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참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한 분야에 미쳐 30년 세월을 살아왔다면, 아마 장인이란 별명을 들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명칭보다는 그저 기자’, 아니면 블로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222일 오후 2시 경,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소재한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그 30년의 정점을 찍었다.

 

오마이 뉴스 게릴라 명예의 전당 오름기자상’. 거창하니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은 기사 1,000건 이상을 송고하고 그 기사가 채택이 되면 주는 상이다. 기사 1,000건이야 누구나 쓸 수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 기사 1,000건이란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앉아서 쓴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장을 발로 뛰어 쓴 기사이기 때문에, 그 어느 상보다도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시상식. 동행을 한 지인이 촬영을 했다

 

몇 번이고 멈추고 싶었던 역마살

 

30년간의 답사. 솔직히 그 동안 몇 번이나 멈추고 싶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무속인인 아우 녀석이 형은 사주에 지독한 역마살이 끼었어요. 아마 70이 넘어야 멈출 것 같아요라고 한 말이 어찌 그리 잘 맞는 것인지. 어려울 때마다 몇 번이고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저 생각만으로 그쳤다. 또 다시 카메라를 들고 길 위에 서 있고는 했으니.

어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방안을 둘러본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장서에 가득한 문화재답사를 하고 정리한 CD뿐이다. 저것이 그간의 산물이다. 그 하나하나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고 하면, 남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답사를 하면서 흘린 땀은 알겠지만, 웬 눈물까지라고 말이다.

 

 

깨진 카메라와 너덜거리는 등산화

 

남들처럼 돈을 벌어가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30~50만원이라는 엄청난 경비가 들어간다. 어디서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바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주머니가 빌 때까지 돌아다닌다. 돌아오면 녹초가 되지만, 그때그때 정리를 하지 않으면 글을 쓸 때 감을 잊어버리게 된다. 아무리 피곤해도 정리를 마쳐야 자리에 든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깨진 카메라가 몇 대인지 모른다. 겨울에 눈길에 산을 오르다가, 아니면 여름철 억세게 퍼붓는 장맛비 속에서 바위를 오르다가 미끄러져, 살이 터지고 찢긴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셀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픈 것은 바로 망가진 카메라이다. 찢긴 살이야 약 바르고 싸매면 되지만, 망가진 카메라는 그럴 수가 없다.

 

그것도 산꼭대기까지 올라 사진을 찍고 나서 깨졌다면, 사진이라도 남는다. 하지만 바로 눈 앞에 문화재를 놓고 미끄러져 깨졌다면, 모든 것이 시쳇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몇 시간을 헐떡이며 올랐는데, 그리고 바로 코앞에 문화재가 보이는데 거기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만들어 진 기사들이기 때문에, 난 이 상이 어떤 이들이 받는 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

 

아우 녀석이 한 말이 70까지는 다닐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5~6년은 더 다닐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더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늘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 심적인 부담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란 칭찬이 아니다. 더욱 부추길 뿐이다. 그것은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하나의 당근일 뿐이다. 그래서 또 다시 마음을 정리한다. 물가가 올라서인지 요즈음은 예전 같지가 않다. 답사를 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간다. 남들처럼 누군가 후원을 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여기저기 기사를 쓰고, 그것을 모아 답사를 다녀야만 한다. 그래서 주머니는 늘 비어있다.

 

하지만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글을 읽어주는 것도 아니다. ‘문화재답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늘 그렇게 생각을 해왔다. 어느 날 길 위에서 만나게 되면, 그저 눈인사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만금보다 소중한 활력이 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상(사실은 채찍이지만)을 준 오마이뉴스와, 기꺼이 시상식까지 동행을 해준 지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http://rja49.tistory.com/entry/육송정은-어데-두고-홍교만-남았네라

 

아침에 요런 글을 하나 송고했습니다

연히 뷰에 송고가 되었을 것으로 알았죠

그런데 없습니다. 제 글이

분명히 첫번째 송고를 6시 20분에 했는데

다음에 볓번이고 해 보았지만 그넘 손가락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딴 분들 글이 다 송고가 되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사진들이나 보세요

 

 

요 아래 그림이 화면 캡쳐입니다

틀림없이 있는데 주소를 누르면 삭제된 글이랍니다

맨 아래 글 페이지 숫자 2를 누르면 또 나타납니다

요술방망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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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만 명 이상이 민족의 대이동을 했다는 계사년 설 연휴.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설은 명절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다. 명절 때가 되면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명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절이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직업 때문에 고향을 찾아가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것은 자신이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설날인 10일 하루 동안 찾아 본 그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이다.

 

 

3년 째 보지못한 가족, 체취라도 맡고싶어

 

서울을 올라가려고 수원역을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고행을 찾아 기차를 타려고 역사 안이 시끌벅적하다. 그 한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보따리를 하나 곁에 두고 하염없이 기차를 타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눈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이 보인다. 곁에 가서 괜히 이야기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씨가 추울 거라고 하더니 좀 풀렸네요.”

담배 피우세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시죠.”

 

흡연구역으로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지를 않는다. 가만히 보니 담배가 없는 듯하다. 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고향이 어디세요?”

“......”

그런데 고향에 안 가세요?”

벌써 가족들을 보지 못한지 3년이 넘었네요.”

 

고향조차 말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부도를 내고 말았다는 김아무개() 고향을 갈 수도 없고, 전화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역에 나와 이렇게 사람들이 고향을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면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체취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란다. 그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나 역시 한 때 가족들과 떨어져 수많은 날을 그리움으로 지새보았기에,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맞는 어르신은 왜 혼자였을까?

 

명절 전인 8일 재래시장을 취재하러 나갔다. 취재를 마치고 일부러 남수문을 돌아 화성을 좀 걷고 싶었다. 창룡문 쪽을 따라 성 밑 길을 걷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 어르신 한 분이 성 밑돌에 앉아계시다. 이 추운데 왜 저곳에 계신 것일까?

 

어르신 이 추운데 왜 거기 계세요. 고뿔드시겠어요.”

갈 데가 없어

집이 없으세요?”

아니 잔 집은 있어. 그런데 장에 나온 사람들 구경하느라고

그럼 장으로 가서 보셔야죠.”

장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더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시는 어르신. 혼자 생활을 하시는 홀몸어르신이라고 하신다. 아들딸이 있지만, 벌써 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다고. 어쩌다보니 혼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어르신, 더 이상을 물을 수가 없다. 언제인가 방송 일을 할 때 양로원에 계시던 분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주소도 모른다. 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들의 이름도 모르신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무엇인가 방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쓰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손가락 글씨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귀여운 손자손녀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절이 되면 더 슬픈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명절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정부가 들어서고 최우선이 서민들의 복지라고 한다.

 

과연 이 새 정부가 온전한 복지를 이루어낼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올 계사년 추석에는 제발 이렇게 혼자서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설날 한국민속촌의 모습입니다.

통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난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태어난 고향이 이북도 아니다. 부모님들의 고양 역시 그곳이 아니다. 철책 너머 북녘 땅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와서 북녘 땅만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눈물이 흘러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일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2일과 3, 12일로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과 속초를 다녀왔다. 모임이 있어 그곳에서 합동으로 다녀 온 답사 길이다. 그 첫 번째 돌아본 곳이 바로 통일전망대였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망대를 들어가기 위해 출입신고를 하고, 군인들이 차량을 일일이 조사하는 민통선을 넘었다.

 

 

통일전망대, 왜 가슴이 아픈 것일까?

 

통일전망대 앞에 섰다. 계단 밑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아마 안보교육이라도 받는 것인가 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전망대를 피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북녘 땅을 바라다보고 있는 대불(大佛)과 성모상이 있기 때문이다.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이상하게 이곳에 서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는 했다.

 

바닷물이 참으로 깨끗하다. 쪽빛바다라고 하던가? 그 깨끗한 물은 남북을 마음대로 오간다. 남쪽에서 날아온 새 한 무리가 북녘 땅으로 들어갔다. 철책을 넘어서. 저 새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남북을 오간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자유로운 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갈 수 없는 삼일포, 꿈이라도 꾸었다면

 

관동팔경, 통천의 총석정,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고성의 삼일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이 중 북한 땅이 된 고성에는 삼일포가 있었다. 삼일포는 신라 효소왕 때 국선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네 명의 국선이 절경에 반해, 3일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던 때에는 금강산 관광을 통해 삼일포역으로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인해, 오고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500m 거리에 있다는 군사보호지역인 비무장지대, DMZ(demilitarized zone) 저편에 보이는 북한군의 초소가 지척이다.

 

고성을 저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있구나.

이글을 쓴 사선은 어딜 갔는가?

여기서 사흘을 머무른 뒤에

또 어디 가서 머물렀던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고?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중 삼일포를 노래한 시이다. 그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3일이나 그곳에서 묵었을까? 그런 절경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느끼는 이곳. 통일전망대 성모상 앞. 북녘 땅에서 넘어오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차마 망원경을 못 보겠소.

 

그렇게 하염없이 지척에 있는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양 볼에 눈물이 흐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먼일 있소? 왜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

 

함께 한 일행이 묻는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날이 좋은 날이면 일출봉, 신선봉, 옥녀봉 등을 육안으로도 바라다 볼 수 있다고 하는 이곳 통일전망대. 성모상 앞에서 그렇게 이리저리 마음대로 오가며 모래톱을 긁어대는 물길을 바라다보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성모상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뒤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의 한마디 말이 오장을 긁는다.

 

얼른 통일이 되던지, 금강산이 열리던지. 정말 장사 안 돼 못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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