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을 잃은 비, 짝 잃은 쓸쓸함이 느껴져
2012. 3. 26.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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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야 할 것들이/부도, 비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 귀부의 머리. 신라말에서 고료 초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용머리이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국보 현묘탑. 제 자리를 떠나 더욱 안타깝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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