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때인 신문왕 11년(691년)에 남원에 지어진 용성관. 용성관이 당시에는 어떻게 사용이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조에 들어서는 이곳을 객사와 같은 형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이 용성관을 객사로 보는 이유는 조선 태조를 상징하는 패를 모셨다는 점에서이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양편은 숙소로 사용하고, 중앙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용성관도 객사와 같은 형태로 보는 것이다. 용성관의 딴 이름은 백성을 돌보는 곳이란 명칭의 ‘홀민관(惚民館)’이라고도 했다. 용성관은 남원 광한루원과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모신 ‘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을 상징하는 3대 건물로 일컬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용성초등학교 입구 계단이 용성관의 흔적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용성관

용성관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일본이 141,500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몰아, 조선의 하삼도를 공격한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 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하였다. 그만큼 남원은 일본에 있어서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복남을 위시한 조선군은 죽기로 각오를 하고 일본군과 격젼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인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이 때 용성관도 불에 타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조선조 숙종 때 다시 축조를 하였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소실이 되었다. 용성관의 지표조사 때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이 되었는데, 1995년 용성관지 지표조사 때 출토된 유물들로 귀목문 암막새, 전돌, 철못, 다수의 와편 등 모두 50여점이 발견이 되었다.




용성관이 당시 얼마나 장중한 객사의 형태로 지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의 받침부의 길이가 70m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이 5만의 군사를 동원해 남원을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당시 남원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성초등학교 계단에 흔적이 남아

용성관지에는 1906년 6월 객사인 용성관을 용성공립보통학교로 바꾸어 개교를 하였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기 되었으며, 그 뒤 현대식 건물로 고쳐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성초등학교 본관 건물을 보면, 층계 두 계단이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양편에는 석물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용성관이 남긴 석물이다.

계단 양편에 놓인 석물에는 꽃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석조물이 언제 적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리고 학교 건물 앞 기단부도 옛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건물에서 차도 쪽으로 돌아 나오다가 보면 철책으로 둘러친 곳에 많은 석물들이 보인다. 이 석물이 바로 용성관에 사용되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석물의 크기에 압도당해

남원시 동충둥 용성초등학교 교단으로 되어 있는 석물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계단 맞은편 교정에 있는 석물들은 그 모양만 보아도, 옛 용성관의 위용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앙에 있는 석물은 크기가 엄청나다. 사각형인 이 석물은 한편이 2m가 넘을 듯하다. 그런 사각형의 돌에 한쪽으로 치우쳐 둥그런 구멍이 있다. 아마 무엇인가 기둥을 새웠던 자리인 듯하다.



그 외에도 잘 다듬은 석주하며 주춧돌이 있다. 이런 석물들의 모양으로 볼 때, 용성관의 화려함이 상상이 간다. 지금은 석물 몇 점만 남기고 있는 용성관. 복원을 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석물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그래서 슬픈 역사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는 그래서 인간과 같이 희로애락을 반복되는가 보다.


12월 11일 답사 첫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원을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실상사로 가다가 보면 일성콘도 입구 못 미쳐, 냇가 옆에 정자가 서 있다. ‘퇴수정(退修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25에 소재한 퇴수정의 앞으로는 만수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인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라는 뜻으로, ‘퇴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모습 그대로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다.


1870년 박치기가 심신 단련을 위헤 세웠다는 퇴수정.
 
사각형 주추를 놓은 정자

퇴수정은 만난 처음부터 마음에 든 정자이기도 하다. 정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에는 ‘개인소유의 땅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러니 어찌하랴, 길을 돌아 냇가로 내려가는 수밖에. 앞으로는 암석을 타고 넘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12월 초겨울에도 이렇게 운치가 있는 곳이라면, 한 여름 이곳을 찾았다면 아마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만 같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한편으로 정자로 오르는 계단도, 장대석 돌로 놓은 것도 특이하다. 정자 가까이 가서보니 주춧돌이 모두 사각형이다. 이런 것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서 지은 정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대석 돌로 계단을 놓고, 네모난 주추를 사용했다.

돌계단을 밟고 정자에 오르니, 측면과 뒤편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둘러있고, 만수천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맑기만 하다. 정자는 누마루를 깔고 중앙 뒤편으로 판자로 두른 방을 한 칸 마련하였다. 원래 문이 없었는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자 앞을 가로지른 노송의 가지는 금방이라도 냇물로 들어설 것만 같다.


정자 앞을 흐르는 만수천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수많은 편액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정자에는 여기저기 벽면마다 수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어느 정자를 가보아도 이렇게 많은 편액이 걸린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퇴수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 12월의 초겨울. 글이라도 좀 쓸 줄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두 어자 적고 가지 않았을까?

정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찬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지만, 그 바람이 대수랴. 이렇게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는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저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내어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마루를 깔고 뒤편에 판자방을 들였다. 수많은 편액들이 벽에 걸려있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적시고 싶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지만 내년 꽃피는 시절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가는 발길을 붙잡는 여울진 곳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유난히 높게만 들린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의 소리같이.


억새풀로 지붕을 올린 집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정말로 귀가 솔깃해졌다. 어떻게 억새풀로 지붕을 이었을까? 그런 집이 있다니 궁금해진다. 남원 선원사의 최인술 봉사단장과 함께 억새로 지붕을 인 집을 찾아 나섰다.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5호인 덕치리 초가는 바로 짚이 아닌 억새로 지붕을 이은 집이다.

가을이 되면 하얗게 술을 나부끼며 멋을 자랑하는 억새. 그 풀을 베다가 지붕을 이었단다. 1895년에 박창규가 처음으로 이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뒤 6,25 한국전쟁 때 소실이 되어, 1951년이 다시 지었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구석집’이라고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헛간채 등으로 지어졌다.



억새풀로 지붕을 인 남원 덕치리 초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억새풀로 지붕은 올린 초가

구석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사랑채는 한창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다. 9월부터 시작을 했다고 한다. 지붕을 보니 정말로 억새풀이다. 이 집 말고도 이 마을에는 억새풀로 지붕을 올린 집이 또 있다. 그러나 그 집은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측간이 있고, 안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서 있다.

원래 논이었다는 구석집. 이 터가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모두 4칸이다. 부엌과 방이 연이어 있다.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안주인이 사람은 찍지 말라고 당부를 하신다.

“안채에는 방이 몇 개인가요?”
“방이 둘 뿐예요.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사랑채는 언제부터 공사를 하고 있죠?”
“올 9월부터 하고 있어요.”
“억새로 지붕을 올렸는데 매년 갈아 올리나요?”
“지금 지붕을 올린지가 7년 되었어요. 10년에 한번 갈아요.”

그러고 보니 억새에는 이끼가 가득 끼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 구석집은 일반 초가와는 달리 지붕의 경사가 급하다. 아무래도 빗물이 빨리 흘러 떨어지게 만든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지붕을 이을 때는 억새를 단으로 묶어 올린다는 것이다.


덕치리 초가 안채와 부엌 문에 적힌 영화촬영 날짜
 
영화촬영도 몇 번 했다는 억새집

안채를 돌아보다가 보니 부엌문에 글이 쓰여 있다. ‘서기 1991년 1월 달 영화촬영하고 정지문 선사’ ‘ 1996년 음력 8월 24일 선진영화 촬영하고 금 30만원 받음’이란 글이다.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적어 놓으신 것이라고 한다. 선진영화라는 것은 아마 드라마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한창 공사를 하고 있는 사랑채는 그동안 보아왔던 집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한 칸은 사랑으로 하고. 그 옆이 부엌이다. 네 칸인 사랑채는 부엌 옆에 마구간을 두고, 안채 쪽에 광채를 두고 있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부산하다. 비가 오는 날 방문을 해서인가 마침 공사를 하지 않고 있어 사진을 찍기가 좋았다. 그도 다행이란 생각이다.



한창 공사중인 덕치리 초가의 사랑채와 여물통(가운데) 그리고 동학란 때 사용한 목창

구석집에는 동학란 때 사용한 창이 있다.

한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헛간을 열고 들어가신다. 무엇이라도 있을 것 같아 따라 들어가 보았다. 지붕을 올려다보니 이상한 것이 보인다. 마치 소품으로 만든 창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적힌 글이 보인다. ‘갑오년 동학날리’라고 적혀있다. 그 창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저거요 저희 윗대 할아버님이 동학란 때 직접 들고 농민혁명 때 참가하신 창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몇 번 찾아왔어도 처음으로 물어 보시네요”라고 한다.

정말로 고택 답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본 것들이 너무 많은 집이다.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동학란 때 직접 사용했다는 창도 그렇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만날 때마다 신이난다. 아마도 그런 재미로 인해 답사를 계속하는 것이겠지만. 비를 맞으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상인가보다. 사랑채가 완성이 된 후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집이다.


용인시 처인면 양지면 주북리 825에는, 경기도 문화재지료 제49호로 지정이 된 고인돌 한기가 소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을 찾아 몇 번을 주북리를 돌아다녔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는 했다. 그 이유는 이 고인돌이 집안에 있기 때문이다. 서너 차례를 답사 끝에 겨우 찾아 들어간 곳. 지석묘 앞에는 울타리 안인데도 몇 기의 무덤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별장집’이라고 부른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전역에 3만 기 정도가 남아있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로, 그 종류는 세 가지로 구분을 하고 있다. 고임돌을 지상에 세우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무덤의 방은 땅 속에 있으면서 받침돌에 덮개석을 올려놓는 바둑판식이 있다. 또 한 가지는 맨 땅에 덮개석이 놓인 개석식이다.


탁자식인 주북리 고인돌

주북리에 있는 고인돌을 보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놓인 탁자에 몇 사람이 들러 앉아 있다. 고인돌을 좀 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 저 안쪽에 있다고 알려준다. 입구에 묘가 있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니, 꽤 큼직한 고인돌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다.

주북리 고인돌은 양편에 고임돌과 한편을 막음돌이 땅에 절반 쯤 묻혀있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석을 올려놓았다. 탁자식인 이 고인돌은 화강암 질 편마암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덮개석으로 쓰였을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곳이 예전에는 많은 고인돌이 있었던 자리인 듯하다.


주북리 고인돌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이 되어있다

주북천 주변에 놓인 고인돌,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

이곳은 주북천이 가깝다. 그리고 이렇게 고인돌이 있었다는 것은, 이 주변에 물이 있어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북리 고인돌은 길이가 2,8m에 너비는 2,5m 정도이다. 두께는 45cm 정도가 된다. 돌에는 성혈 등은 보이지 않으며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1m 정도가 된다.

이 주북리 고인돌의 형태는 고임돌은 낮고, 덮개석이 크고 두터워 웅장한 느낌이 든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을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부족 중 그래도 상당한 위치에 있던 사람의 지석묘일 것으로 추정이 된다.



고임돌 위에 덮개석을 놓은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는 묘가 보인다.

탁자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이루고 있는 남부지역의 것에 비해서는 단 한 기 뿐이지만, 그래도 이 주변의 옛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소중한 문화재라는 생각이다. 주북리는 낮은 구릉지다. 양지에서 옛 도로를 따라 용인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지나, 주북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하기에 이렇게 넓고 낮은 구릉이라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치고 돌아서야만 했던 주북리 고인돌. 비록 한 기 밖에 남지 않은 고인돌이지만, 그 고인돌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마을이 있었다고 치면, 이 인근 어딘가에는 또 다른 고인돌이 있지나 않았을까? 그리고 그 마을은 언제 쯤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생활은 어떤 형태였을까? 한참이나 고인돌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질문과 답을 스스로가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반복할지는 모르지만.

주변에는 덮개석으로 사용 되었을 돌들이 있어, 이곳에 몇 기의 고인돌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주변 주북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커다란 노송 숲이 있다.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는 낮은 담이 둘러쳐진 고풍스런 정자 하나. 고려 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운 교수정이다. 처음 이곳에 정자를 세운지가 벌써 6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조승숙(1357~1427)은 고려 말 우왕 7년인 13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이곳에 교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승숙 선생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 교수정. 그곳에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소나무 숲속에 선 교수정

교수정은 주변이 소나무 숲이다. 지나는 길에도 눈이 띠는 것은, 고목으로 변한 소나무들 때문이다. 낮은 담장을 둘러친 교수정은 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이야 도로변이지만, 아마 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주변이 숲이었을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뒤편에 있는 작은 능선을 생각한다면, 이 정자의 처음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있는 산 밑, 냇가 곁에 이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러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선생은 일어서 미소를 띠우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을 것이다.





성종이 내린 사제문

교수정을 바라보면 좌측 뒤편에 방을 드렸다. 정자에 방을 놓을 때는 중앙에 놓거나, 아니면 뒤편 중앙에 놓는다. 그러나 교수정의 방은 뒤편 한 편으로 몰아놓았다. 정면으로 두 칸, 측면에 한 칸 방을 놓고 이곳에서 기거라도 했던 것일까? 방 앞에서 마을을 바라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여기저기 걸린 편액에서 이 정자의 모습을 본다. 밖으로 나와 냇가에 보니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에는 음각을 하고 붉게 칠을 한 글이 적혀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뽑은 글귀라는 것이다.



비는 정자의 담 밖, 냇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비를 보려고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래도 겨우 비문을 찍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 비 앞에서 보는 정자의 운치가 남다르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일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또 다른 정자의 멋. 그래서 세상은 ‘새옹지마’리고 한 것일까?

정자를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참으로 작지만 풍취가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잘 정리가 된 주변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일각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선생의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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