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고성군 현내면은 예전에 열산현의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현의 터는 화진포에 잠겨있지만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는 10여 개의 선사시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내면 송현리와 죽정리 등에서는 돌토끼와 민무늬토기 같은 청동기 유물이 발견이 되기도 했다.

 

이 현내면은 지역적으로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현내면은 명파리와 죽정리 등에서 신라고분 6기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현내면에는 고성산이라는 산이 산학리에 솟아있어,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적 요충지인 산학리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는 원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옛 운근리를 나누어 산학리(山鶴里)와 열산리(烈山里)로 구분했다. 고려 때는 열산현(烈山縣)의 소재지가 열산리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관제개혁으로 폐현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했으며, 현내면으로 개칭된 후 1915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두 부락의 '()'자와 '()'자를 따서 산학리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까지는 현내면 소재지이기도 하였던 산학리는, 마을 뒤편에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약 12m정도의 성지(城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쑥고개의 봉화봉에서 횃불로 신호하면, 이곳에서 간성 고성산으로 연락하였다고 한다. 이 성터를 산학리성터 혹은 고성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산학리의 지명을 보면 죽정리, 산학리 경계지점인 길모퉁이에 조선시대에 현령을 지낸 권모의 공덕비라고 전하는 비가 고송과 함께 남아 있어, 외솔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산학리에서 고성산을 끼고 화진포로 넘어가는 낮은 구릉에는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보이는데, 주둔군부대의 방호시설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옛 토성에 오르다.

 

23, 고성군 현내면의 2차 답사를 나섰다. 일행이 많아 두 대의 차량을 이용해 답사 길에 나섰다. 산학리에서 빠른 길로 화진포로 낮은 등성이를 넘다가 보니, 우측에 노송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소나무의 굵기로 보아 수령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모여 있어 그곳을 올라보았다.

 

 

석비 1기가 서 있는데, 그곳에 고성 산학리산성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앞면에는 산성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이곳은 옛날 이곳을 지키려는 선인들의 호국이 얼이 깃든 산성의 옛 터다. 처음 이곳에 성을 쌓은 시대와 성에 대한 내력은 전하는바 없어 자세하지 않으니, 고려시대 빈번하던 동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야 쌓은 산성이라 한다.

 

1033(고려 덕종 2) 이 고장에 침입한 왜구의 무리와 1217(고려 고종4)에 침입한 거란 무리를 이 산성에서 막아 싸운 곳이라 전한다. 세월이 가고 옛 성은 허물어졌으나, 향토를 수호하려는 이 고장 선민들의 얼이 깃든 호국유적으로 이를 보호하고자 표석을 세운다.

1984, 9 고성군수라고 적고 있다.

 

 

토성으로 쌓은 성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10m에 불과하다. 토성은 4~5m 높이로 경사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는 1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서 있는데 둘레가 족히 2m는 넘을 듯하다. 아마 이런 굵기를 본다면 이미 수령에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는 군부대의 방호시설이 있으며, 서쪽 끝부분은 문지나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축산성을 고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성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지나다가 들린 옛 성터. 2월의 바람이 불어온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표석이 없었다고 하면, 이곳이 성터인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옛 이야기라도 한 자락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인적 없는 옛 성터가 더욱 쓸쓸하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가면 견우직녀가 된 석불입상이 서 있다. 200m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일 년에 단 한 번 12월 해일 자시에 만난다고 한다. 두 석불은 일 년간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나면 제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석불이라기보다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장승이나, 묘 앞에 서 있는 석인과도 같은 모습이다. 다만 이 석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머리에 4각형의 높은 관과 보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보물 제4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비가 부슬거리는 날 길을 나섰다. 익산 왕궁리 터와 1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왕궁리 석탑도 볼 겸 겸사겸사 길을 나선 것이다.

 

빗길에 만난 고도리 석불입상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두 기의 석불입상.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찡하게 만든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석불입상이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멀리 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마을에서는 예전에 이곳에 커다란 수문이 있어, 수문의 허를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거리에 수문의 허를 막았다고 보기에는 맞지가 않다. 그런 커다란 수문이 있었다면 아직도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수문의 허를 보완하기 위해 석불입상을 세웠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만일 그렇다고 하며 이 석불입상은 불상이기보다는 석장승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아마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 두기의 불상이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두기의 석불입상은 견우직녀처럼 일년에 단 한 번 12월 해일 자시에 만난다고 전해진다.
  
사다리꼴의 화강암에 지극히 절제된 수법으로 표현을 하였다. 눈은 가늘게 떴으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어 웃는 상이다.

 

두 석불입상이 부부라는데

 

높이가 4,24m에 화강암 세로 사다리꼴로 조성이 된 이 석불입상은 마을 안쪽에 있는 서 있는 불상이 여성이고, 왕궁리 쪽으로 서 있는 것이 남성이라고 한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조각을 한 수법이 동일하다. 사다리꼴의 몸체에 팔이 따로 없으며, 마주한 두 손을 깍지 낀 모양만 주변을 파서 돋을새김한 것처럼 조각을 하였다. 웃음을 띤 얼굴은 두 눈이 가늘게 표현을 하였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서는 석불이라기보다는 마을의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석장승에 가깝게 표현이 되었다. 다만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석불의 조각기법이 표현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 석불입상과 마주하며 마을 안쪽에 서 있다.

 

두기의 마주하고 있는 석불입상.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흡사 두 석불입상의 마주하고도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듯하다. 올 12월 해일에는 동고도리에 가서 두 석불입상의 해후를 보아야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면서 돌아선다.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이별이라는 아픔을 수도없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불로 추정되는 석불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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