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용인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은 수원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성IC로 나가면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멀리 문화재답사를 나갈 수 없을 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찾아간다. 호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전시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작품과 아름다운 경치, 어찌 이곳을 자주 찾아가지 읺겠는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에 소재한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422일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호암미술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 창조의 꿈을 심어주고 민족문화의 산 교육장이 되는 장소이기를 원했던 창업자의 설립취지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한다.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1997년 개원한 전통정원 희원이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안 1층에 유명화가들의 작품과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민화와 국보와 보물 등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기에 난 안에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희원에 서 있는 석탑과 석조조형물 등을 더 좋아한다.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희원에 늘어선 석조물과 가을의 만남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2주 연속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가을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 정원을 둘러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시기 때문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50% 할인이 된다. 요즈음은 문화재를 감상하기 위해 전시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나이 먹은 덕을 톡톡히 보고 산다.

 

전통정원이라는 희원은 들어가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양편으로 늘어선 석인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옛 전통문양을 떠서 만든 보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석탑들이 서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조성된 이 석탑들은 문화재 지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탑 그대로가 주변 단풍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곳 전통정원인 희원에서 만나는 국보를 묘사한 탑도 눈길을 끈다. 국보 제101호 모조현묘탑은 2012년도에 경복궁내에 서 있는 실제탑을 촬영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갈 때마다 정감이 가는 탑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라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수난의 세월을 지내온 문화재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현묘탑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경복궁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 정정을 해야 할 듯하다.

 

정원을 돌다보면 우리 전통정원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아름답게 물든 단풍으로 인해 최고의 멋진 정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감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 호암미술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삼만육천지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인공호수가 있다. 그곳에도 가을이 깊었다. 호암호수로 불리는 삼만육천지는 1970년대 자연농원 개발 시절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면적이 3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만육천지 주변에 조성된 700m 길이의 벚꽃터널과 호숫가 벚꽃 산책로에는 왕벚나무를 비롯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 등 1만 그루나 식재되어 있다.

 

이곳 삼만육천지를 끼고 걷는 산책길은 가을을 느끼기에 최적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상쾌해진다. 이런 가까운 곳에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우리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 30분이면 찾아갈 수 있는 이곳은 지금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가을이 그립거든 이곳을 찾아가보라.

 

그 안에 옛날 나의 얼굴은 없는 것일까?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길 3-69(남종면 분원리 68)에 소재한 얼굴박물관. 남종면 소재지를 들어서 좌측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은 한 마디로 각종 얼굴을 다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은 연극 연출가 김정옥이 지난 40여 년간 수집해온 우리의 옛사람들이 만든 석인, 목각인형, 도자기 등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자인형과 유리로 된 인형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본 딴 와당과 가면 등, 그들의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 속에 담겨있는 장인의 예술적 감수성과 시간의 흐름이 만나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창조적 손길을 느끼게 하는 조화를 한자리에 모아 <사람과 얼굴>의 공간을 구상함으로서 얼굴 박물관을 탄생하였다고 한다.

 

김정옥이 반세기에 걸쳐 모은 1000점이 넘는 얼굴의 조형은 다양하다. 석인, 옛돌사람 (벅수, 문관석, 무관석, 동자석, 선비석, 민불 등)300여점, 목각인형 (상여나 꼭두극 또는 불교미술)200여점, 도자기나 테라코타의 인형(한국의 명기, 당나라, 일본 등) 50여점, 와당 (한국, 중국) 50여점, 가면 100여점, 초상화나 무속화의 인물화 100여점, 현대작가의 회화와 조각 100여점, 그밖에 민속품, 도자기 100여점 등 총 1000여점이 넘는 얼굴박물관. 그 안에 혹 나의 전생 얼굴이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얼굴을 만나러 가다

 

11, 전날부터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가급적이면 답사를 나가지 않지만 한가위 연휴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 터라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겸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는 얼굴박물관을 찾아갔다. 매년 특별전을 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에서 올해 특별전으로 527일부터 1029일까지 무속화(巫俗畵) 특별전인 ()과 사()를 연기하다라는 전시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매표소가 따로 있지 않다. 사람을 찾으니 자료정리를 하고 있던 관리자가 나온다. 이야기를 하고나서 관람료를 물으니 성인은 4천원,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해서 3천원이라고 한다. 두 사람 몫인 7천원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서부터 심상치 않다. 몇 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무신도가 벽에 걸려있다.

 

 

저 많은 무신의 얼굴을 모두 어디서 들고 온 것일까? 실내 여기저기 쌓여있는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수집한 자료들에 비해 공간이 좁아 보인다. 하나하나 잘 정리 하려고하면 아마 현재의 공간보디 몇 배는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게 자료들이 쌓여있다 보니 차분히 관람을 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입구에서 관리인이 일층을 돌아보고 이층을 본 후 밖으로 나오라고 한 말이 생각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일층과는 또 다른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다가 우연히 물구나무를 서 있는 재인(才人)이라는 설명이 붙은 얼굴을 만난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상여에 올려 진 또 다른 많은 얼굴을 만난다. 이런 상여는 지금은 보기도 힘든 자료이다. 그 한옆에 상여의 앞뒤에 붙여 위엄을 더한 정자용(丁字龍)’을 만났다. 정말 희귀한 자료를 만난 것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이건한 관석헌을 보다

 

실내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100여년이 지난 고택이 한 채 서 있다. ‘관석헌(觀石軒)’이라는 이 집은 말 그대로 돌을 보는 집이다. 관석헌 아래 앞뜰에는 많은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 관석헌은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자 고려청자로 유명한 전라남도 강진에서 옮겨 온 한옥이라고 한다.

 

누마루와 한편에 정자각이 서 있는 이 집은 김영랑 시인의 문중인 김홍배씨의 증조부가 100여 년 전 백두산 적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 김춘엽, 허균 등을 동원하여 지은 5동의 건물 중 안채만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관석헌은 고택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쪽으로는 덧창을 달았지만 고택의 품격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

 

 

집 옆에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본다. 멀리 팔당호의 물이 보인다. 관석헌의 상량문애는 장춘실(長春室)’로 적혀 있었지만 얼굴박물관으로 옮겨와 그 앞에 많은 돌이 서 있어 관석헌으로 명칭을 바꾼 듯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박물관은 또 다른 형태의 멋을 풍긴다. 아마 관석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많은 얼굴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광주 얼굴박물관.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자료를 살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하고 풀구를 나서는데 관리인이 이곳에서 만신을 모셔 굿을 한다고 알려준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굿을 함께 관람하면서 좀 더 찬찬히 둘라보아야겠다.

 

<대장금>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로 20039월부터 20043월까지 방송되었다. 한류 사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드라마 대장금은 여러 곳의 촬영장소만으로도 중국인 유커들을 불러들이는 관광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한 때 촬영장소를 찾아온 중국 유커들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만들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정도였다.

 

천민의 신분으로 궁녀로 들어와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임금의 주치의가 되는 장금은 훗날 대장금이라는 호칭까지 부여받았다. 그런 조선조 의녀 장금의 일대기를 그린 대장금을 비롯해 주몽, 선덕여왕, 이산, 동이, 옥중화 등 수많은 MBC의 사극들이 이곳에서 제작되었으며 그 현장을 보관한 곳이 바로 용인시 백임면 용천리에 소재한 대장금파크이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은 수원화성 행궁에서도 이루어졌다. 행궁을 찾아오는 많은 유커들도 대장금에서 보이는 요리를 주문하기도 해 유커들이 몰려올 때 그렇게 준비할 수 있는 식당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당시 몰려드는 유커들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어 무산된 적이 있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행궁도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20일 바쁜 일정 중에도 이곳을 찾아간 것은 지인이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한 미실(고현정 분)’에게 푹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선덕여왕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고 싶다는 부탁에서였다. 사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나 역시 용천리에 소재한 MBC드라마 촬영장이 궁금했던 차라 선뜻 대답을 하고 길을 나섰다.

 

구봉산 자락에 마련한 대장금파크는 멀리서보면 그대로 옛 마을이 들어서있는 듯하다. 멀리서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것은 도대체 저 안에서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제작되었으며 그 많은 배우들의 땀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TV시청을 하면서도 사극드라마 외에는 시청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자연 이 대장금파크의 모든 것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출입구부터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에 마음 끌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표소를 가니 입구서부터 기분좋게 만든다.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한다는 것이다. 굳이 65세 이상이라는 이야길 하지 않고 다니지만 입장료 7천원을 3천원이나 할인을 해준다는 것이다. 거기다 장애인들도 3천원을 할인해 주는데 장애인과 동반한 보호자 한 사람은 무료입장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칙적으로 애완동물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청각 도우미견은 입장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입구에 보면 장애인용 휠체어가 건물 안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말로만 떠들고 있는 장애인 우대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대장금 기념세트장이다. 대장금 기념세트장은 경기도 양주문화동산에 조성된 세트장의 일부를 가져와서 새롭게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넓은 세트장 전체를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오후 3시가 넘어 들린 곳이라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대장금파크를 돌아보면서 그에 못지않은 실젤적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수원도 관광객을 맞이하는데 있어 좀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반인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목적만으로 영업을 한다면 관광객들의 구미를 제대로 맞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장금파크처럼 공용화 된 휴게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면 수원화성과 행궁에 대한 더 좋은 인식을 관광객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가는 곳마다 정밀한 조형에 놀라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눈에 띤다. 동반한 지인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나오던 곳을 보고 싶다고 몇 번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미실의 연기에 빠져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선덕여왕만은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최우 사택은 드라마 <무신>을 보면서 꼭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고려시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무신정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을 중시하던 우리 역사에서 ()’를 배경으로 노비출신인 김준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사극 세트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실제 건물과 같이 꼼꼼하게 꾸며진 조형물에 감탄을 한다. 이곳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만하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세트장을 다녀본 나로서도 이곳 세트장은 그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게 꾸며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주 촬영지인 연무장과 미실궁 등을 돌아본다. 한편에 마련된 포도청과 옥사는 <구가의서>외에도 <이산> <짝패> <해를품은달> <무신> <구암허준> 등 많은 사극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었던 곳이다. 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요즈음 산자락에는 일찍 해가 떨어진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지만 다음에 다신 합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한 후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산 중턱에 서 있는 외로운 석탑 한 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건너편 산 중턱에 석탑이 한 기 보인다. 처음에는 이곳이 사극 세트장이기 때문에 그 탑도 세트의 일부인줄로만 알았다. 안내소에 물어보니 세트가 아닌 옛 탑이 맞다고 한다. 올라갈 수 있느냐 물으니 그곳도 경내이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비실에 문의를 하고 난 후 몇 사람과 대화를 거쳐 겨우 승낙을 받았다. 문화재를 답사하는데 이런 불편쯤이야 감당해야 않겠는가?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고 커다란 노송까지 곁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용인 향토유적 제66호인 고려시대 석탑인 용인 용천리 오층석탑이다. 원래 인근 절터로 추정되는 논바닥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모아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용인시 지역의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석탑으로 높이가 4.3m 정도이다.

 

역사의 한 장을 가늠했던 곳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만난 오층석탑. 현재는 오층석탑 몸돌 위 옥개석과 상륜부가 유실돼 5m를 넘지 않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 상륜부까지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다면 6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 늦게 만난 오층석탑의 조우로 인해 더 뜻깊은 대장금파크의 관람. 설핏 산등성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면서 건너편 산중턱에서 바라보는 대장금파크의 위용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용인시 향토유적 앞에 쌓인 쓰레기 부끄럽다

 

용인시에서 지정한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향토유적이란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역에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제도이다. 비록 국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못했다고 해도 나름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 민속문화재, 혹은 지방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돼야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향토유적은 그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선조들의 유물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어느 문화재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쌓여있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향토유적도 문화재 명칭은 지정받지 못했다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하기에 해당지자체에서는 도로변에 이정표를 내걸어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런 향토유적을 문화재 지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향토유적 역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다만 지정 문화재에 비해 훼손이 되었거나 제작연대 등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는 점 등이 문화재지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모처럼 떠난 문화재답사로 들뜬 마음

 

20일 떠난 문화재답사. 모처럼 마음을 다잡아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시간에 쫓겨 살다보면 문화재답사도 제대로 떠날 수가 없다. 작정을 하고 떠난 길이라 몇 기의 문화재라도 둘러보겠다고 나선 길이다. 먼 길을 갈 수 없으니 수원에서 가까운 용인으로 답사할 곳을 정했다.

 

부지런을 떨어 길을 나섰지만 오고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정작 문화재를 둘러보는 시간을 그리 많지가 않다. 당연히 마음만 바빠질 수밖에. 한 곳을 둘러보고 찾아간 곳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농촌파크로에 소재한 용인법륜사이다. 법륜사는 전통사찰로 최근 새롭게 조성을 하고 있는 절이다. 웅장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치장한 전각들이 우리 전통사찰이라기보다는 흔히 현대적인 면을 가미한 거대 작품같은 절이다.

 

그 안에 경기도문화재자료 145호로 지정된 용인법륜사 삼층석탑이 소재하고 있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서울시 구로구에 거주하는 이덕문씨 집에 소장하고 있던 것을 이운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신라석탑의 형식을 계승한 일반적인 삼층석탑으로 조성시기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법륜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올린 삼층석탑으로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탑의 형태로 보아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몸돌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이다.

 

현재의 탑은 법륜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륜부가 유실된 듯 새롭게 치장한 상륜부를 조형해 올려놓았다. 탑의 크기나 조형에 맞추어 상륜부를 제작한 듯하지만 밋밋한 탑에 비해 화려하게 조형한 상륜부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듯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위하는 삼층석탑이니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아름답게 상륜부를 치장한 법륜사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 정도로 우리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 중 만난 두창리 삼층석탑 화가난다

 

법륜사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난 후 다음 답사지를 향해 이동을 하던 중에 갈에 안내판이 보인다. 두창리 삼층석탑과 선돌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가던 길을 돌려 먼저 답사를 하기로 정하고 심층석탑을 찾아갔다. 용인시 향토유적 19호로 지정되어 있는 두창리 삼층석탑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1447-2에 소재한다.

 

두창리 삼층석탑은 뒤편에 두창저수지가 자리하고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길 건너 언덕에는 선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마을에 두 기의 향토유적이 소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도로 아래편에 자리하기 때문에 길가에 커다란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삼층석탑 옆으로는 간이의자와 간결하게 조성한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농촌마을인 두창리를 들린다면 이 삼층석탑과 선돌을 돌아보면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이곳은 탑 옆에 두 대 정도의 차량을 주차시킬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삼층석탑 앞에 마을에서 갖다 버린 듯 쓰레기더미가 수북이 쌓여있다. 버린 쓰레기들을 보니 하루이틀동안 버린 것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마신 술병이며 집에서 사용하다 내다버린 의자 등. 한 마디로 이 향토유적 앞 도로변의 공간을 마을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화가 치민다. 아무리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간판을 걸어 소개하고 있는 향토유적 앞에 수북하게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 있단 말인가? 용인시나 원삼면 관계자는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할 줄 알면서 관리는 할 줄 모르는 것일까? 쓰레기를 쌓아 놓은 지 하루 이틀이 아닌 듯한데 한 번도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문화재란 지정만 하고 관리를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기 일쑤이다. 관심을 갖고 꾸준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문화재이다. 그런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하고 있다니. 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정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관리이다. 비록 향토유적이라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삼층석탑 앞 도로변에 가득 쌓인 쓰레기를 보면서 관계당국이나 지역주민들의 의식수준을 알만하다. 용인시 관계자는 하루 빨리 이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여 다시는 이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지 않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어있는 미륵당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곳이다.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지역의 문화재는 계획을 세워 찾아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말이다.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떨 때 답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 우선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더욱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니기도 한다. 예전 파장동 미륵당을 찾아간 날도 바로 앞에 소재한 당집을 애매한 곳에서 찾아다니는 해프닝을 벌였다.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기 때문이다. 주변 주민에게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굳게 닫힌 문 꼭 이래야 하나?

 

19일 찾아간 파장동 미륵당.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쉼터가 조상되었다. 당집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 부르던 것을 누군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당명을 적은 게판을 달아놓은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미륵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머물다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수많은 미륵불을 조성한 것도 후천세계에 좀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중생이 기다리는 미륵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후백제의 견훤은 금산사의 미륵불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의 용화세계라고 주장했다. 태봉의 궁예도 자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햐여 두 아들을 협시보살로 삼아 직접 불경 20여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며 대중을 현혹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륵사상은 모두 후천세계를 바라는 민초들의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까치발로 들여다 본 당집 풍경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미륵석불을 만나보았기 때문에 자연 우리고장에 소재한 미륵의 형태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써 찾아간 미륵당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다.

 

파장동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 어렵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색칠을 해놓아 분간하기 어렵다.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토착민을 찾기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이미 마을을 모두 떠난 듯하다. 생긴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