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참 아름다운 강이다. 예전 기억으로는 이 남한강에서 잡히는 장어를 갖고 요리를 해 파는 집들이, 지금 신륵사 입구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팔당댐이 막히고 나서 물길을 이용해 신륵사 앞으로 올라오던 장어들은, 높은 벽에 막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1973년 이후 다시 30년. 이제는 남한강에 세 개의 보를 막는다고 난리법석이다.

그 보 공사를 하기 위해서 신륵사 맞은편에 있는 금모래은모래의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금모래은모래는 자연 퇴적층을 이룬 곳이다. 위에서 흐르는 남한강의 물길이 돌아치면서 흙을 날라다가 쌓은 곳이, 바로 여주사람들이 자랑하는 금모래은모래 밭이다. 이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숲이 우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휑하게 파헤쳐진 곳, 슬픔이 밀려와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그 곳에서 건너다보이는 금모래은모래는 예전의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숲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듬성듬성 조경을 해 놓은 나무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아름답던 모래톱은 그저 평평한 볼품없는 꼴로 바뀌어 버렸다. 물이 굽이치는 곳에는 채취한 골재가 산을 이루고 있다.

저 모래산이 바로 남한강의 속살을 다 빼낸 것이려니 생각하니, 한숨만 쉬어진다. 신륵사 전탑을 오르는 길에 만난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에게 묻는다.

 


“과연 저것이 강을 살리는 길일까요?”
“.......”
“저렇게 해 놓으면 이 강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다 잘들 살까요?”
“.......”
“강을 지키겠다고 노심초사 하시던 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


2010 2, 2의 남한강 금모래은모래(신륵사에서 바라본) 아래사진은 2011, 5, 19 의 모습. 숲이 사라졌다

한 마디의 답도 없다. 그저 입을 다물고 살라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600년이 넘는 시간을 신륵사 앞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있는 은행나무. 이 나무는 나옹선사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찾아 마음을 닦고 불도를 배우고, 중국에서 돌아와 짚고 온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옹스님은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 후일 내가 죽어도 살 것이고, 만일 이 나무가 죽으면 나는 아주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 나무는 전쟁 통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600년이 넘는 세월을 잘 자라고 있다.

산처럼 쌓인 남한강에서 채취한 골재더미. 속살을 다 빼앗긴 남한강이다.

여강,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여(麗)’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2010, 3, 28 여강선원에서의 수경스님과 파헤쳐지고 있는 여강선원 자리(아래)

달라진 여강, 이제는 금모래은모래도, 여강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수경스님’이 강을 지키겠다고 건강을 해치며 지키고 있던, ‘여강선원’의 자리도 다 파헤쳐지고 있다. 이제는 무엇에 마음을 담고 살아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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