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에서 1번 국도로 따라 조치원을 향하다가 보면,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정자가 보인다. 연기군 남면 나성리 101번지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264호인 ‘독락정(獨樂亭)’이 자리한다. 독락정이란 말 그대로 혼자 낙낙하는 정자란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이 정자는 고려 말의 무신인 전서 벼슬을 지낸 임난수 장군을 위한 정자이다. 임난수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정벌을 했던 무장이다. 장군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금강 월봉 아래서 16년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섬기던 임금에 대한 충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금강가에 외롭게 서 있는 독락정

장군의 아들 임목이 지은 독락정

독락정은 조선조 세종 19년인 1437년 임난수 장군의 아들인 임목이 부친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 후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주변에는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다.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독락정. 지금은 길 위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이 정자는, 임난수 장군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정자는 크지가 않다. 처음부터 이런 형태로 지어졌는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에서 그 역사를 짐작할 수가 있다. 낮은 담으로 둘러친 정자는 금강 쪽은 담을 낮게 해 마루 위에서 강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자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팔각의 장주추를 써서 기둥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형태의 건축물이라 그런지 작아도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정자는 낮은 담으로 둘러쌓다(위) 주추는 팔각의 장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가운데)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인 독락정은 마루 중앙 뒤편으로 방을 놓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방을 드릴 때는 온돌을 놓지만, 독락정은 그대로 마루로 연결하고 사방을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취흥에 젖고는 했을 것이다. 정자로 오르니 벽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벼슬을 떠난 임난수 장군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담장 밖에서 사진을 찍다가 성이 차지 않아 월담이라도 해야 하나를 고민한다. 정자 뒤에 난 일각문을 보니 잠을 통이 그냥 걸려있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본다. 저만큼 무슨 공사라도 하는 것인지, 물이 탁하게 흐른다. 예전 정자를 짓기 전에 이곳에 올랐을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자에는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망해버린 고려에 대한 아쉬움이 남달랐을 것이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면서 스스로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와서 여생을 끝낸 임난수 장군. 그 자손들에게도 나라를 위한 충심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독락정은 가을의 햇볕만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정자에 오를까? 난 늘 그 정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정자를 세운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백사람이 모두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 어찌 그 뜻을 감당할 것인가? 오늘 독락정에 올라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보지만, 무심히 흐르는 저 금강처럼 나도 무심히 떠나는가보다.


가운데 뒤편으로 마루방을 들이고(위)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들이 서 있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에 소재한 신헌 고택.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신헌(1810∼1884)은 조선조 후기의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다. 이 집은 신헌이 살던 집으로 과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있었으나, 그 집을 허물어 길상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헌의 자는 국빈, 호는 위당이며 평산인이다. 순조 28년인 182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 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 무반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충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들기도 했다.

천사의 나팔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진천 신헌고택

병자수호조약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신헌

고종 12년인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 중문채 만이 남아 있다. 신헌고택을 찾아갔다.

마침 문이 걸려있지 않아 집을 둘러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문은 중앙에 문을 두고 양 옆으로는 방과 헛간이 있다. 방 밖으로는 굴뚝이 서 있어, 이 방에서 안채의 일을 돌보는 여인들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문은 중문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없어지고, 중문이 대문이 되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보호하였다.

안채만 남아도 단아한 집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집이다.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 집에 이렇게 지붕을 들인 것은 흔치가 않다. 안채는 꺾이는 부분에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신헌고택을 들어가니, ‘천사의 나팔’이라고 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집안 정원 가득 꽃이 심겨져 있어, 현재 이 집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 꽃은 해가 지기시작하면 짙은 향을 풍긴다. 이 정도 꽃이면 집안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사랑과 안채를 통하던 일각문과(위) 안채의 한편. 천사의 나팔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안채에서 예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중문 말고도, 중문채 끝에 일각문이 있어 그곳으로 통행을 했다. 현재 일각문 밖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남아있는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상사를 짓기 위해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부수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앞에 길게 마련한 광채는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으로, 곳간, 헛간, 광 등을 마련했다. 담 밖에서 보는 광채는 10여 칸이나 되는 -자형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광채의 크기로 보아도, 이집을 지었을 때는 정말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열칸 정도로 지어 곡식 등을 보관하였다.

밖으로 나와 안채의 뒤편을 바라다본다. 뒤편에는 낮은 굴뚝들이 연이어 나 있다. 뒤편의 길가로 난 담장이 높게 되어있고, 그 밑으로 차이를 두어 안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 뒤편이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안채만 남았어도 단아한 형태로 지어진 신헌고택. 이 집의 밤은 온통 꽃향기로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늦은 시간 막걸리 한통 사들고 다시 이 집을 찾아,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천사의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낮은 굴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십리는 커녕 오리도 못가서 마음이 아픈 정자가 있다.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재56호인 ‘오리정(五里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오리정은 목조 2층 건물로 1953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오리정은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이도령과 춘향이가 사랑을 나누다가, 이곳에서 이별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춘향전 속에는 서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게 되자, 이곳까지 쫒아 온 춘향이가 애끓는 이별을 서러워하면서 이도령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도로변에 선 오리정은 늘 한산해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1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우측 길가에 서 있다. 좌측으로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도로변에 2층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에는 수련이 피어잇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가끔은 지나는 사람들이 찾아 들어오지만, 늘 한산한 모습이다.

춘향가 중에서 오리정 이별대목을 보면 이곳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얼마나 마음아픈 이별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명창 김소희 선생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대목이다.




(아니리/ 말로 하는 대목) 방자 충충 들어오더니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러시오 내 행차는 벌써 오리정(五里亭)을 지나시고 사또께서 도련님 찾느라고 동헌이 발칵 뒤집혔소. 어서 갑시다." 도련님이 하릴없이 방자 따라 가신 후 춘향이 허망하야 "향단아 술상 하나 차리어라. 도련님 가시는디 오리정에 나가 술이나 한 잔 드려보자."
(진양조/ 제일 늦은 소리)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 숲을 울며불며 나가는디, 치맛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시치면서 농림 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 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 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고!"
(자진모리 / 빠른소리) 내행차 나오난디 쌍교를 거루거니 독교를 어루거니, 쌍교 독교 나온다. 마두병방 좌우나졸 쌍교를 옹위하야 부운같이 나오난디, 그 뒤를 바라보니 그 때여 이 도령 비룡같은 노새등 뚜렷이 올라 앉어 제상 만난 사람 모냥으로 훌쩍훌쩍 울고 나오난디, 농림 숲을 당도허니 춘향의 울음소리가 귀에 언뜻 들리거날 "이 얘, 방자야. 이울음이 분명 춘향의 울음이로구나. 잠깐 가보고 오너라." 방자 충충 다녀오더니, "어따,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아 이놈아. 누가 그렇게 운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울겄소? 춘향이가 나와 우는디 사람의 자식은 못 보겠습디다."
(중모리/ 조금 늦은 소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어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처연히 집에 앉아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오 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에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너라."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몇 년째 없어

이런 슬픈 이별의 장소인 오리정이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오리정 대목을 생각하면서 지은 정자 오리정. 이곳은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가는 이몽룡을 따라 쫒아오다가 신발이 벗어진 곳이라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곳에서 두 다리를 뻗치고 울음을 울었을까? 도로변에 나 있는 오리정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늘 볼 수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목조 2층이다. 정자에 오르면 찻길 반대편으로는 펼쳐진 논이 있다. 이층으로 오르려는데 계단이 없다. 그냥 이층만 꾸며 놓은 것일까? 이층을 오르던 계단을 놓았던 자리는 있는데, 정작 계단이 없다. 이층 바닥에 난 계단을 놓았던 곳에는 칠이 되어있지 않아, 이곳에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계단이 사라진 것일까?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별을 서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이곳. 오리정은 그렇게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아픈 이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어져, 진한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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