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국사’ 도대체 사리가 얼마나 나왔기에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6에 소재한 양평 용문사. 스령 12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인 ‘용문사 은행나무’로 유명한 절이다. 용문사 경내에서 동편으로 약 300m 정도를 가면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를 만날 수가 있다. 이곳을 찾은 시기가 여름철 비가 내리는 날인 듯하다.
이 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작은 물길을 건너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직 수행에만 힘을 써
정지국사 축원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충숙왕 11년인 1324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2년인 1353년 30세에 자초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 나옹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각지로 다니며 수도하다가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조선조 태조 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다비를 거행할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와 정지국사라는 별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전한다.
단아한 자태의 정지국사 탑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의 몸돌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에서 보이는 화려함이 없이 단아한 형태로 조성이 된 정지국사 탑. 아마도 생전 정지국사의 오직 구도에만 애를 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빗길에 찾아 들어간 골짜기에 그저 찾는 이 하나 없이 서 있는 탑을 보면서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요즈음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수행자인체 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지국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은 비도 소중한 보물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탑과 비가 일괄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 탑과 비.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양평 용문사에서 소로 길로 접어들어 탑을 찾아가던 길에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수렁에도 빠져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소중한 문화재를 만났다는 기쁨은 그 몇배나 행복인 것을.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그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깨어진 석탑, 이제 그만 아프고 싶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836-1에 소재한 원주시립박물관에 뒤편 도로 밑에 보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일산동오층석탑(一山洞五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2년 5월에 강원 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좌우에 석불좌상 2기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이 석불좌상은 두 기 모두 머리부분이 사라져 새로 만들어 조성하였다. 그 좌상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왜 이렇게 석불의 목을 잘라버린 것일까? 이런 경우 대개 종교적엔 이질감에서 목을 자르기도 했다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균형 비율이 뛰어나
일산동 오층석탑은 현재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체가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양우주와 탱주인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영 우주를 새겼다. 이 오층석탑은 위로 오를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단아하며 안정감이 있다.
비록 탑은 훼손이 심하기는 하지만 형태도 정돈되어 있다. 일산동 오층석탑은 몸돌의 덮개석인 옥개석은 얇은 편이다. 지붕돌인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인데, 층마다 안타깝게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오층석탑은 그 조형이 된 양식으로 보아 고려중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일산동 오층석탑을 바라보는 시각은 착잡하기만 하다.
우리문화재의 보존, 이대로 좋은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아마도 수백 번은 가슴이 찢어졌을 것 같다. 아니 수천 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풍화에 의해 훼손이 된 문화재보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이 된 문화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 보호를 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 한 마디로 개판이다. 문화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단 한 번이라도 시켜 본 것일까? 아마도 우리 교육에서는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교육이 없었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국보인 전각 외벽에 낙서하기. 보물로 지정된 전각의 외벽에 빼꼭하니 경쟁하듯 갈겨놓은 낙서. 소중한 문화재에 상처내기. 문화재가 무슨 훼손시키기 경쟁 터인 듯하다. 이렇게 망가져 가는 문화재를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문화재가 밥 먹여주나?”
흔히 듣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질문이다.
“문화재가 밥을 먹여주긴. 오히려 내 삶을 갈아먹고 있는데.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그동안 길에 뿌린 돈만 해도 아파트 한 채 값은 날아갔을 텐데. 밥을 먹여 주었겠소?”
“그러면 그 알아주지도 않는 답사는 왜 하나요?”
“우리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죠. 있는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미쳤구만 그 많은 돈 써가며 시간 낭비하며 왜 그 짓을....”
한 마디로 난 미친 사람이 된다. 사실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누가 돈 처들여가면서 이 짓을 할 것인가? 그렇게 길가에 뿌린 돈만 해도 아마 목 좋은 곳에 30평이 넘는 아파트 한 채는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만 두어야지”라고 늘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 무엇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따리 챙기고 길을 나서는 것을. 이젠 정말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만 하고, 밥도 안 먹여주는 문화재답사를....
고려 탑의 백미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
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2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322호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 오산면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석탑과는 달리 처음 본 순간부터 발길을 붙든 탑 중의 하나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곡리 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곡리 오층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각 층의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몸돌에 조성한 감실에는 누가 있었을까?
가곡리 오층석탑은 2단의 기단을 조성했다. 아래기단은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해 3단으로 쌓아올렸다. 아래기단에는 탱주와 양우주 등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윗기단에는 모서리기둥인 양우주가 새겨져 있다. 2단으로 된 기단석 위에 5층의 비몸인 몸돌을 쌓아올렸는데, 1층 몸돌에 비해 2층서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 비해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인 양 우주를 새겨 넣었으며,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 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다. 아마도 이곳에는 작은 부처의 상을 모시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몸돌 밑에 받침돌을 조성
오층석탑의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의 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백제계 탑의 특징으로, 이 가곡리 오층석탑이 백제계 석탑을 모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붕돌의 처마 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 모습이 비상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특징은 층마다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렇게 층마다 몸돌받침을 조성해 놓아, 탑의 높이가 한층 더 높아졌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이 석탑은 맨 위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보물 제506호)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백제탑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멋을 보여주고 있는 가곡리 오층석탑. 해는 벌써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그곳을 떠나기가 아쉽다. 조금만 더 살펴보았으면 하는 것이, 답사를 하면서 매번 이렇게 조급한 걸음에서 오는 조바심이다. 언제나 마음 편하게 관람을 하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대할 수 있으려는지.
성불사 석불좌상, 육계가 너무 크잖아?
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28에 소재한 국립충주박물관. 국보인 중앙탑 앞쪽에 위치한 충부박물관의 야외에는 많은 석조물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곳에는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등 많은 불교관련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불사 석불좌상. 높이 98cm 정도인 이 석불좌상은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곳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하는 불신에 덧칠을 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도식화된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충주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이 석불좌상은 머리위에 상투 모양인 육계를 너무 과장되게 크게 조성했으며, 오른쪽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조상하였으며, 마모가 심해 눈, 코, 입 등의 윤곽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깨의 선은 당당하다. 이렇게 어깨의 선이 당당한 것으로 보거나 법의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아래에는 여러 개의 장식을 곁들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편견단이다.
법의는 평행사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는 도식화 되어있으며, 양 다리와 후면의 들 뒤에도 주름을 조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신체의 표현감각이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지방의 장인이 조성한 불상인 듯
이 성불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때 석조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듯하지만, 도식화 된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육계가 너무 크게 표현을 하는 바람에 마치 머리 위에 투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 그러나 신체의 비례는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배 아래편에 대고 있지만, 손의 형태가 떨어져 나간 듯 정확한 손의 형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편 무릎은 금이기고 쪼개진 것을 맞추어 놓았다.
등 뒤편에는 법의를 굵게 틀어 모아 세 줄을 만들었다. 그 중 두 줄은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사선으로 내려갔으며, 한 줄은 꼬듯이 모아 밑으로 처트렸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석불좌상이나 입상의 경우 광배가 있을 때는 뒤편에 이렇게 조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성불사 석불좌상은 뒤편에까지 조각을 해 놓았다.
육계가 필요이상으로 크게 조성이 되었다든가, 손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보아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불사 석불좌상. 비록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비지정 석조물이긴 하지만, 천 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 그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한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 앞으로는 현재의 답사 자료와 함께 오래 전에 답사를 했던 자료들을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시대, 고려 중엽? 서로 다른 설명 황당해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로,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문화재청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높이 4m의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원래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4년 이 마을에 살던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뒤 딸 청신과 손자 김귀수가 현재의 원흥사를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나 코는 큰 편이다.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으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어깨와 하부의 너비가 같아 둔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무릎 이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머리 위에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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