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바위와 각종 꽃나무들이 함께하는 정자 광제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0호인 광제정은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에 자리하고 있다. 광제정은 조선 초기에 양돈(1461∼1512)이 후천리 광제마을에 처음 지었으며, 지금 건물은 양돈선생의 후손 양성모가 187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광제는 양돈선생의 호다. 양돈선생은 서울에서 생원, 진사를 지내다가 무오사화를 피해 아산방(현재, 봉현리)에서 은거하였는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성종 9년인 1478년에 소과에 합격한 양돈선생은 남효온 등이 천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벼슬도 마다한 광제 양돈선생

 

양돈선생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2년인 1788년에 아계사(阿溪祠)를 지어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은 양돈선생의 덕목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정자 안에 걸린 게판에는 김인후, 기정진 등이 남긴 글이 걸려 있다.

 

광제정을 찾은 것은 요즈음 세태에 젖어든 마음을 씻기 위해서다. 이제 대선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새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신의 허물까지 억지로 덮어가면서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보일까 궁금하다.

 

 

양돈선생은 그렇게 주변사람들이 그 문장과 덕행이 아까워 벼슬길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사양을 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더욱 이곳이 ‘세심리’라니.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어, 그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과 권세에 초연하고 싶어서였나?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덕목

 

사람들은 누구나 다 출세를 지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적당히 배를 불릴 수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주변 것들을 먹어치운다. 참 그 배는 많이도 들어가는가 보다. 그러나 오늘 광제정의 주인 양돈선생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자리를 준다고 하는데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요즘 사람들은 이런 선생을 바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이 변했으니 그것과는 관계가 없노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돈선생은 그러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일찍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한창 열을 올리며 대선후보 주변에서 얼굴굳히기에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양동선생의 마음만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라북도 지역 정자의 특징 그대로 지녀

 

광제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크지 않은 정자는 바위 곁에 올려놓았다. 정자의 가운데 방을 마련하고, 사방을 마루로 놓았다. 천정은 중앙부분이 아래로 돌출되었는데, 양편에서 달려드는 용머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 희한한 것은 그 용의 몸 등에 붙어있는 거북이다. 왜 거북이를 이곳에 두었을까?

 

 

세상사 싫어지면 그 거북이 등에 올라타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벗 삼아 더 오래 살고 싶어서였을까? 광제정 곁을 흐르는 냇물은 맑기만 한데, 냇가에 커다란 노거수 위에 한 마리 이름 모를 새가 퍼덕이며 날아간다. 아마 곧 닥칠 눈보라를 피해 어디 깊은 산속으로라도 들어가려는 것인가 보다.

경체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경체정은 뒤편에 낮은 산을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한다. 그저 바라다보면 단아한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정자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정자다.

 

전국에 있는 많은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거개의 정자들이 문을 닫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정자를 만나면 그저 담 밖으로만 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설명이야 안내판이 있으니 대략적인 것은 알 수가 있다고 해도, 그 속을 모르니 답답할 때도 있다.



 

사면에 다른 글씨로 현판을 달아

 

  
경체정에는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중에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확인을 할 수가 없는 정자는 늘 안타까움만 더한다

경제청은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조 철종 때인 1854년에 지어진 경채정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경체정이라는 현판이 4개나 달려있으니 어느 글이 추사 것인지 밖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경체정은 강윤(예조정랑, 승지),강완, 강한 세 형제의 덕행과 학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이 지었다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세웠으며 앞으로는 누마루를 깔고 뒤로는 방을 드렸다.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으니 외형만 보고 정자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주변에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마루 밑에 있는 외바퀴 손수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주인의 마음을 닮아

 

담 밖에서 경체정을 둘러보니 정자의 누마루 부분은 기둥을 세워 받쳤고, 방을 드린 뒤편은 흙으로 쌓았다. 그 한편에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을 놓은 듯 하다. 기둥이 선 뒤편에는 무엇에 사용을 한 것인지 외바퀴 수레가 놓여있다. 정자 주위를 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 마감을 한 담장, 앞쪽에 낸 작은 일각문, 그리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경체정. 주변과 잘 어우러지며 서 있는 정자는, 그저 선비 같은 모습으로 말이 없다.

 

정자를 볼 때마다 그 정자를 닮아가는 마음이 없다면, 정자가 그저 단순한 전각 하나로만 보일 텐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만난 경체정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을 것 같다.

부원군에서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그 뒤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영욕의 세월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딸이 왕후가 되어 부원군이라는 칭호를 듣던 김제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자는 공언이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뽑히자,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었다.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헛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역사가 사람을 만든 주인공을 만날 수가 있는 곳이 있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2차선 도로 길가 안쪽에 있는 신도비는, 그러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을 말하고 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 김제남

 

원주 법흥사지로 들어가는 길목 오른편에는 높이 35m에 둘레 6m, 수령 500년인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쓸쓸히 서 있는 신도비 1기가 자리를 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된 김제남의 신도비다.

 

 

신도비란 묘역에 세우는 일종의 비석이다. 그러나 아무나 신도비를 세울 수는 없다.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야만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대개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이 신도비는 그 품계가 아니라고 해도, 저명한 공신이나 유학자의 경우에는 왕명에 의해서 세우기도 했다.

 

역사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이라 했던가. 1602년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고, 광해군 5년인 1613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1616년에는 인목왕후의 폐모론이 일자,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 죽은 후에 큰 죄가 드러났을 때 처하는 극형으로, 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시신을 참수하는 것으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형벌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만세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1623년, 인조반정 으로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으며 영의정으로 추증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리를 뒤로 돌린 귀두, 세상이 보기 싫었을까?

 

김제남의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비를 바라보듯 뒤를 향하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새겨 있다. 많은 신도비를 보았으나, 거북의 머리가 비문를 바라보듯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는 것은 보질 못했다.

 

그런데 왜 이 신도비의 거북이는 머리를 돌리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 우리 후대들에게 주는 교훈인지 모르겠다. 즉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지 말고, 지나온 어려움의 발자취를 돌아보라는 뜻인가 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영화를 고개를 돌리고,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닐까?

 

이 신도비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신도비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 너무나도 이 시대에 걸 맞는 듯도 하다. 2차선 도로 길 건너에 있는 사당인 의민사는 1923년 세워졌으나,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소실이 되었다. 현재의 사우는 196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제남의 신도비가 주는 역사의 교훈, 우리는 그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월읍을 가로 질러 흐르는 동강. 그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간 후, 그것마저 부족해 수하들을 시켜 단종을 죽음으로 몬 수양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는 정자가 있다. 단종이 죽고 난 뒤, 낙화암에서 동강 푸른 물로 몸을 날려 단종을 따른 시녀와 종인들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앞에 자리 잡은 정자가 동강 푸른물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이다. 금강정은 세종 10년인 1428년 김복항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강정을 찾은 날은 벌써 꽤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금강정의 슬픈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가 세조 3년인 1457년이었으니, 시녀와 종인들이 이곳에 와 동강 푸른물에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금강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시녀와 종인들은 단종이 머물던 동헌을 떠나, 이곳으로 와 이 금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은 대답이 없다.  

 

금강정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면 네 칸의 팔작 정자

 

금강정은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정자를 고쳐짓고 금강정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숙종 10년인 1684년에 쓴 금강정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정은 처음으로 이 자리에 짓고 나서 벌써 6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머름형태의 평난간을 둘러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금강정의 처마를 올려다보면 조금은 색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 장식을 용이나 닭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강정은 잉어를 조각한 듯하다. 아마 밑을 흐르는 동강 맑은 물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인가 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잉어를 조각해 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금강정, 세월은 슬픔도 잊어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금강정. 그동안 수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정자 뒤편에 있는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하는 민충사와 함께 동강을 굽어보고 있어, 역사를 알고 나니 슬픔을 간직한 듯 보인다.

 

금강정 앞으로는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조망대를 설치하였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멀리 흘러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르는 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시던 임금이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본 시녀와 종인들도 이렇게 동강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을까? 그 때 그들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단종이 죽은 후 이곳에서 동강으로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이 마음을 느껴보다.

 

 

금강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난간에는 여기저기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굳은 맹서라도 한 것일까? 역사의 슬픈 흔적은 그 낙서로 인해 다 지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을 다 잊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저기 쓰인 낙서를 보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낙서.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오늘도 금강정 앞으로 흐르는 동강은 그렇게 말이 없다. 600년 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자에 올라 동강을 굽어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찬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이 넋이라도 위로를 할 생각으로.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슬픔을 안은 역사는 그리 계속되는 것인지. 

 

조망대 난간에 쓰인 낙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확인한 것일까?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현재 남아있는 가옥의 안채는 조선 정조 7년인 178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사랑채는 그보다 늦은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정광보가 마을에 들어온 시기인 1400년대 후반으로 본다.

 

8월 8일 돌아본 동래정씨 종택. 현재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으로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 순으로 되어 있어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사랑채와 작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온기가 느껴지는 집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집이 생기가 도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대개 사람이 실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집이 좋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하다. 군포 동래정씨 종택은 집안을 여기저기 손을 보았지만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바깥담장은 장 정리가 되어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에 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 실한 연꽃만 보아도 이 종택은 간수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용도를 변경해, 중앙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사무실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으로 대문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후에 5칸을 더 지어 안채의 폐쇄성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은 보아지 않고 바로 사랑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과 작은사랑을 둔 종택

 

안채 앞으로 지은 사랑은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분을 하였다.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큰 사랑은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의 순으로 집을 구성했다. 서쪽 맨 끝에는 방의 벽면을 막고 그 앞으로 누정을 한 칸 앞으로 돌출시켜 올렸다. 누정은 삼면이 터지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장초석 위에 네모난 기둥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다.

 

 

 

큰 사랑채의 기단을 장대석으로 마감을 한 것에 비해, 작은 사랑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2층으로 기단을 쌓았다. 작은 사랑은 모두 세 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안채에서 바로 사랑으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찍고 열려있는 문으로 안채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새끼라도 해할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집을 돌아 중문으로 돌아가니 문이 닫혀있다. 귀농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한잔 찍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ㄱ 자형의 안채에서 느끼는 종택의 위엄

 

안채는 ㄴ 자 형의 중문을 마주하고 ㄱ자로 꺾어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채를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는 두 칸의 부엌을 조성한 듯한데, 현재는 그곳을 방으로 꾸민 듯하다. 댓돌 앞에 신이 놓여있다. 꺾인 부분에 대청을 놓고 이어 안방을 드렸다. 안방의 끝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도 유리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인이 없이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안채를 보면서 종택의 위엄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을 지은 정광보는 파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의 큰아들로, 맞은편 산 중턱에 조성된 정난종의 묘를 조성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독특한 사랑채의 구성과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자적인 집으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의 살림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다. 고택을 돌아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모든 고택에 사람들이 온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래등 같은 집에 온기가 없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