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란 예전 절이 있던 곳이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절터가 있다. 지금은 비록 절은 사라졌지만,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이다. 그 많은 절터 중에서 가장 잊지못하는 곳이 바로 물걸리사지이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 이 절터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이 물걸리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옛 기록을 알 수 없는 물걸리사지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파편 4, 철쇄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 대좌(보물 제543),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 삼층석탑(보물 제545)이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절터에서 발굴이 된 많은 유물들은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 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옛 절은 어디로 가고,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석조물들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는데 벌써 찬바람이 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인해 날씨가 더 쌀쌀해질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평택 만기사를 찾았다. 이곳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이 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기사(萬奇寺)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번지에 소재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만기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벌써 만기사를 다녀온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만기사는 많은 불사를 이뤄 가람 안에 전각이 늘어났다. 전형적인 산지가람 형태인 만기사. 주차장에서 걸어올라 천왕문을 지난다.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사찰

 

만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낮은 산비탈을 깎아 3단으로 전각을 배치한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만기사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입증할 만한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된 철불인 철조여래좌상 뿐이다.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헌종 9년인 1843년에 기록한 <진위현읍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는 만기사에 대해서

만기사는 무봉산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데, 맛이 달고 차다. 옛날 세조가 이 절 앞에 수레를 멈추고 우물에 가 물을 마시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이나 감로천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임금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어, 만기사가 조선조에도 법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만기사에 기록은 기내사원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기내사원지는 진위현읍지의 기록을 예를 들어 만기사를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보국사 창건문 등에도 만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기사는 큰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조까지도 사세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72년부터 사격을 갖추기 시작해

 

현재 만기사의 당우로는 보물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무봉서원, 명부전, 종각, 감로당, 심우당, 원통전, 요사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기사는, 주지인 김혜송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 삼성각을 지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서요사를 신축하였으나, 1979년 동요가사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고,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만기사의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이 유일하다.

 

길상좌를 하고 있는 단아한 철조여래좌상

 

높이가 1.43m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은 현재는 금으로 도금하였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라는 길상좌를 하고 앉았는데,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이 자세는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인 항마촉지인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평택 만기사. 잠시 멈추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쌀쌀해질 텐데, 답사의 속도를 높여야만 할 것 같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기도 좋아야하지만, 적지 않게 들어가는 답사 경비로 인해 늘 주머니가 가벼워 지기 때문이다. 지난 6일 돌아본 보령시의 문화제를 답사할 때도, 비는 간간히 뿌렸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라도 더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남포면 읍내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남포관아문을 만났을 때는 신이 난다. 이렇게 읍성과 함께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 등을 만날 수가 있고, 거기다가 충남 기념물 제10호인 읍성까지 돌아보았으니.

 

 

한 곳에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이다. 앞에는 중층 누각인 진서루가 서 있고, 그 뒤편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헌 마당을 지나서 외동헌을 만나게 된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무리를 해서 찾아간 곳이다. 진서루 옆 은행나무에서 많은 은행들이 떨어져, 은행나무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날이 궂은 날에는 냄새가 더욱 심하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사면에 난간을 세웠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누각에서 남포현감은 주변 경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7,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 칸은 한단 올려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문은 출입문 앙 옆을 살창으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정면 7,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외삼문인 누각과 옥산아문, 동헌 등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옛 동헌답게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전국의 아문이 똑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남포관아를 돌아보고 난 뒤, 읍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성은 동헌 뒤편에 성곽이 이어진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남포읍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동쪽과 서쪽, 남쪽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남포읍성은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치성을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도 보인다. 성 안에는 세 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외동헌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가을이 열리고 있는 성벽

 

기록에 의하면 읍성 안에 우물이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남포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아문과 성안에서 읍성을 돌아보고 난 뒤, 성 밖으로 향했다. 비는 멈췄지만 바람이 세차게 분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함께 조화를 이룬 남포읍성이 한 장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성을 따라 조금 걸어본다.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은 남포읍성. 한 곳에서는 마을주민인 듯한 여인이 밭에서 무엇인가를 수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편 성벽에는 늙은 호박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 읍성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언제 떠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괜한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그 답도 내 멋대로 지만 말이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소재한다. 원증국사는 사나사를 중창했던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우(13011382)를 말한다. 보우의 호는 태고이며, 시호는 원증이고, 탑의 이름은 보월승공이다.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사나사를 다녀온 지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다. 915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바람도 쏘일 겸 다녀온 사나사이다.

 

 

특이한 형태의 원증국사 석종비

 

원증국사 석종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대석인 받침돌 윗면에 비를 꽂아둘 네모난 홈을 파서 비몸을 세웠는데, 그 양 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있다.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비와 흡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결하다.

 

이 석종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 보우의 제자 달심이 세운 비로,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도움을 준 신도들의 명단을 적었다. 비는 머릿돌인 옥개석과 몸돌인 비신, 그리고 받침돌인 비좌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1.67m이며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는 여기저기 수난을 당한 흔적이 보인다. 비 몸돌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타깝다. 머릿돌 위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하면서 던졌는지, 동전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석종비의 내용만 제대로 판독을 했어도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 문화재 하나를 소중하게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암에서 입적한 원증국사의 부도탑

 

원증국사 석종비 옆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사나사원증국사탑이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태고화상 보우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원증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출가를 하였고,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원으로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받았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귀국하여 소설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이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석종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의 기록에, 고려 우왕 9년인 1383년에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잠시 틈을 내어 다녀온 사나사. 그리고 사나사에서 만난 원증국사의 부도탑과 탑비. 간결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서 원증국사의 품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즈음 잘 나가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에 소재한 보물 제611호인 태고사원증국사탑비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무자년 봄 귀국하여 미원현의 소설산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하였다. 임진년 여름 현릉께서 스님을 왕도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병신년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얼핏 보면 복잡한 탑이다라고 생각이 든다. 탑 하나에 많은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 오래 전에 장비도 부족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돌에다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하다니, 그저 놀랍다라고 할 밖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천년고찰 갑사. 그 경내에는 특이한 승탑 한기가 서 있다. 보물 제2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이 탑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놀랍다.

 

106일과 7일의 답사는 꽤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근 한 달간이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답사를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삐 돌아보는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하고 발도 아팠지만, 문화재를 만난다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힘든 답사일정도 즐거움이었다.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탑 아래 배례석에서 참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그 후 위덕왕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했다. 의상대사는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갑사는 수차례 찾아간 곳이다. 많은 문화재도 있지만, 갑사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신선이라도 될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찾아본 승탑. 언제 보아도 놀랍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악비천인상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갑사 승탑은 높직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상중하 받침돌로 나뉘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하층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고, 거의 팔각이 아닌 원에 가까운 가운데기단에는 각 귀퉁이마다 귀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는 주악비천인상을 새겨 놓았는데, 금시라도 연주소리가 울려 나올 것만 같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상층기단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의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사자 조련사가 맞아?

 

하층 기단에 조각한 사자들을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 중 한 마리의 사자 앞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이 탑에 조각한 사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예전 갑사에 들렸을 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사자들을 먹이느라 저렇게 하루 종일 사자 우리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다. 하지만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진 것이 흠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갑사 승탑. 또 다시 만날 때는 무엇이 또 보일까? 문화재를 만나면서 늘 하는 기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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