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토요일, 아침 일찍 남원을 출발하여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의 문화재 답사에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서부터 공사중이라 헛걸음을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려운 답사. 길도 없는 산길을 몇 번이고 올라야 했던 답사 길. 오늘처럼 힘들게 답사를 한 날은 아마도 없었던 것만 같다.

순창이나 담양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담양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보물 제111호 개선사지 석등.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소재한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이 석등을 담양에서 찾아가려면 광주호를 끼고 돌기 때문에, 광주광역시를 거쳐야만 찾아갈 수가 있다.


진성여왕이 공주였을 때 주관을 하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보면, 이 석등의 간주석 부분까지 묻힌 채로 있었다. 1960년에 간행된 『국보도록(國寶圖錄)』에는 이미 지대석 부근까지 드러나 있고, 그 후 1965년에 주변을 정리하면서 석등의 묻혔던 부분을 파내고, 이를 노출시켰다고 한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재관리국의 고증을 받아 지대석과 하대석, 간주석 일부를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는 복원공사를 하였다.

이 개선사지 석등은 고복형 석등이다. 간주석이 장고통 형태로 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는 개선사지 석등의 높이는 3.5m이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이는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새겨 넣어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굄을 마련하였고, 팔각으로 된 화사석은 각 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내어놓았다. 화사석의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석등을 만들게 된 내력을 적은 ’조등기’를 음각하였다. 이 조등기에 보면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등기의 기록으로 제작 년대를 알 수 있는 석등

개산사지 석등은 그 세운 년대가 신라 때로 확실하다는 점과, 그 석등을 세우게 된 내력을 간주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를 받고 있다. 팔각지붕의 마루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져버리고 한 면의 귀꽃만 남아있다. 옥개석 정상은 상륜 받침을 놓고 앙화, 보륜, 보주 등의 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이 개산사지 석등의 조등기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다.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가 석등을 만들기를 주관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7행부터 10행까지의 내용은 이 사찰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이 ’조등기’에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어 석등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데 1행에서 6행까지는 함통 9년인 868년이, 7행부터 10행까지는 용기 3년인 891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조등기’는 총 10행 136자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景文大王主 ② 文懿皇后主大郞主願石燈 ③ 炷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 ④ 繼月光前國子監卿沙干金 ⑤ 中庸途上油糧業租三百碩 ⑥ 僧靈(判 ?) 建立石燈 ⑦ 龍紀三年辛亥十月日僧入雲京租 ⑧ 一百碩烏乎比所里公書俊休二人 ⑨ 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沓四結 五畦 ⑩ 東令行土北同 奧沓十結 八 東令行土西北同 上南池宅土西川 畦 上南池宅土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그리고 큰 공주님(후에 진성여왕)께서는 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함통 9년(경문왕 7년, 868) 무자해 음력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고자 전임 국자감경인 사간 김중용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로 3백 석을 날라 오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 3년(실은 대순(大順) 2년, 진성여왕 5년(891) 신해년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은 서울에서 보내준 조 1백 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대업에 있는 물가에 있는 논 4결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을 영구히 샀다.」


2011년 6월 20일 수원에 있는 궁전이라는 한옥에서 전통경기도 안택굿이 열립니다. 이 굿은 4대째 무가(巫家)의 계보를 잇고 있는 고성주(남, 55세)씨가 경기도 굿의 정수를 보여주는 마당으로, 이제껏 볼 수 없던 질펀한 경기도 굿을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경기도 굿은 세습무들이 진행하는 중요무형문화재인 경기도당굿과 강신무들이 굿판을 여는 강신무굿이 있습니다.

강신무굿인 경기도 안택굿에서는 성주굿에서 대들보에 소창을 걸고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 천을 잡고 지신밟기를 하며, 뒷전에서는 맹인풀이 등 해학이 넘치는 굿판이 펼쳐집니다. 이런 기회는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듯합니다. 하기에 블러거님들 중 관심이 있는 분 딱 세분만 모시겠습니다,

아래 팸플릿을 보시고 댓글에 전화번호 등 연락처를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초대되신 분 외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딱 세분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팸플릿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옛 풍습을 지키는 거창군 무촌마을 사람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런저런 일을 많이 당한다. 마을에 들어가면 길을 묻거나 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하다가 보면,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무촌마을에 들렸다. 마을에는 경남 기념물 제198호인 수령 400년이 지난 은행나무가 서 있기 때문이다.

마침 무촌마을 은행나무가 서 있는 옆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에 정자가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계시다. 이 은행나무는 원줄기에서 새싹이 나와 흡사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가지는 8개가 사방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이 되면 많은 은행을 수확한다고 한다.


무촌마을 마을안에 자리잡은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할머니 당이라고 한다. 정월 보름에 지낸 당제 때 쳤던 금줄이 쳐져 있다.


마을 사방에 당산이 있는 무촌마을

이 은행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다. 돌로 만든 제단의 앞쪽에는 ‘당산제단’이라고 음각이 되어있다. 이 당산을 마을에서는 할머니 당이라고 부른다. 이 할머니 당에는 비린 음식을 제수로 차리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당제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굳이 이장님을 찾는다. 마을을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이장이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보니 마을 이장님보다 윗분들이시다. 그리고 당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아시는 듯하다. 그런데 굳이 이장님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잠시 후 무촌마을 이민언(남, 68세) 이장님이 정자로 오시고 나서, 본격적인 마을 당제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이장님과 어르신들은 앞장서 마을에 있는 네 곳의 당산을 안내를 해주신다.



당제를 가장 먼저 지내는 할아버지 당으로 오르는 길 양편으로는산죽이 하늘을 가란다. 제단은 두개가 놓여있으며 하나는 산신단, 또 하나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아래편 돌 밑에는 정우러 보름에 당산제를 올린 후 제물로 사용한 돼지머리를 묻는 곳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 해’

마을 산제당이라고 하는 할아버지 당을 찾아가면서 동행을 하시는 어르신께 슬쩍 물어보았다. 왜 꼭 이장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셔야 하는 가를. 그랬더니 간단하게 대답을 하신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 마을의 가장 어른이 이징님 아니신가? 그래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당연히 이장님한테 들어야 하지”

산제당인 할아버지 당을 올라가면서 계단에 나 있는 풀을 뽑으신다. 할아버지 당 근처에도 금줄을 둘러놓았다. 참나무인 당산나무는 밑동의 둘레가 2m 가 넘을 듯하다. 몇 년이나 묵은 나무냐고 질문을 드렸더니, 아주 오래 되었다는 것 밖에는 알 수가 없다고 하신다.

산제당에는 산신당이라고 쓴 제단이 있고, 그 옆에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쓴 돌이 놓여있다. 이곳이 바로 가장 먼저 제를 올리는 할아버지 당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제를 지낼 때는 돼지머리를 사용하며, 제사를 마치고 나면 그 돼지머리를 땅에 파묻는 다는 것이다. 제단 옆에는 커다란 돌이 보이는데, 그 밑에 돼지머리를 통째로 묻고 내려온다고 한다.


동구당산이라 부르는 아들당산과 대곡천 옆 논둑에 쌓아 올린 며느리당산


돌탑으로 쌓은 아들당산과 며느리당산

할아버지 당을 돌아보고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마을 입구라고 하는 곳에 자리한 아들당산으로 향했다. 아들당산은 우측으로 연수사를 들어가는 길 건너편 산 아래, 돌을 쌓아 만든 누석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이곳에도 금줄을 쳐 놓았는데, 이 당산을 ‘아들당산’ 혹은 ‘동구당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며느리당산은 마을의 북쪽 대곡천이 흐르는 곁 논둑에 자리하고 있다. 며느리 당산 역시 돌탑을 쌓아놓았다. 네 곳의 무촌마을 당산은 마을을 에워 쌓고 있는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어르신들은 당산제를 정성을 다해 드린다고 말씀을 하신다. 인근에 있는 마을들도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마을에 화가 있어 다시 시작을 하였다고 귀띔을 해주신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대곡천.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월이면 집집마다 용왕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에서 사용하는 당산제 축문. 아들당산의 축문으로 네 곳 모두 축문이 있다.


축관을 지내셨다는 어르신께서 축문을 가져다주신다.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고 매년 그 해에 맞게 출력을 하여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한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무촌마을 어르신들. 이장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이 마을이 얼마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어, 오늘도 무촌마을은 모두가 탈 없이 지내는가 보다.

서원과 서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원은 앞에는 학동들이 배움의 장소로 이용하고, 뒤로는 선현을 모신 제각이 있다. 그에 비해 서당은 배움의 장소만 있는 곳을 말한다.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번지에는 ‘대각서당’이 있다. 하지만 현재 지정이 되어있는 명칭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344호인 ‘대각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물에는 조금 작은 현판인 ‘대각서원’과 그보다 큰 ‘대각서당’이라는 현판이 동시에 걸려있다. 선현을 모신 제각이 없어 서원으로서의 규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곡서원이란 명칭을 쓴 것은, 전에 이 서당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진주와 거창을 답사하면서 들린 사곡서당. 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을 당했다.


정교한 치목을 보이는 강당과 부속건물

이 서당은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앞으로는 문간채가 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후 툇집 형식이며, 정면의 기둥은 배흘림을 둔 두리기동이다.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꾸민 강당은 단면의 크기도 크고 훤칠하다. 이 서당은 원래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후에 다시 자리를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대각서원은 처음에는 각재 하항을 모시기 위한 ‘대각사’를 지었다가 그 뒤에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등 6분의 유학선현을 추가로 배향하여 일곱 분을 모시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대각서당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가장 답사가 어려운 곳이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거의가 닫혀있기 때문에 뒤 돌아서기가 일쑤다. 대각서당을 찾아 간 날도 대문이 닫혀있다. 그런데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이곳에는 서당 안 건물에 몇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강당과 동재, 서재에 모두 사람이 살고 있다.

강당에 사시는 분이 차 대접을 한다. 서원을 돌아보다가 이렇게 대접을 받아보기도 난생 처음이다. 알고 보니 이곳에는 동재와 서재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분들이 대각서당과 연관이 있는 분들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강당과 동재와 서재 모두가 사람의 온기가 배어있어 따듯한 느낌이다.



건물의 주초만 보고도 반하다

대각서당은 서원으로서 전체적인 배치가 무난하다. 또한 부재의 사용이나 적절한 비례의 적용, 그리고 동재의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법 등 조선후기 건축의 여러 기법들을 동시에 볼 수가 있다. 강당을 바라보면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두고, 두 칸의 대청과 또 한 칸의 방을 두고 있다. 잘 다듬은 네모난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운 강당은 주초만 보고도 반해버렸다. 팔각으로 조성을 한 주초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집 뒤로 돌아가니 뒤편은 사각의 마름보로 조성한 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전면과 후면의 주초를 다르게 논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동재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서원의 부속건물과는 다른 파격적인 형태로 지어졌다. 두 칸의 방을 두고 한 칸은 누마루를 깐 정자의 형태이다. 비탈진 터를 그대로 이용해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한 칸의 난간을 두른 정자방을 꾸민 것이다. 이 정자방의 주초는 장초석인데 역시 팔각이다. 밑에는 둥근 돌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장초석을 놓아 기둥을 올렸다. 이 서당을 조성한 치목이나 기타 부재보다 팔각과 사각으로 된 주춧돌만 보고도 감탄할 만하다.

 




세상에 변소인 줄 알았다가

대각서당은 원래 서원이었던 것을 자리를 옮기면서 제실이 사라졌다고 한다. 각재 하항의 후손들이 제실을 뒤편에 짓기로 해, 서원의 본 모습을 갖추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볼일이 급하다. 문간채를 나와 보니 문간채에 허름한 건물이 한 칸 붙어있다. 당연히 화장실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난다.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사람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볼일이 급하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여기 화장실 아닌데요”
“그럼 화장실은 어디에 있나요?”
“저 밭에 있는 건물예요”


서당 대문 앞에 붙은 건물. 화장실인지 알았다(위) 화장실은 밭 저편에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대문간에 붙은 임시건물은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화장실인지 알고 사람이 목욕을 하는데 문을 두드려댄 것이다. 안에 있는 여자 분이 얼마나 놀랐을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모처럼 차 대접까지 받고 서원이 서당이 된 사연까지 들을 수 있었던 진주 수곡면의 대각서당. 자연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모처럼 피곤한 자리를 쉴 수가 있었다. 밭 한편에 마련된 화장실 안에서 혼자 키득거린다. 조금 전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이다. 그러고 보니 이 화장실도 참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받침돌의 중대석에 나한의 안면을 새긴 독특한 석불좌상. 그런데 이 받침돌의 석재가 제 짝들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만일 이 받침돌이 제 것들이라면 이런 독특한 석불좌상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만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경남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에 소재한 거창박물관 경내 야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여래좌상은 마리면 말흘리 송림마을의 절터에서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박물관을 개관할 당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은 민머리인 소발에 머리위에는 무엇인가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듯하며,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훼손이 심한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이 석불좌상은 얼굴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귀가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이 되었으며,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길게 표현을 해 눈초리가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코와 입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통견으로 걸쳐 길게 늘어트렸으며, 여러 가닥의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소매 부분에는 여러 갈래의 좁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훼손이 심하다.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길게 늘어진 소매 끝으로 나온 팔의 모습이나 손의 형태는 심하게 훼손이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손을 가슴위로 끌어올려 손바닥을 마주한 것처럼 보인다.




중대석에 나한을 새긴 독특한 기법

이 석불좌상은 연꽃받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앞면이 떨어져 나가 제대로 된 형태를 알기보기가 힘들다. 다만 가슴에 모은 손 밑이나 무릎 위에 보이는 법의의 형태로 볼 때 속옷을 입고 매듭을 묶은 듯하다. 이런 형태의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을 한 아름다운 석불좌상이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불상받침인 연화대는 송림마을에 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기에 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 연화대가 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현재 연화대는 상, 중, 하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하대석의 경우에는 훼손이 심하여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상대석은 넓게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위가 넓고 아래로 비스듬히 좁아지게 하였다. 위 받침돌에는 위를 향한 앙련을 큼지막하게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경우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재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제 짝이라고 한다면, 그 주변을 앙련의 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특징은 바로 가운데 돌인 중대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중대석에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이 안면상은 나한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중대석에 나한상의 안면을 조각한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나한상을 조각한 중대석으로 인해, 이 석조여래좌상의 조형미가 한층 뛰어나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뛰어난 신라의 석조미술을 알아내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다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씻긴 채 방치가 되어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심하게 훼손이 된 모습으로 두 손을 마주하고 있는 석불좌상. 아마도 우리 후손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니었을까? 6월 10일 거창군의 답사에서 만나본 많은 문화재 중, 가장 마음 아픈 사연을 지닌 석불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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