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수천을 바라보며 한 소리꾼이 춘향가 한 대목을 불러 젖히고 있다.

자시에 생천(生天)하니 불언행사시(不言行四時) 유유창창(悠悠蒼蒼) 하늘 천(天)
축시에 생지(生地)하여 금목수화를 맡었으니 양생만물(養生萬物) 따 지(地)
유현미묘(幽玄微妙) 흑적색(黑赤色) 북방현무(北方玄武) 검을 현(玄)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동서남북 중앙토색 누루 황(黃)
천지사방이 몇 만리 하루광활(廈樓廣闊) 집 우(宇)
연대국조(年代國祖) 흥망성쇠 왕고래금(往古來今) 집 주(宙)
우치홍수(禹治洪水) 기자추연(箕子推衍) 홍범구주(洪範九疇) 넓을 홍(洪)
제제군생(濟濟群生) 수역중(壽域中)에 화급팔황 (化及八荒) 거칠 황(荒)

(생략)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박대(薄待) 못하느니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법중율(法重律) 춘향과 나와 단 둘이 앉어 법중 여(呂)자로 놀아보자. 이리 한참 읽어가더니마는,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춘향 보고지고 추천하든 그 맵시를 어서어서 보고지고."


조선 후기에 8명창 중 한 사람인 김세종(1835 ~ 1906)은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소리꾼의 내력이 있었다고 전하며, 김세종은 송우룡 등과 함께 고창의 신재효에게 판소리의 이론을 익혀, 신재효의 소리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세종의 이론은 소리꾼의 지침

김세종이 언제부터 소리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지 않는다. 다만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를 통해서 본 김세종의 판소리에 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 소리의 정형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이론을 보면


가작마을 안내비와 마을 안길(아래) 우측으로 김세종 명창의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첫째, 판소리 발림을 극적인 내용과 같게 해야 하며, 얼굴 표정과 몸의 모든 동작이 극적인 내용 및 절주가 같아야 한다.
둘째, 음악은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야 한다.
셋째, 장면이 긴박하지 않은 곳에서는 느린 장단을 쓰고, 긴박한 장면에는 빠른 장단으로 몰아야 한다.
넷째, 슬픈 장면에는 계면조를 쓰고 웅장한 장면에는 우조로 소리를 해, 조와 장단이 판소리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어울러야 하며 가사의 뜻에 따라 선율 또한 일치되어야 한다.
다섯째, 가사는 짧게 붙이고, 소리는 길게 부르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이치에 맞아야 한다. 등이다.

김세종의 자취를 찾아 가작리를 가다

흥선대원군조차 그 소리에 반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 김세종 명창. 그 자취를 찾아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를 찾았다. 면 소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이지만 찾기는 수월치가 않았다.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매실나무들이 빼곡 차 있다. 그 한편에 ‘김세종 명창 생가 터’라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마침 밭에서 일을 하고 나오는 마을 분들을 만났다.

“김세종 명창 생가 터가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그걸 왜 거기 세워 놓았나 모르겠네요. 저 안에 보이는 저 집이 명창이 살던 집 터라고 하는데”
“저기 길가에 집 말인가요?”
“예, 거기가면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그 앞 집이예요. 며칠 전에도 버스로 사람들이 한 차가 와서 둘러보고 갔는데, 그 양반이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마을에서조차 이젠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명창의 일생이다. 마음 한 편이 허전해진다. 소릿광대 쯤으로 여김을 받던 세월을, 그렇게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던 명창의 대우가 씁쓰레해서이다. 괜히 생가 터 안내판만 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돌아설 뻔 했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우측으로 공동 우물이 보인다.


그 앞에 앞마당이 너른 집이 있다. 바로 김세종 명창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라고 한다. 지금의 집이 당시의 집은 아니다. 그러나 그 주변을 돌아보니 명창이 나옴직도 하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집 앞으로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잠시 그길로 걸음을 옮겨본다. 조금 나아가니 잡풀이 우거져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아마도 명창은 이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며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까?

장자백, 이동백, 유성준, 이선유 등 당대를 울린 명창들을 제자로 둔 김세종 명창. 대문 앞에 놓인 풍구에서 옛 흔적을 찾아본다. 괜히 부질없음을 알고 멋쩍은 웃음을 남기며 뒤로 돌아선다. 어디선가 천자뒤풀이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교만이 지나치면 세상을 망치게 된다. 이런 말은 골백번이나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그런 것을 잊게 되고, 또 다시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한다. 참으로 우매한 것이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그런 인간이 부른 교만이 한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바로 현 순창군에 있는 적성현이라는 고을이다.

적성현은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에 폐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현이 폐현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바로 교만한 한 인간의 바보 같은 행동에서였다. 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21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채계산’이라는 산이 있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 산의 중턱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최영이 화살을 따라 뛰던 산

체계산은 회문산,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이다. 이 산은 화산, 적성산, 책여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 봉우리는 험한 준령인데 최영장군이 이 산에서 활을 쏘고, 화살보다 먼저 말을 달리며 무술을 닦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활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이 떨어지는 곳으로 내달았으나, 화살이 보이지가 않았다.

최영은 말이 뒤늦어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최영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그 뒤로는 직접 자신이 활을 쏘고 산에서 달려 내려와, 적성강에 먼저 도착하는 훈련을 수도 없이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영은 자신의 경솔함을 바로 후회하고,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달렸다고 한다.



신비한 화산옹 바위의 전설

이 채계산이라는 이름은 귀부인이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은 형상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채계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예전 이곳에 적성현이 있던 곳인가 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풍부한 물이 앞으로 흐르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시야 속에 많지 않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예전 이곳이 적성현이 있었다고 하면, 상당히 많은 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만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이, 결국 한 현을 송두리째 망하게 만든 셈이다.



이 산에 있는 바위는 흡사 노인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화산옹 바위'라고 부른다. 늙은 노인이 서 있는 바위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로 이 바위를 보는 순간, 수염을 길에 느린 노인 한 분이 서 있는 듯하다. 이 바위는 장군바위, 미륵바위, 메뚜기바위라고도 부른다.

교만은 역사를 망치게 만든다는 교훈이

화산옹 바위는 높이가 30m 정도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면 이 바위의 우측이 떨어져 나간 듯 보인다. 좌측에는 팔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데, 우측엔 그런 돌출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잘려나간 듯하다. 이 바위의 우측 팔 부분이 잘려나간 것은, 전라병사 김삼용의 교만심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 화산옹 바위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바위였다고 전한다. 풍년이 드는 해는 이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지만, 흉년이 드는 해는 검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성현 내에 큰불이 나거나 유행병이 번지면 바위가 푸른색을 띤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가 되면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 한단다. 만일 말에서 내리지를 않으면 말이 다리를 삐거나, 말에 탄 사람이 낙상을 하기도 했단다. 그런 변괴가 일어나는 신령한 바위이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이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아이를 못 낳으면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위 앞에는 누가 기원을 한 것인지 작은 돌무지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인가 전라병사 김삼용이 금빛과 은빛이 나는 화려한 갑옷으로 차려입고,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수행을 하던 아전이 다가와 김삼용에게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삼용은 그 이유를 듣고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탄 채로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분을 이기지 못한 김삼용은 ‘화산옹의 요망한 바위덩어리가 장부의 기개를 꺾는다’며, 칼을 빼 오른쪽 어깨를 치니 팔부분이 떨어져 적성강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화산옹 바위의 영험은 사라졌으며, 천재지변이 연이어 일어나 적성현은 폐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교만이 한 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매한 마을의 지도자가 마을을 망치 듯, 우매한 가장은 집안을 망치는 법이다.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화산옹 바위. 이 바위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다면, 나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을. 두 손을 마주해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없는 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내를 건너면 좌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나온다. 대모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작은 산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섬기던 장소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 학성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 대모암을 창건하였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700m 정도라고 하지만,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성의 길이는 100여 m 정도인 것 같다. 남은 부분은 넝쿨이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다. 성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았는데, 성벽의 넓이는 1.3m ~ 4m 정도가 된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대모암과 대모산성. 아마도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산당과 연결이 된 전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산당에 모셨다는 신격이 혹 홀어머니는 아니었을까? 성벽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본다. 그저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는 날이다.

봉사를 하는 사람들. 그것도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다. 한 곳은 한 달에 10여 차례의 스님짜장을 전국을 다니며 봉사를 하는 곳이고, 한 곳은 창원 팔용 민속 5일장에서 장날마다 무료급식을 하는 곳이다. 이 두 곳이 만났다. 거기다가 ‘제9회 우리 마을 경노잔치’까지 곁들여졌다.

한 달에 여섯 차례 민속 5일 장날마다 무료급식을 하는 곳. 남원 선원사를 아침에 출발한 스님짜장의 봉사단 일행은 장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준비를 시작한다. 이미 이력이 붙은 솜씨들이다. 커다란 가마솥 두 개가 트럭에서 내려지자 바로 자장을 볶기 시작한다. 이미 무료급식소 주변은 어르신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몸에 밴 봉사정신

창원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봉사단체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르신들께 자장면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리고 6월 4일 민속 5일장 날을 맞아 창원으로 향한 것이다. 중학교 학생부터, 고등학교, 일반 기업의 직업들, 그리고 주부들까지 300여명의 봉사자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혀를 내두른다.

스님짜장이 익어갈 무렵, 콩으로 만든 햄을 부어 넣는다.

“스님짜장에도 고기를 집어넣나?”
“아닙니다. 콩으로 만든 햄인데요.”
“암, 그래야지”




자장면을 볶고 있다. 제일 끝으로 고기맛을 내는 콩햄을 넣는다. 

간을 보고 또 본다. 아르신들의 구미에 맞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한편에서는 그릇에 밥을 담고, 한편에서는 스님이 자장을 부어준다. 자원봉사를 하는 학생들과 회사원들이 쟁반 가득 자장밥을 담아 어르신들께로 나른다.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몇 몇 분이 줄은 선다. 금방 줄은 길게 늘어났다. 큰 가마솥으로 두 솥을 자장을 볶았는데 부족하다. 이미 1,300명을 넘게 급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먹을 것을 또 볶는다. 오후 1시 40분에 배식이 끝났다. 그리고 잠시 뒤, 언제 그렇게 많은 어르신들께 급식을 했는지 흔적조차 없다.


선원사 봉사단원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한편에서 민요 한마당이 선을 보이고

봉사를 하는 손길들을 보니 몸에 밴 듯하다. 아마도 그 마음이 아름다워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밝은가보다. 그렇게 1,500그릇 정도의 자장밥으로 아름다운 봉사를 마쳤다. 스님짜장 버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한다.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는 것을...


 

자장밥의 배식이 시작이 되었다. 그릇에 밥을 담으면 짜장스님이 자장을 듬뿍 퍼 담아준다


스님짜장밥을 드시기 위해 늘어선 줄, 그리고 밥을 맛잇게 드시는 어르신들
"고거 참 맛있다"를 연발하신다.



봉사는 누가 하는 것이 중요한가? 서로가 팔을 걷어부치고 그릇을 닦고 있다. 어르신들이 맛있게 드실 수 있도록
한 자원봉사자가 '효자손'을 어르신들께 나누어 주고 있다. 모습이 아름답다.
그리고 급식이 끝나고나자,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 순식간에 주변이 말끔해졌다.

겁나게 더운 날, 어르신들을 위해 기꺼이 고생을 한 자원봉사자들이 '사랑실은 스님짜장'버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들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거목(巨木)이나 오래된 고목(古木)들 중에서,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 등이 아니면 잎이 날 철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찍어도, 그 위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산 23-1 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81호인 ‘남원 보절면 느티나무’를 찍으려고, 아마도 몇 달인가를 기다린 듯하다.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 정도라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천연기념물 제281호로 지정이 된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의 느티나무 

진기마을의 느티나무, 위용에 감탄하다

신기 마을의 정자나무와 당산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는 ‘남원 진기리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높이 23m, 가슴높이의 둘레가 8.25m이다. 뿌리 근처의 둘레가 13.5m나 되는 거목으로, 가지의 길이는 동서 25.8m, 남북 28.6m이다. 이 느티나무는 단양 우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세조 때 힘이 장사인 ‘우공(禹貢)’이라는 무관이, 뒷산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뽑아다가 마을 앞에 심어놓고, 마을을 떠나면서 나무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우공은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의 녹훈을 받았으며 그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손들은 사당을 짓고 한식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6월 2일 오후,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진기리의 느티나무를 찾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울 정도의 날씨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자리를 비워놓고 답사를 떠난 것이다. 신기마을을 물어 들어가니, 마을 한편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찾아 촬영을 마치기는 했지만, 영 마음이 씁쓸하다. 신기마을이라는 석비가 길가에 서 있어 마을을 찾기는 했지만, 도로변에도 마을이 갈라지는 곳에도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를 않다. 마침 동행을 한 일행이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었지만, 만일 외지에서 혼자 찾아들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나무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한 흔적

길을 지나는 몇 분의 어르신에게 길을 물어 찾아 든 신기마을이다. 자료를 미리 보았기에 보절면 진기리 신기마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마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찾아 올 리가 없다. 아니 올 수가 없다.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가 소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식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은 큰길가에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안쪽에 달랑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서 있다. 천연기념물을 찾아 그 위용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런 경우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우리 문화재가 홀대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갈라진 줄기와 땅위로 들어 난 뿌리에 고인 물(아래)

느티나무를 만지며 소원을 빌다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졌다. 한편으로는 축대 밑까지 가지가 뻗어있다. 나무의 뿌리는 원 줄기에서 10여m 밖까지 뻗어 땅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나무뿌리가 땅 위로 솟아 홈이 파진 곳에 물이 괴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럴 정도로 나무는 오래 묵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몇 개의 굵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다가 잔가지를 만든다. 밑동 근처에는 연륜을 말해주듯, 혹처럼 불거진 옹이도 보인다. 밑동 위에 처진 새끼줄에는 숯이 끼워져 있다. 아마도 제를 지내면서 금줄로 친 듯하다. 나무의 옆에는 많이 훼손이 된 솟을삼문이 보인다. 사당의 출입문이었을까? 나무는 그러게 당당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솟을삼문은 퇴락한 모습이다.


금줄에 끼워놓은 숯과 솟을삼문

나무에 손을 대어본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 안에 거대한 힘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600년 오랜 풍상을 이겨 온 나무의 힘일까? 그 세월을 이렇게 한 자리에 서서 온갖 세월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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