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장곡사(長谷寺)’는,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소재한다. 사지에 의하면 장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12년인 850년에, 보조선사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장곡사는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는 절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찰이다.

 

7월 14일(일), 엄청나게 들이 붓는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장곡사. 경사진 산비탈에 여지저기 전각들이 서 있고, 산비탈에는 몇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서 있다. 그런 나무들만 보아도 장곡사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장곡사는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장곡사 경내로 들어서면 운학루와 보물 제181호인 조선조에 지었다는 하대웅전을 만날 수가 있다. 하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보물 제33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에 조성한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하대웅전 뒤편으로 난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을 만난다. 상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국보 제162호인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과 석조대좌, 그리고 보물 제174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대좌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장곡사에는 대웅전이 두 개일까 하는 점이다. 구전이겠지만 2005년 장곡사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장곡사의 대웅전은 원래 상대웅전이다. 그런데 상대웅전에 모셔놓은 철조약사불좌상이 하도 영험해 이곳에 와서 병이 낫기를 바라고 불공을 드리는 사람은 모두 완치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약사불 한 분을 아래쪽에 하대웅전을 짓고 모셔놓았다.’는 이야기를.

 

그래서인가 장곡사 하대웅전에도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번에 장곡사를 답사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워낙 많이 쏟아지는 장맛비로 인해 여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미쳐 확인을 하지 못했다.

 

 

범종루에 있는 기물 두 가지

 

장곡사 경내에 들어서면 운학루 옆에 범종루가 자리하고 있다. 범종루는 종과 북, 운판과 목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 범종루에 있는 네 가지를 ‘불전사물’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각에 있는 불전사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범종은 용뉴와 음통, 그리고 종 등으로 연결이 된다. 이 범종에서 걸 수 있도록 조성한 용뉴는 용왕의 아들인 ‘포뢰’를 상징하는 욤머리를 조각한다. 그리고 대개 몸통에 조각을 하는 보살상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목적이다. 즉 범종은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을 깨우치는 대자대비의 소리라고 볼 수 있다.

 

불전사물은 처음에 법고를 먼저 치고 나서, 그 다음에 종을 친다. 그리고 목어와 운판의 순으로 진행을 한다. 법고는 대개 범종루의 대들보 등에 매달거나, 법고좌라는 북의 받침에 올려놓기도 한다. 법고는 온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법고는 소가죽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축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강하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 형상을 조각하여 그 속을 파내고, 채로 속의 안면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목어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제도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금속판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이 운판은 뭉게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雲版)’이라고 했으며, 이는 대개 모든 것을 배불리 먹인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일설에는 중국 송나라 때 운판을 공양간에 매달아 놓고 대중들을 모이게 할 때 쳤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면 운판은 모든 생명을 배불리 먹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하다. 거기다가 공양간에 이 구름처럼 생긴 운판을 매달아 놓은 것은, 화재를 막기 위한 뜻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장곡사 법고와 통나무 그릇

 

범종각 왼쪽에는 찢어진 큰 북 하나가 매달려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 큰 북은, 오랜 옛날 장곡사에 있던 한 승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중생을 계도하는 뜻에서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북은 생김새가 지금의 북과는 다른 부정형으로 북통이 조형되어 있다. 앞 뒤편의 가죽은 모두 찢어졌으나, 북통은 그대로 보존을 하고 있다.

 

 

대북의 반대편 바닥에는 통나무 그릇 하나가 보인다. 이 통나무그릇은 오래전 장곡사 승려들이, 밥통 대신 사용하던 생활도구로 전해오고 있다는 것. 길이 7미터, 폭 1미터, 두께 10Cm인 이 통나무 그릇의 바닥 한 복판에는 물이 나갈 수 있는 배수구가 보인다. 도대체 장곡사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살았던 것일까?

 

장대비 속에서 만난 장곡사 범종각의 두 가지 기물. 대북과 통나무 그릇의 연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 갖고도 과거 장곡사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어찌 꼭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만 중요한 것일까? 이렇게 과거의 소중한 기물 하나가 주는 의미는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을.

 

덥다. 더워도 그냥 더위가 아니다.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사람들도 지쳐갈 때쯤. 토요상설 공연이 끝난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 무대에, 조선시대 무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수원문화재단 소속인 무예24기 시범단원들이다. 마당 공연이 아닌 무대공연으로 이루어진 이날 공연은, 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기창 등 창류의 시연이 끝나고 나자, 각종 검을 든 무사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 중 붉은 전복을 입은 시범단 사범인 최형국 박사가 쌍검을 들고 무대 중앙에 섰다. 바람소리를 내며 쌍검을 휘둘러 대더니 이내 무대 밑으로 뛰어 내린다. 무대 위가 비좁아 마음대로 시연을 펼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숨소리도 죽였던 관람객들의 탄성

 

순간 사람들은 숨소리도 죽인 듯 긴장을 한다. 두 개의 검이 좌우로 상하로 교차되면서 쌍검의 진수를 보여준다. 쌍검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쌍검을, ‘칼날의 길이는 2자 5치, 자루의 길이는 5치 5푼. 무게는 8량이나 구별하지 않고 요도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택해서 썼다’고 적고 있다.

 

빠른 몸놀림에 허공을 가르며 바람소리를 내는 쌍검. 시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자 순간 박수가 쏟아져 나온다.

 

“정말 놀랍습니다. 쌍검의 위력이 저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 분 정말 달인 같습니다. 대단합니다. 조선 무예의 정수를 보는 듯해요.”

1박 2일을 보고 별러서 화성을 관람 왔다가 찾아왔다는 김아무개(남, 48세. 공주거주)는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이날 쌍검의 시연을 보여준 최형국 박사는 조선시대의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다. 자신이 연마해 온 무예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형국 박사는 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기까지 온 몸으로 마상무예를 연마한 무예인이다.

 

쌍검은 ‘쌍검’과 ‘마상쌍검’으로 구분 돼

 

<무에도보통지>에 보면 쌍검의 동작은 모두 19가지가 전한다.

1. 지검대적세 2. 견적출검세 3. 비진격적세 4. 초퇴방적세 5. 향우방적세 6. 향좌방적세 7. 휘검향적세(1) 8. 휘검향적세(2) 9. 휘검향적세(3. 연속동작) 10.향우방적세 11. 향좌방적세 12. 진전살적세(1) 13. 진전설적세(2, 연속동작) 14. 오화전신세 15. 향후격적세 16. 지조염익세 17. 장검수광세(1) 18. 장검수광세(2. 연속동작) 19. 항장기무세 등이다.

 

 

마상쌍검보에는 모두 10가지의 자세가 도보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쌍검의 위력과 날렵한 동작을 본 관객들은 이어지는 등패시연 등에도 큰 박수를 보냈다.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300여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어, 토요상설공연과 무에24기 시범을 보면서 즐거워 한 사람들.

 

“정말 수원이라는 곳,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오늘 무예 24기 시범을 보면서 과거에 이 화성과 정조가 직접 명을 내려 편찬했다는 무예24기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날이 무덥기는 하지만 오늘 화성을 제대로 한 번 돌아보고 가야겠습니다.”

 

 

멀리 강원도 태백에서 왔다는 이아무개(남, 43세)는 상기된 듯 이야기를 한다. 더워서 돌아보기를 포기했던 화성관람을, 무예24기를 보고나서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수원을 상징하는 화성과 무예24기. 이 두 가지를 떼어놓고 말할 수가 있을까?

 

처음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때, 무예24기를 함께 지정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무에24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을 수 있도록 수원이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수원시 팔달구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앞에 자리한 전통시장인 ‘영동시장’. 수원 화성의 팔달문 앞에는 9개의 시장이 모여 있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조하면서 장시를 연 곳으로, 그 역사가 2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동시장은 여러 장들과 함께 모여 있는 장으로, 200여 년 전부터 개장된 장터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동시장은 2~30리 밖에서도 이용하는 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영정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5일장으로 열리던 시장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동시장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영동시장은 수원천을 끼고 상가와 상점이 발달되어 있으며, 300개 정도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대형장이다.

 

 

영동시장 이층 문화공간 아트포라

 

영동시장은 그동안 시장을 살리고, 주변 대형매점들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영동시장 이층에 빈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이곳은 ‘문화예술 종합공간 아트포라’라고 명칭을 붙여, 10여 개의 공방이, 이층으로 올라가면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아트포라에 입주한 예술가들은 오직 예술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임대료나 전기세, 수도세 등도 모두 받지 않는다. 그리고 아트포라의 작가들의 공방 맞은편인 좌측에는, 커피숍과 미장원 등이 자리를 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전시공간과 뒤편에 대강당이 자리한다. 워낙 넓은 공간을 이용하다가 보니 전시 공간 앞이 휑하니 비어있어서, 조금은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6월 6일 현충일. 오후에 영동시장 아트포라를 찾았다. 그런데 2층에 비어있던 공간이 무엇인가 가득 채워져 있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다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30%의 공간에 전시를 해 놓은 것들이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쉴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몇 분이 한 공방에 모여 있다. 평소 안면이 있어 더위도 피할 겸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에 전시가 되어있네요. 그동안 휑한 것이 보기가 좋지 않았는데, 저렇게 전시를 해놓으니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요. 그 전시물들이 모두 손님들이 쉴 수 있는 의자랍니다. 그저 아무나 이곳에 오셔서 대화도 나누고, 편히 쉬어갈 수가 있는 곳이죠.”

“그러고 보니 2013화성국제연극제가 열리던 행궁 광장에서 본 것들도 있네요.”

“예, 원래는 이곳 아트포라에 손님들이 찾아오시면 마땅히 쉴 공간이 없어서 마련한 것인데, 국제연극제에 먼저 선을 보인 것이죠. 그곳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도 꽤 있고요. 앞으로 이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요”

 

 

학생들과 함께 작품제작에 직접 참여를 한 김춘홍 작가의 대답이다. 그러고 보니 행궁 광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보인다. 스피커 두 개를 연결해 차이가 나게 만든 의자며, 여행용 가방에 여러 가지 무늬를 넣어 만든 의자. 그리고 그저 여기저기 놓인 것들이 다 앉을 수 있도록 재창조가 된 것이다.

 

“어디 아까워서 사람들이 앉을 수나 있겠어요?”

“앞에다가 앉을 수 있는 의자라고 적어 놓아야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분들이 이곳을 좋아할 것 같아요”

 

작가들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다양한 형태의 의자. 한 곳에 앉아본다. 작품 위에 앉았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 이런 아름다운 의자라면 어느 누가 마다할까? 아트포라가 입주를 한 뒤, 달라지고 있는 영동시장이다. 더 많은 작가들을 위해 장소를 마련하겠다는 영동시장 상인회 이정관 회장의 말마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변화를 해야 할 때인 듯하다.

1900 ~ 1960년 옛 수원 사진전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옛 수원 사진전(1900~1960) - 렌즈 속 엇갈린 사진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가 있을까? 419일부터 전시를 시작해, 623일까지 계속되는 특별기획전을 찾아가 보았다. 과거 수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수원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에, 만나기도 전에 가슴이 뛴다.

 

특별기획전으로 열리고 있는 엇갈린 시선들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1부는 식민지의 초상으로 제국의 시선으로 본 수원의 모습이다. 2전쟁의 그늘은 타자의 시선으로 본 수원의 모습들이다. 3부인 수원의 재발견은 자아의 시선으로 본 수원을 그려내고 있다.

 

 

흩어진 자료들을 모으다

 

전시관에는 다양한 영상과 함께 1900~1960년대의 수원사람과 수원풍경을 촬영한 사진들을 시기와 성격에 따라 구분하여 놓았다. 사진에 대한 세부사랑은 제목과 시기, 촬영자, 소장자 순으로 표기를 해놓았으며, 촬영자가 불분명한 자료는 생략하였다. 전시에 사용된 자료들은 수원박물관의 소장 자료이거나, 기관 및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려를 받은 자료들이다.

 

사진을 제공한 사람들은 김동휘를 비롯해, 김영호, 김풍호, 이명자, 이영자, 조성근, 최기호, 홍승민(홍의선 촬영사진 소장) 진 굴드, 게리 헬쎈, 국립민속박물관, 서울대농학도서관, 경기지방경찰청,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수원화성박물관 등이다.

 

 

식민지의 초상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일제는 자신들의 수탈과 폭압을 조선의 근대화라고 미화시켰다. 일제는 사진 속에서 봉건적이고 낙후된 조선을, 마치 자신들이 근대화를 시킨 것처럼 선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사진 속의 조선은 쇠락해가고만 있었다. 1920년대 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는 구습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이 갖고 있던 전통적 모습과 풍속 등을 말살하려 든 것이다.

 

식민지의 초상은 쇠락한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 보이는 팔달문과 남공심돈은 멀쩡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조의 진영을 봉안한 화령전은 일본군들에게 점령을 당했으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기와가 다 깨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현대식 다리로 놓인 매향교가, 1907년의 헤르만 산더의 사진 안에는 단단한 석교(石橋)로 놓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까지도 창룡문은 제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으나, 봉돈은 다 무너져 내려 이미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제국의 렌즈에 담긴 수원은 활력이 없고 뒤떨어진 문화를 가진, 낙후된 인물들과 풍습으로 새롭게 바꿔야 할 대상이었다.

 

전쟁의 그늘 속 수원과 사람들

 

6,25 한국전쟁. 그 피해는 수원이라고 비켜가지 못했다. 창룡문과 장안문은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버렸고, 길거리에는 미군들이 넘쳐났다. 아이들은 전쟁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탱크 위에 올라가 있고, 수원비행장에는 쉴 새 없이 비행기들이 날아올랐다. 수원역에는 피난을 가기위해 사람들이 화물칸 위에 위험스레 올라가 있는 모습도 보인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 인근은 피난민 촌으로 바뀌고, 창룡문은 위에 전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미군들은 이렇게 무너져 버린 화성을 촬영하기에 바쁘고,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진 굴드와 게리 헬쎈의 렌즈에 잡힌 수원사람들의 모습은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1950년대 수원의 재발견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화성의 4대문에 대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정말 항간에서 떠도는 말 그대로 되었다. 하지만 수원은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뒤, 새롭게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재탄생하였다.

 

자아의 시선으로 본 수원은 망가지고 깨어졌지만, 생동감이 있다. 수원천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과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허물어진 성벽 위에서 그래도 꿈을 꾸는 아이들. 서호 제방에서 벌거벗은 채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그렇게 수원은 서서히 제 모습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찾아가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눈여겨보며 돌아본 렌즈 속 엇갈린 시선들. 우리는 이런 수원을 너무 잊고 살아 온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관람을 하던 한 꼬마아이의 말에 고개를 돌린다. 아마 이 꼬마도 언젠가는 수원의 지난 모습을 또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렌즈 속에 남아있는 수원은 언제나 엇갈린 시선으로 제 자리에 있을 것이다.

 

아빠! 수원이 이렇게 다 망가졌는데, 어떻게 살아났어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은 그 축성을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조선조 정조 18년인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하였다.

 

화성은 정조 이산이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되었다. 또한 아버지인 장헌세자를 향한 효심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축성 이전부터 몰려든 상권

 

성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하다. 화성은 축성을 할 이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축성이 시작되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필품은 물론, 물자조달을 위한 장거리가 형성이 되었다. 팔달문 앞에 있는 상권은 이미 정조 이산이 화성을 축성하기 이전부터, 이곳을 기점으로 난전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이 직접 내탕금 6만 냥이라는 밑천을 대주어 이룩한 시장. 남문인 팔달문 앞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어 시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 시장으로 인해 경제를 살리고 더욱 강한 왕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 것이다.

 

 

<동국문헌비고>에 나타난 장시

 

영조 46년인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는 전국의 장시는 평안도 134, 함경도 28, 황해도 82, 강원도 88, 경기도 101, 충청도 157, 전라도 216, 경상도 278개소로 모두 1,064개소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조 8년인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재용편 5 향시조에 보면 향리 밖에서 장을 여는 것은 한 달에 여섯 장인데, 1일과 6, 2일과 7, 3일과 8, 4일과 9, 5일과 10일을 이용한다. 송도는 방식이 서울과 같고, 경기도 102, 충청도 157, 강원도 68, 황해도 82, 전라도 214, 경상도 276, 평안도 134, 함경도 28곳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국의 장시는 8327개 군, 현에 1,061개의 장시가 있다고 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인 1830년에 편찬한 임원경제지에는 전국의 장시가 1,052개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장시는 꼭 5일장으로 서는 것은 아니었다. 만기요람에는 길주 북쪽 삼갑의 각 고을에는 본래 장시가 없고, 민간인들 사이에는 평상일에 매매한다.’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장시는 지역의 환경에 맞게 장이 개설된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의 선비상들이 몰려든 수원

 

수원의 유상, 일반적인 장사치들이 아니다. 유상이란 수원 팔달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선비들이었다. 물론 이 유상이란 말은 버드나무를 심은 수원을 유경이라 부른데서 비롯한 용어이다. 이들을 새롭게 조명해서 부르는 용어가 바로 유상이며, 전국 각처에서 모인 선비들로 이루어진 장사치들을 뜻한다. 그래서 이 유상들은 정조의 효심과 정조의 강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뜻에 동참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 유상들 중에는 윤선도 가문의 후손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참여를 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주었다.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갖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수원 팔달문 시장의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유상의 근거지인 수원의 팔달문 시장. 지금도 이곳은 팔달문시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7~8개의 시장이 모여 있는 상권의 중심지이다. 수원시는 이곳을 지난 20118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사업비 12억원(도비 포함)을 투자해, 유상박물관과 팔달문시장 문화센터, 조형물 설치, IT 콘텐츠 제작 등 1차 사업을 완료했다.

 

 

유상박물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동교를 건너 팔달문 방향으로 우측에 보면 1층에 <유상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유상박물관. 이곳에는 왕(정조)이 만든 시장이라는 팔달문 앞의 시장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과거 사용하던 동전과 지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곳 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아들을 복서로 키운 어머니와 아들의 복싱글러브, 대장장이와 공구, 50년간 한복을 지은 수원주단 김갑선씨 등의 사진과 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에는 원으로 된 진열대에 상인들의 미니어처와 설명이 전시되어 있다.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내주어 마련한 장시. 수원 팔달시장과 영동시장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유상박물관. 정조대왕이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를 지향해 직접내탕금을 내주어 마련한 왕이만든 시장. 그 시장에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살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면 유상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그것에서 정조대왕이 꿈꾸던 세계시장의 중심을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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