위천 가에는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위천을 지나다가 만난 용암정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좁은 다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한다. 얼핏 보면 길이 없는 듯 보이지만, 빙 돌아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처음에는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자가 냇가에 서 있고, 분위기 역시 괜찮다. 저런 정자라면 십중팔구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정자이다. 지나던 길을 되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용암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53호라고 한다. 용암정은 순조 1년인 1801년에 용암 임석형이 위천 가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올해로 210년이 된 정자이다.



사방을 돌아보면 다른 정자가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했다는 용암정은 고색이 찬연한 정자이다. 정자 위에는 방을 한 칸 들이고,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 황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아마도 풍류를 아는 용암 선생이 사방을 둘러 걸 맞는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 정자는 지붕의 끝이 날렵하게 치켜 올려져, 마치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하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으며, 누마루 위에 세운 기둥은 원형으로 다듬어 놓고, 마루방의 기둥은 사각으로 조성하였다. 난간은 간단하게 나무를 듬성듬성 대어, 시원한 느낌이 들게 조성을 하였다.



위천을 보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다

정자의 뒤편으로는 기암과 어우러진 위천 맑은 물이 흐른다. 누마루 한편에 마련한 한 칸의 방을 중앙에 두고 문을 내었다. 정자 안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다. 격자문으로 짠 문틀 안에 작은 문짝을 달아,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높인 것도 이 정자의 색다른 멋이다.

정자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정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다. 나무 판에 커다란 글씨로 양각을 한 용암정과, 반선헌 등의 글씨가 제각각 달라 글을 쓴 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용암정에 오른 뭇 사람들이 이렇게 편액의 글씨를 적어 기념을 하였나 보다.




사방에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내어 처마 끝을 받치고 있는데, 이는 정자가 지어진 한참 뒤에 세운 듯하다. 이 용암정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로 찍어내어,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었다. 투박한 그 모습에 호화롭지 않은 정자의 모습이, 오히려 기품을 잊지 않은 선비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생이 용암정에 오른 사연

용암 임석형 선생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은진사람으로 자는 원경, 호는 용암이다. 함안에 살았으며, 영조 27년인 1751년에 태어나, 순조 16년인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용암정을 짓고 나서 16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을 용암 선생은 이 용암정에 머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한 것이다.



31책의 용암유집이 전하며, 그의 묘갈은 유만식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공의 초연한 취미와 락()은 만년의 용암정에서 볼 수 있다. 영호남 선비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모두가 원학주인이라 그를 칭송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의민한 재주를 갖고도 출사하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자의 주인인 용암 임석형 선생. 위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시심을 띠워 보냈던 것일까? 1211일의 찬바람이 용암정으로 몰려온다. 위천 맑은 물이 잔 파문을 일으킨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 한 편을 지필묵을 갈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이 그리운 용암정이다.


경남 거칭군 거창읍 상림리 황강 가에 자리한 건계정. 중국 송에서 귀화한 거창 장씨의 시조인 충헌공 장종행의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05년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온통 암반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지은 후손들은 왜 '건계정'이란 쉽지 않은 명칭을 붙인 것일까?


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4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건계정은 중국의 주돈이와 주자 두 선생의 염계와 자양을 본 딴 것이다. 시조인 장종행의 고향이 중국 건주였으므로, 후손이 선조의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면우 곽종석이 붙인 이름이다. 정자 주변은 온통 암반이 자리를 하고 있다. 건계정은 그 암반을 주추로 삼아 자연스럽게 기둥을 세운 정자이다.




뒤편에만 판자벽을 둔 건계정

건계정은 앞으로 보이는 절경을 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래서 사방을 모두 개방을 하고, 뒤편 중앙에만 판자벽으로 낮게 막아놓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건계정은 주심포계 겹처마 합각지붕이다. 정자의 밑 부분에 놓인 암반 위에 그대로 정자를 세웠는데, 암반 자체가 주추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길이가 다 다르다.

기단과 초석이 없이 암반위에 세운 건계정.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누각 위는 기둥에 의해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중앙에 기둥을 생략하였다. 누각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사면을 모두 널빤지 두 장 정도를 덧내어 마루를 외부로 넓혀놓았다. 정자 안에는 1906년 양산 조정희가 지은 '건계정기'를 비롯한 많은 판상시 등의 편액이 걸려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한다.




최고의 흥취를 자랑하는 정자 건계정

선일등정흥미란 계산여차거장안
위관점각풍류갑 재야영협예수관
제조천림당주석 유어취란상음란
면군노력전도진 구인전공일궤난

날을 골라 정자에 오르니 흥취가 안 끝나
산과 강이 이 같으니 이제 어디로 가나?
벼슬을 하려니 점점 풍류가 없어짐을 알겠고
들에 있다고 어찌 만나는 인사를 싫어하랴?
새소리 숲을 지나 술자리에 들리고
물결일자 고기는 물속 난간을 헤엄친다.
그대 힘써 노력하여 앞길로 나아가게
높은 산 온전한 공부는 쉽게 무너지기 어려우이.

군수 이응익이 지은 시이다. 건계정의 풍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정자의 벽면 가득 차있는 많은 편액들.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공을 칭송하고, 주변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지은 글들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짓고 앞으로 흐르는 황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은 것일까?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오른 건계정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은, 이런 풍취를 알아가고 있어서일까? 못내 바쁜 답사 일정이 마음에 걸리지만,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다. 어느 때 또 이곳을 찾아 저 맑은 물속에 노니는 고기들을 볼 수가 있을까? 아마 이응익 선생의 마음이 지금의 나 같았을까? 바람을 따라 건계정을 나서며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바람 한 점이 누마루를 따라 마른 낙엽을 굴린다.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는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도로에서 찾기가 수월한 것은 앞쪽으로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미륵암은 전각이 3곳에 요사 정도가 있는,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이다. 절을 찾아들어가다가 보면 입구 양편에 목장승이 서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미륵암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인 ‘미륵암 석불입상’이 있다. 미륵암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요사가 있고, 앞으로 용화전이 보인다. 바로 석불입상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이 건물은 1927년 미륵암 신도들이 기금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미륵입상이 노천에 서 있었는가 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남원 미륵암 석불입상

고려초기의 일석으로 조성 된 석불입상

미륵암 석블입상은 온전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안면은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아마 오랜 세월 풍상에 훼손이 된 듯하다. 미륵암 석불 역시, 석불입상과 뒤에 광채를 표현한 광배가 한 돌로 만들어졌다. 남원 지역의 거의 모든 석불입상들이 이렇게 일석으로 제작이 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의 특징인 듯하다.

미륵암은 통일신라 때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미륵암에 모신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 세웠다는 미륵암은 흔적도 없다. 다만 현재의 대웅전을 세우려고 기초공사를 할 때 예전의 와편 등이 많이 발굴이 되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을 모르고 다 없앴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안타깝다.


안면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가슴께에서 양팔을 모은 듯하다.

심하게 훼손이 된 석불에는 사연이 많아

미륵암 석불입상은 전체적인 모습은 얼굴이 둥글고 온화한 표정인 듯하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았으며 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코나 입, 눈 등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미륵암의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와서 코를 갉아갔다는 것이다. 아마 기자속(祈子俗)에 상당한 영험을 보인 듯하다.

어깨는 둥글게 표현을 하였으며, 손은 가슴께로 모은 듯하다. 법의는 양편으로 흘러내렸으며, 밑 부분에서 양편으로 U자형을 그리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문양을 새겼는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광배의 한편이 떨어져 한 옆에 따로 모셔놓았다.



하반신에는 법의의 주름이 보인다(위) 받침돌은 원래 일석이었으나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떼어놓았다(가운데) 석불입상과 광배가 한돌에 조각이 되었다.

일본인에게 팔려갈 뻔한 석불입상

단단한 바위로 조각한 미륵암 석불의 광배는 왜 쪼개진 것일까? 마침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하고 가라고 한다. 석불입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방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광배는 왜 쪼개졌나요?”
“그것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 때 군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 미륵암 석불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팔았답니다. 그런 다음에 받침돌과 석불입상을 따로 떼어 내, 아마 당시에는 길이 안 좋아서 커다란 리어카 같은 것에 실어서 마을 밖으로 옮겨 갔던 것 같아요”
“그럼 그 때 깨졌나요?”
“예. 그런데 절 입구를 빠져나가자 그 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두려운 마음에 다시 제자리로 갔다가 놓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그 때 광배 일부분이 깨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부쳐보지는 않았나요?”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부쳐준다고 했는데, 철심을 박고 쇠를 박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해서 붙여놓으면, 볼썽사나울 것만 같아 그냥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쪼개진 광배의 한편과 석불입상을 모셔놓은 용화전
 
미륵암 석불입상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정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미륵암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래도 일본으로 팔려갈 것을 막아낸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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