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가면 반드시 들려야할 곳이 한 곳이 있다. 바로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갯배 도선장과 청호동인 아바이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는, 이제는 속초의 명물이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이기도 한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12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갯배. 이 두 가지가 청호동 주민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속초시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도선인 갯배는 거룻배이다. 이 갯배는 일제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운항이 되기 시작했다. 6,25 동란 이후에 함경도의 피난민들이 이곳에 움막형태의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호동에는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자꼬치마을, 신창마을, 정평마을 등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거주하던 곳의 이름을 붙인 집단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연간 20만 명이 이용하는 갯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갯배는 1988년에 새로 FRP35인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청호동 주민들은 무료로 이용을 하고 있다. 갯배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년간 15 ~ 20만 명이 이용을 하고 있다. 이 갯배는 편도 200, 왕복 400원을 요금으로 받고 있다. 12일이 방영되고 난 후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고 한다.

 

23(). 속초 중앙시장을 들러보고 난 후 갯배에 올랐다. 승객들이 갈고리를 들고 배를 움직이게 하는 철선을 잡아당기면서 이동을 하는 갯배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갯배의 운항을 지도하는 청호동 주민의 서슬 퍼런 야단이 있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붙어 똑바로. 그리고 거기 이리 나와 배 끌어

 

 

이건 상당히 강압적이다. 처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잘 못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불과 단 몇분 안에 건너가지만, 그 사이에 연신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재미로 아바이마을을 찾아가는가 보다.

 

아바이마을의 애환 갯배

 

사실 속칭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은 우리나라 최대의 피난민촌이다. 공산치하에서 억압을 받고 살고 있던 북한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지만, 정든 고향을 잊지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정착을 한 곳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청초호 바닷가 모래톱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빠르면 보름, 길어보았자 석달이라는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벌써 60년 세월을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갯배는 실향민들의 애환이 가득 담겨있다. 일제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생긴 도선인 갯배는 당시 부월리 2(청호동)과 속진(중앙동)이 맞닿아 있던 것을, 속초항의 개발을 위해 준설하면서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이 되면서 수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속초읍에서 갯배 한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갯배를 운영할 때는 트럭 한 대와 우마차 한두 대를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어업에 주로 종사를 하던 아바이마을의 어민들이 수복 후 사용한 배는 피난 당시 타고 월남한 범선이 창이배와, 강원도와 경상도의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오마리배가 주종이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던 배는 19590년대에 들어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속초시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하였다. 1963년에 양양군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이 되는데 이들 어민들이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주된 속초의 관광수입원이 된 아바이마을과 갯배

 

드라마 가을동화로 인해 일본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바이마을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거기다가 12일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기도 하다. 12일이 이곳을 거친 후 사람들은 아바이마을을 찾기 시작했으며, 아바이마을에도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닌 점차 관광객들로 인한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 년에 20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갯배를 이용하는 요금만 해도 연간 4,000만원이라는 수입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 이곳은 점차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가, 이제는 속초시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3일에 갯배를 타고 찾아간 아바이마을. 바닷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그맣게 꾸며진 찻집에는 연인들이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골목에 들어서면 장사를 하는 분들이 손님을 불러들이느라 시끄럽다. 슬픔의 상징인 갯배와 아바마을이 이제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 그동안 블로그라는 것에 정신을 빼앗겨, 밥은 먹지 못해도 블로그를 하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지가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물론 중간에 쉬기도 했지만. 이렇게 죽자사자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묻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항상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는 우리 문화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답사를 다니고, 그것을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리고 또 틈이 나면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누빈다. 하지만 꼭 문화재만을 적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들도 적어 나간다.

 

 

블로그의 힘, 그것은 블로거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블로그는 그저 내가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블로그라는 것에 대한 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그저 단순한 글을 적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블로그를 시작한 뒤 그리 오래지 않아서이다.

 

어느 단체가 행사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저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을 블로그에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메인에 오르고 나서,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터졌다. 단 한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조회 수는 순식간에 이십만이 넘었고, 댓글이 2,000개나 넘게 달렸다. 그런 블로그의 힘을 만나고 나니 글을 쓴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문화재 블로거. 참 요즈음은 시쳇말로 인기 더럽게 없다. 난 인기블로거가 아니다. 그저 꾸준히 글을 쓰고, 그것을 위해 전국을 누빌 뿐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젠 문화블로거라는 이름까지 하나 덤으로 얻었다. 문화블로거! 돈 안된다. 찾아오는 이도 없다. 그래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블로그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적고 있는 문화재와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 그것이 우리 문화재와 주변의 것들을 바꾸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쓰기 싫어도 글을 적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블로그의 힘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블로그가 무슨 힘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블로그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그 힘이라는 것은 블로거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 세 가지만 알아두면 된다.

 

첫째는 전문성이다. 한 가지 전문적인 것에 꾸준히 포스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새 전문적인 블로거가 되어 있다. 그것이 힘을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둘째는 지속성이다. 그저 쉬지말고 글을 쓰라는 것이다. 그것이 쌓였을 때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힘이 생기게 된다. 물론 그 힘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블로그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겠지만, 그 힘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글을 올렸는데도 바뀌지 않을 때는, 강도를 높여가며 글을 쓴다. 그 또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셋째는 현장성이다. 물론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 현장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문적인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저 꾸준히 현장을 찾아보고,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현장은 밖이 될 수도 있고, 안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나는 전문적인 블로거로 인정을 받게되고, 그 블로그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힘이 있는 전문적인 글을 쓰는 블로거. 멋지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블로그의 힘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바꾸었는데?

 

그렇게 묻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블로그를 하면서 나 스스로도 블로그가 이렇게 큰 힘을 갖고 있음을 몰랐다. 강원도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갔는데 주변에 잡다하게 담배꽁초를 비롯한 쓰레기들이 쌓였다. 그것을 블로그에 올리고, 다음 메인에 떴다. 그 다음에 그 문화재를 찾아갔을 때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주변은 깨끗이 정돈이 되어있고, 그 문화재에 상주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자주나는 길이 있다. 그것을 글로 적었다. 그랬더니 댓글이 달렸다. 해당 관철에서 예산을 세워 바로 조치를 취하겠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 죽음의 교차로가 바뀌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지역의 의원들도 바꾸지 못한 것을, 일개 블로거의 글이 바꾼 것이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블로그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 많은 문화재들을 찾아다니면서 소개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다. 이 추운 날에도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나서는 이유. 그것은 문화재를 찾는 이유도 있겠지만, 블로그의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을끼를 찾아보기 위함이다.(사진은 내용과 무관함)

요즈음을 SNS(Social Network Service) 시대라고 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 나름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러 파워블로거 등의 명칭을 붙인다. 사실 파워란 단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딱히 파워라는 명칭의 한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12() 오후 2, 수원시청 별관 2층 중회의실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블로거 20, 트위터 20, 페이스북 20명과 시청 직원들로 구성된 공직자 서포터즈 30명 등 모두 90명의 서포터즈와 수원시 관계자, 미디어 다음 관계자 등 100여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수원 SNS 파워 서포터즈 발대식>을 가진 것이다.

 

 

 시정 홍보 등 전방위적 SNS 활동

 

이들 SNS 파워 서포터즈들은 2013112일부터 1231일까지 일 년 동안 수원시의 시정성과 및 새로운 시책에 대한 홍보와 전파, 행사홍보 및 행사참여 후 후기작성, 재난 위기 사항에 대한 신속한 제보 및 대응요령 전파, 시민에게 유용한 생활정보 시정 지식 공유 등의 책무를 맡게 된다.

 

요즈음들어 뉴스보다 더 빠른 것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신속한 소식이다. 올해는 예년보다 많은 눈이 내렸다. 수원시의 경우 지난 해12월부터 올 1월까지 쉴새없이 눈이 내려 많은 곤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실시간으로 정보가 올라오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인해, 사람들이 정보를 알고 대처를 해 나가기도 했다.

 

 블로그 서포터즈가 된 온누리가 염태영 수원시장에게 기자증을 수여 받은 후 악수를 하고 있다(위) 축하말을 하는 염태영 수원시장(아래)

 

전국 최초로 전방위 서퍼터즈단 운영

 

염태영 수원시장은 SNS 서포터즈 발대식의 축하 말에서

 

지난 해 수원은 여자축구단 문제로 인해 많은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잘 못 전해진 정보 때문에 야구단을 위해 여자축구단을 없애려 한다고 소문이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한 적이 있다. 인터넷상에서 그렇게 순식간에 퍼져나간 소문이 바로 SNS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 경우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대처를 해 주어야만 한다. 잘못 된 정보 하나가 시정을 운영하는데 있어, 막대한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며 서포터즈들의 적극적인 시정 홍보 등에 첨요할 것을 당부했다. 이날 90명의 서포터즈들은 각각의 분임토의에서 원활한 활동을 하기 위해 임원진을 선정했으며, 그들과 함께 유대관계를 가져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기로 약속을 했다.

 

 아래는 발대식을 마친 수원시 공무원 서포터즈들이 시장과 기념촬영을  

 

이날 수원시 SNS 서포터즈에 선정이 된 한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인 줄 몰랐다. 내용을 알고 보니 우리들이 수원을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듯하다. 시정을 홍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SNS를 통해 재난 등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에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재미로 SNS를 이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 수원이 더 살기 좋은 고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2시간 정도에 걸친 발대식이 끝난 후 수원시의 한 관계자는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대단위 서포터즈 발대식을 가진 것은 우리시가 처음일 것이다. 앞으로 이 서포터즈들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것도, 지금은 우리가 알다시피 SNS가 이 시대의 홍보매체 중 가장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 수원시 서포터즈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우리 수원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것을 수원시민은 물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고 했다.

2102년 일 년 동안 참 무던히도 수원의 곳곳을 누볐습니다. 때로는 새벽 6시에 쓰레기 소각장을 뒤지기도 했고, 때로는 불볕더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화성을 따라 걷기도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장맛비가 쏟아지는 성 밑 길을 돌면서, 카메라가 젖을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인가를 수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그것을 수원시의 홍보지인 ‘e-수원뉴스’에 기사를 올렸습니다. 아마도 지난 한 해의 몇 달 동안 그렇게 열심히 취재를 한 적은 흔치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한 달이면 20건이 넘는 기사를 쓰면서 수원시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벽화골목을 돌면서 그 숱한 사연을 블로그와 e수원뉴스 등에 글로 남겼습니다.

 

 

파워소셜러 팸투어가 근간

 

그러다가 2012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통영으로 시민기자 팸투어를 다녀왔습니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의 자격으로 다녀 온 팸투어로 인해, 11월에는 8도의 파워소셜러 팸투어를 수원에서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 팸투어에는 내로라하는 블로거들이 함께 참여하여, 수원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 열심을 보아서인가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에서 12월 초에 연락이 왔습니다. 수원시 시민기자로 뽑혀 12월 31일 종무식에 수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나보다 기사를 잘 쓰고 일 년 동안 더 열심히 한 시민기자들이 많은데, 왜 그 상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으라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상금이 있거니 없거나를 떠나서, 지금 내가 생활을 하고 있는 곳에서 그만큼 입지를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월 31일 오후 3시에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좀무식에는 수원시의 각계각층의 수상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단 2명에게 주어지는 시민기자상

 

수원시에는 현재 180명 정도의 시민기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동 시민기자’와 ‘사는 이야기’에 진솔한 이야기들을 올립니다. 저야 물론 늘 쓰는 것이 현장을 다니기 때문에 ‘출동 시민기자’에 글이 올려집니다. 때로는 e수원뉴스 편집주간의 부탁으로 현장을 나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런 점이 가산점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각 분야별로 나가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그 틈에 끼어 상을 받는다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0명의 시민기자 중에 단 두 명 만이 받는 상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린 옛날 상을 받고난 뒤에, 잊고 있었던 까마득한 생각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고요.

 

호명을 받고나서 무대로 올라섰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줍니다.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상을 받고나서 제 자리로 돌아와 상장을 봅니다.

 

표창장 제2129호

수원시팔달구 지동

시민기자 하주성

 

귀하께서는 수원시 시민기자로써 인터넷신문을 통한 활발한 시정참여와 홍보활동 등 시민과의 소통과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 노력함으로써 『사람이 반가운 휴먼시티 수원』 만들기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2년 12월 31일 수원시장 염태영

 

 

이제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지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수원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블로그와 오마이뉴스, e수원뉴스 등에 꾸준히 기사를 썼기에 이런 상을 수상했나 봅니다. 그저 혼자 지나쳐버려도 될 일이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함께 해 준 이웃 블로거님들(파워소셜러) 덕분에 이런 상을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소식을 전합니다.

 

2013년 한 해 모든 이웃님들의 생활에 날마다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팸투어에 달려와 주신 이웃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2013년 설을 맞이 하기 전, 또 다시 만나뵐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임진왜란과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찬탈해간 숫자는, 아직도 어림잡아 계산을 할 뿐이다. 그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그저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수보다 많을 것이라는 막역한 추측을 할 뿐이다. 2003년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과 열강이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합쳐 20개국에 모두 75,226점이라는 것이다.

 

그 중 일본이 가져간 것은 34,157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사를 할 수 있는 문화재의 숫자일 뿐, 실제로 고서화 등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문화재를 수탈해간 아픔의 흔적이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등록문화재’로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의 우리문화재 찬탈의 흔적

 

등록문화재 제182호. ‘구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이 건물은, ‘발산리 금고’라는 명칭으로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이 되었었다. 그 후 <군산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군산은 우리에게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한수 이북과 경기, 호남, 강원도, 그리고 충청권의 많은 소중한 문화재들이, 이곳 군산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간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런 일본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야한다고 주장들을 했지만, 그것도 우리 역사의 한 일면이라는 점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 아마도 이런 문화재 찬탈의 장소인 창고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 사람들이 알게된다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창피한 과거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픈 역사를 갖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창피하다고 가리고 숨긴다면 그 아픔은 잊을 수가 있겠지만, 또 다시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마타니 귀중품 창고, 그 아픔을 보다.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그 우측 뒤편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일본으로 반출을 하기 위해 전라북도 인근에 있는 석조문화재들을 시마타니 농장으로 옮겨 와 보관을 한 것이다. 이 석조물들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학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3층의 창고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인 시마타니 농장의 귀중품 창고이다. 이곳 금고에 보관한 귀중품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재들이었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지은 농장의 금고이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장본인이다.

 

 

이 금고형 창고는 모두 3층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1층은 반 정도가 땅 속에 묻혀있어, 반 지하로 꾸몄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에는 층마다 좌우편에 작은 창을 내었는데, 철장을 지르고 그 겉을 철문으로 꾸민 이중의 문이다. 이렇게 창고 하나를 금고형으로 지어 놓은 것은, 그 안에 시마타니가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아픔이 있는 시마타니 금고

 

학교건물 쪽으로 난 이층에는 미국에서 수입을 했다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금고 안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 철제문이 달려있는 곳은 이중으로 건물이 지어졌던 것 같다. 금고 문 위로 보면, 벽에 건물을 잇대어 지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토록 단단하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서화나 도자기 등 창고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이 금고에 보관을 하고, 부피가 큰 석조물들은 야외에 두었다니 도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쇠창살 안으로 1층 안을 들여다보니 꽤 넓은 공간이다. 그 한편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층에 낸 금고의 문은 쇠사슬로 묶어놓아 안을 볼 수가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건물 외벽으로 난 창을 보면, 안으로는 창살을 대고 밖으로는 철제문을 달아 이중으로 보안장치를 했다. 그만큼 우리 문화재를 수탈해가면서 보호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국전쟁 때도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인민군들이 옥구지역의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재가 사라져간 곳. 그 주위를 돌면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당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어,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든다. 더구나 이 건물이 학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더 고맙다. 적어도 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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