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4일 화요일, 아침 일찍 부산으로 출발을 했다. 10여명의 봉사단원들이 피곤한 아침잠을 설치며 봉사 길에 나선 것이다. 일찍 출발을 해서인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부산의 무료급식소에 도착한 것이 11시경. 급식소는 부산 지하철 구서역 출구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위로는 전철이 다니는 곳, 주차장 옆에 자리한 급식소.

이곳에는 하루 600여명의 어르신들이 찾아와 점심을 드신다고 한다. 무료급식은 부산의 불교기관에서 맡아 하고 있는데, 월요일에는 해인사 포교원에서, 화요일에는 노포동에 있는 혜일암에서 담당을 한다. 수요일에는 범어사 화엄회에서 주관을 하며,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바라밀회에서 급식을 담당한다.

'사랑실은 스님짜장' 버스가 14일 부산 구서 전철역 옆에 자장을 싣고 달려갔다.

봉사를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11시에 도착을 하여 짐을 풀었다. 새벽 5시에 자장을 볶아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배식을 하자고 했으나 시간을 12시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앉아서 기다리시는 어르신들이나, 뒤로 길에 줄을 늘여 서 계시는 분들에게는 죄스럽기만 하다. ‘스님짜장밥’을 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남원 선원사에서 왔다고 소개를 한다.

한번 모든 자리가 차면 250~300분 정도의 어르신들이 음식을 드실 수 있다고 한다. 상 주변은 물론 주위에도 이미 자리가 없다. 그리고 밖으로도 점점 줄이 길게 늘어난다. 이곳에 모이시는 어르신들이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는 얼핏 보아도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계신 듯하다.



11시인데도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자원봉사자들(가운데)

12시가 다 되자 속속 봉사를 할 봉사자들이 도착을 한다. 오늘 봉사는 혜일암 봉사단을 위시하여 한국전력과 대한적십자봉사단, 그리고 부산교통봉사단가지 합세를 했다. 한국전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는데, 자신들이 쌀까지 담당을 한다고 한다. 이런 봉사자들의 따듯한 마음이 모여, 어르신들의 맛있는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 한편이 훈훈해진다.

따듯한 마음이 담긴 점심 한 그릇

배식이 시작되기 전 봉사자들은 떡과 요구르트를 비닐에 하나씩 싸기 시작한다. 어르신들 께 드릴 후식이라는 것. 배식소를 꽉 채운 어르신들은 봉사자들이 줄을 서서 자리까지 날라다주는 짜장밥을 맛있게 드신다. 이런 것 하나가 그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시간을 이렇게 봉사를 했는지 알게 한다.




짜장을 배식하고 있는 운천스님과(위) 줄을지어 자장을 나르는 봉사자들(두번 째) 그리고 맛있게 스님짜장밥을 드시는 어르신들
 
사진이나 잘 찍으면 되겠지 하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봉사자들과 점심을 드시는 어르신들을 담기에 바쁘다. 위로 전철이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환경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점심을 드실 수가 있어서 좋다는 어르신들이다. 한쪽의 어르신들이 점심을 드시고 자리를 뜨자, 밖에 줄을 서서 계셨던 분들이 바로 자리를 꽉 채운다. 이렇게 두 세 번이 바뀌어야 점심을 마친다는 것이다.

눈물을 훔치시는 할머니의 사연, 가슴이 아파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앞에서 밥을 드시는 할머니가 자꾸만 고개를 숙이신다. 처음에는 눈이 나빠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연신 눈 가까이 손을 가져가신다.


급식소 밖으로도 줄을 지어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시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녀 집에 계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만”
“할아버지께서 왜요?”
“짜장면을 좋아하는데 거동을 할 수 없어서 혼자 나왔어”
“그럼 자녀분들은 아무도 안 계세요?”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되었어. 할아버지하고 둘이 사는데 오늘 짜장면을 해준다고 해서 나왔는데, 자꾸만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마음이 아프다. 사연을 듣고 보니 할아버지와 두 내외분이 사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동안 먹고 싶었던 자장을 해준다고 해서 나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는 거동을 하실 수가 없어 집에 두고 할머니 혼자만 나오셨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봉사자들은 쉴틈이 없다. 그릇을 닦는 자원봉사자들(위)과 봉사를 마치고 뒤늦게 밥을 먹고 있는 한국전력 자원봉사자들

그러데 짜장밥을 먹다가 보니 집에 혼지 누워계시는 할아버지 생각에 목이 멘다는 것. 이야기를 듣고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듬뿍 떠 드렸으면 좋겠지만, 남은 것이 없다. 그런 사연을 가지신분들이 한 두 분도 아니다. 연세가 드셔서 거동도 불편하신 두 내외분이 그렇게 의지를 하고 살아가신다는 갓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자식들이 있어 도움도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

내가 그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떡 한 봉지를 더 드릴 수 있는 것뿐이라니. 괜히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무겁다. ‘스님짜장’ 봉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마음 아픈 사연을 접하면, 기운이 다 풀려버린다. 그래서 더 험하고 그늘진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산139번지에는, 주변이 송림으로 쌓인 곳에 옛 고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가야시대의 토기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묘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자리에 있는 고분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태종 때 사온서 직장을 지낸 하현의 무덤이다.

수곡면에 있는 효자리 고분군은 수곡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옆에 형성된 요산마을의 서남쪽에 있다. 해발 70m 전후의 낮고 평평한 구릉에 있는 이 고분은, 계단을 조성해 놓아 오르기에 편하다. 6월 10일 오후, 진주에 들릴 때마다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진주 수곡은 진양 하씨들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유적을 돌아보다.

개인적으로는 조상의 고묘이다. 하기에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계단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해, 자손으로서 낯이 뜨겁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풀이라도 베어내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다. 저만큼 고분이 보이는데 여기저기 계단 주변에 석재들이 널려있다.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곳에는 예전부터 많은 고분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곳에 쓰였던 석재들이 아닐까?

이곳에 있는 분묘는 조선조 태종 때 사온서직장을 지낸 하현과 부인 포산 곽씨의 묘이다. 하현(河現)의 묘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높이 15cm, 길이 210cm의 지대석을 쌓고, 둘레돌인 갑석을 갖춘 팔각형의 호석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흙으로 봉토를 완성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묘의 앞에는 비석과 상석, 좌우에는 높이가 170cm 정도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사온서’란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고려 문종 때 설치된 ‘양온서’를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사온서로 고쳤으며, 직장이란 정7품의 벼슬을 말한다.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그 명칭을 다시 양온서로 고치는 등, 여러 번 이름이 바뀌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초기에 마련한 유례가 드문 분묘

이 고묘는 팔각형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특히 갑석의 모서리마다 반전된 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치 석탑의 옥개석과 같은 형태이다. 외형이 이러한 형태의 분묘는 유례가 드물 뿐 아니라, 축조연대가 조선조 초기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시기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머리를 조아려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난 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고묘 주변의 마을은 진양 하씨들의 세거촌이다. 이곳에는 이 고묘 외에도 몇 기의 고묘가 더 있다고 한다. 주변을 돌담으로 둘러치고 앞으로는 트여있는 고묘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그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이란 생각이다.

비석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석 측면에는 탱주와 같은 중앙 기둥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앞쪽의 상석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왜 조상님들은 이렇게 팔각으로 된 고묘를 이곳에 조성했던 것일까? 당시의 묘라고 해도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시 찾아와 조상님께 대한 예를 올려야겠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50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내다보고 있는 선조. 이곳을 찾아오다가 보니 마을에 양조장 하나가 있었는데,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막걸리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답사길. 다음에는 꼭 술 한 병 사들고 찾아와, 조상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겠다고 다짐을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후손으로서의 예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6월 10일 경남에 일을 보고 난 후, 진주에 들렸다. 한 낮의 기온은 가히 머리가 벗겨질 만 하다는 이야기가 날만큼 뜨겁다. 진주시 수곡면에 있는 문화재 답사를 한 후 되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주변이 온통 비닐하우스로 덮혀있다. 요즈음은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특작을 하는 농가가 많다보니, 그저 무심코 지나치기가 일쑤이다.

그런데 한 곳에 눈이 머물렀다. 딸기 모종인 듯한데, 어떻게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위로는 비닐을 씌울려고 하는지 철골 구조물이 있는데, 그 아래 딸기의 모종판이 철제 사다리를 받쳐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는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난 후 조금은 의아하다. 왜 저렇게 공중에 모종판을 올려 놓은 것일까?   



딸기의 모종판. 모종을 키우는데 땅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철걸 구조물로 아래를 받치고 위로 올려놓았다. 밑으로는 물이 고이게 시설을 하였다.

농촌생활에서 익힌 생활의 지혜

도대체 왜 저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내가 농사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보기에 색다른 모습이기에 사진을 찍어놓고 주변을 살피니, 밭의 주인인 듯한 분이 다가온다.

"혹시 이 밭 주인이세요?"
"예, 그런데요. 왜 그러세요?"
"왜 저렇게 공중에 띄워서 모종을 키우죠?"
"아! 저거요. 허리가 아파서 위로 올린 것이죠"
"예, 그런 이유였군요"

 



그러고 보니 금방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기구가 하나 있다. 바로 바퀴가 달린 앉은판이다. 바퀴가 달린 앉은판에 앉아 밀면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다 자란 모종을 비닐하우스로 옮겨 간단다. 예전 같으면 허리를 굽히고 해야하기 때문에, 허리통증을 많이 호소를 하고 했단다. 생활에서 얻어지는 지혜, 이런 것이 바로 전문가가 되는 길은 아닌지.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것에서 시골생활의 즐거움을 본다. 물론 농사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퀴가 달린 앉을판. 이곳에 앉아 편안히 밀고다니면서 모종 관리를 한단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마을에 옛 민속자료 등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곳을 찾아서이다. 아직도 마을에서 지성으로 당제 등을 모시고 있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고 보면, 나로서는 그렇게 전해지는 우리 것이 고맙기 한이 없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는 그런 면에서는 정말 몇 개의 지정 문화재보다 더 값진 마을이란 생각이다.

무촌리는 조선시대 남상면의 서남쪽에 자리했던, 고천방에 있었던 ‘무촌역’을 중심으로 한 마을들이다. 그 인근을 ‘무촌역리’라 한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역이 있는 곳에는 파발마를 두고, 원 등을 두어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꿔타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무촌리에 그런 역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상매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과 이야기를 들려준 마을주민들

네 곳의 당(堂)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현재 무촌리는 상매 · 하매 · 무촌 · 인평 · 성지 · 지하 등 여섯 개의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리이다. 길가에 있는 무촌마을에서 연수사 방향으로 내를 건어 들어가다가 보면 ‘하매’마을이 있고, 그 안으로 ‘상매’마을이 나온다. 매산이란 이름은 이곳이 ‘매화낙지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도로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상매마을.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네그루의 소나무가 탑을 에워 쌓듯 길가에 서 있다. 누석탑으로 쌓은 이 탑에서 내를 건너면 바위 암벽 위에 또 하나의 돌탑이 있다. 소나무 밑에 있는 탑은 ‘아들탑’이고 내를 건너 바위 위에 올린 탑은 ‘며느리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정자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아직도 마을에서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과 같지는 않아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네 곳에 있는 당을 돌면서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 윗쪽에 있는 윗당산인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오랜 세월 전해진 전통, 그대로 남은 풍습

경남 거창군에는 아직 마을에 옛 풍습인 당제를 지내는 곳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새마을운동,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많은 곳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을 버렸는데도, 이곳은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분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본다. 혹 마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상매마을에는 모두 네 곳에 당이 있다고 한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으로 구분이 되는 네 곳의 당은, 마을 위편으로 올라가 암벽 밑으로 맑은 물이 마을로 흘러드는 곳에 할아버지 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는 곳 산자락에 할머니당이 자리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애기들이 키를 쓰고 뛰어다녔다는 내. 그러면 비가 왔다고...

당에는 모두 정월에 제를 지내면서 금줄을 처 놓아 쉽게 구분이 된다. 마을주민들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이 마을은 비가 안 오면 앞내에서 키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녔어”
“누가요?”
“마을 큰 애기들이”
“그러면 비가 왔나요?”
“하모. 오고말고.”

농사철에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집집마다 밀가루를 걷어 빵을 한다는 것이다. 그 빵을 마을에 사는 큰 애기들에게 나누어주고 키를 하나씩 뒤집어쓰게 한단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내로 나가,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비를 오라고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를 바라보며 괜한 웃음을 짓는다. 그 광경이 떠올라서이다.


아랫당인 아들당과 내 건녀 암벽 위에 쌓은 며느리당

영험한 당산나무를 자르고 나더니...

무촌리의 무촌, 상매, 하매는 모두 정월보름날 자정을 기해서 당제를 올린다. 시간상으로는 열나흩날 밤이 되는 것이다. 상매마을에서는 먼저 할아버지당에서 제를 지낸 후, 할머니당을 거쳐 아랫당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자정에 시작한 당제가 아랫당으로 오는 시간은 아침 6시경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새로 장만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아들당 주변에는 원래 소나무가 다섯 그루가 서 있었지"
“지금은 네그루뿐이던데요.”
“한 그루는 더 컸는데 그 당 옆에 있는 논 주인이 나무그늘이 생겨 농사가 잘 안된다고 잘라버렸어. 그러고 나서 두 부부가 이유도 없이 죽고 말았지.”

뫼를 지어 제를 올리고 난 뒤 한지에 싸아 돌틈에 넣어 놓은 뫼

마을주민들은 신령한 당산의 나무를 잘라서 벌을 받았는가보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을 입구와 뒤편을 에워 쌓고 있는 네 곳의 당산. 아들당에서는 그 자리에서 뫼를 지어, 제를 마치고나면 한지에 쌓아 탑 안에 넣어 놓는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아들당산의 탑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탑돌 틈 사이에 한지에 쌓은 것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있는 상매마을 당산제. 오늘도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한 번도 변고가 일어난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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