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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