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현장을 돌아다닌지가 햇수로 30년은 되었나보다. 그 동안 전국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미쳤다'고도 이야기를 한다. 누구말마따나 처음부터 시작을 한 것이 참 묘하게도 굿판이었다. 무용음악을 작곡의뢰를 받아 작곡을 하다가, 우리 민초들의 정서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것이 바로 굿판이었다. 왜 굿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고는 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이나 지났다. 물론 처음에는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으는 것이 지금처럼 블로그를 하고,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각 지자체 등에서 의뢰를 받은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 한 곳에 들어가면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답사를 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기위해 수많은 시간을 현장답사를 다녀야만 했으니 말이다.

어제 박살이 나버린 렌즈. 배터리는 물속에 빠져버렸다.

답사 최악의 날이 되다.

때로는  산속에서 길을 잃어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고, 빗길에 몸이 모두 젖어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눈길을 걷다가 숨이 차고 손발이 얼어들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그 수많은 날들을 현장에서 가장 소중하게 챙기고 다니는 것은 역시 장비였다. 동영상을 많이 촬영하던 나로서는 그동안 동영상에 필요한 장비만 해도 수십번은 갈아 치웠을 것이다.

요즘에는 문화재를 많이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를 주로 사용을 한다. 산으로 들로 돌아치기 때문에 늘 장비를 신경을 써서 다루어도, 가끔은 고장을 내고는 한다. 오늘 오후 카메라를 챙겨들고 느즈막하게 모악산을 올랐다. 비가 오고나면 모악산 계곡에는 많은 폭포들이 생겨난다. 그 아름다운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 블로그에 올리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모악산 게곡을 따라 조금 오르다가 보면 '선녀폭포'가 나온다. 좀 더 아름다운 모습을 찍기 위해 가까이 들어갔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앗뿔싸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바위 위에 이끼들이 물이 찼다가 빠지면 기름칠을 한 것보다 더 미끄럽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두 다리는 허공으로 나르고 몸은 바위 위로 나가 떨어졌다. 

렌즈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재생불능이라고. 휴대폰으로 찍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카메라가 손에서 미끌어지면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놀라서 먼저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렌즈는 박살이 나고 배터리는 저만큼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배터리를 찾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또 미끌어졌다. 이번에는 된통 바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다니지만 창피한 것보다, 먼저 카메라가 박살이 난 것이 마음이 아파 어쩔줄을 모르겠다.

답사 30년만에 넘어지고 미끌어지기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렇게 박살이 날 정도로 넘어져 본적은 없었다. 남들은 답사를 다니는 나를보고 부럽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답사는 늘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거기다가 많은 문화재는 높은 곳에 자리를 한다. 때로는 몇 시간을 산을 올라야만 할 때도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재의 현장답사다.

오늘 최악의 답사를 하면서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어디 부러진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는 어떻게 하나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올것만 같다. 부서진 렌즈를 앞에놓고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몇 시간 째. 참 그동안 많이도 나를 도와주었는데.           

2년 전인가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락거리던 다음 블로그와 티스토리를 떠났다. 그리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재를 알리려면, 다음 뷰에 글을 송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은 것이 올 4월인가 보다. 티스토리는 개설을 해놓고도 글도 쓰지 않고 송고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당시 책을 쓰는데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정확히 이야기를 하자면, 술 마시기에 급급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한 달이면 10여 차례나 현장답사를 하면서, 쌓여만 가는 문화재답사 자료들을 보면서 한숨만 내쉴 수는 없는 일. 친분이 있는 블로거 한 분의 종용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라는.

한달 동안 60편의 글을 썼다. 매일 두편씩 쓴 것이다. 그리고 1,200개가 넘는 댓글을 달았다.
 
한 달간 송고한 포스팅이 60편

2010년 8월 2일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쌓인 글이 60편. 하루에 두 편 씩을 송고를 한 셈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을 쓰느냐고 한다. 현장 답사를 다니면서 쓰는 글은 앉아서 감상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게 깨진다. 하지만 문화재를 내 눈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느낌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힘이 들어도 현장을 나가 돌아다녀야 한다.

낮에는 근무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시간이 밤 밖에 나질 않는다. 점심시간을 잠시 이용해 전날 써 놓았던, 두 번째의 글을 올려놓고 부리나케 나가야 한다. 아니면 미리 예약송고를 해놓던지. 보통 두 편의 사진을 고르고 글을 쓰려면 두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그래놓고 이웃 블로거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하다가 보면 시간은 두 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그렇게 보낸 한 달이다.

어느새 이렇게 순위가 매개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노력을 따라 온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식 잘난 체는..’이란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바로 글을 그만 읽으셔야만 한다. 계속 그런 쪽으로 흘러 갈 수도 있으니. 처음 글을 송고하고 난 뒤 우연히 여기저기 다니다가 보니 순위라는 것이 있다. 굳이 순위를 매겨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 9287위>란다. 두 편의 글을 송고하고 난 뒤니, 적어도 그 앞에 글을 쓰시는 분들이 그만큼은 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다.

순위 매김에 마음을 쓰는 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한 번씩 드려다는 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400 등으로 올라 있다. 아마 현장을 다니면서 쓴 글이고 전통문화를 쓰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다음 측에서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블로그에 매달려 살았다.

순수문화의 글을 쓰는 분들이 많지가 않아 오히려 득이 되었다.

난 한 달 동안 이렇게 치열한 싸움을 했다.

처음 글을 송고하면서 15편의 글을 쓸 때 까지만 해도 베스트에 걸리지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15번 째 글이 열린 편집 베스트에 걸리더니, 그 뒤로 하루에 두 편의 글이 모두 베스트에 걸리기도 했다. 순수문화를 쓰는 블로거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글을 자주 쓰는 나로서는 그것이 득이 되었던 것만 같다. 하지만 추천이나 구독은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하루에 고작 100 ~ 200명이 들려가는 곳일 뿐이다. 추천은 많아봐야 40 ~ 60 정도이니, 내가 찾아간 분들의 절반 정도뿐이다.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노력을 한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나름 무수한 블로그를 방문을 했다. 그들이 오건, 오지 않건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 물론 티스토리를 떠날 때 황금펜을 갖고 있었으니, 그도 다시 돌아와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찾아보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올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 뿐이다. 지금도 난 아침이면 거의 100명에 가까운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추천을 하고 댓글을 단다. 그러면 내 글에도 추천이 100개는 기본적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다녀도 고작 30% 정도만이 답방을 오는 정도이다.

티스토리와의 기나 긴 싸움이다. 아니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전쟁이라고 해야 옳다. 난 요즈음 세대들이 이야기하는 컴퓨터의 기능조차 모른다. 그저 사진을 작업하고 그것을 글을 써 올리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물어물어 하면 된다. 우리 문화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볼 수가 있다면, 난 그것으로 다시 시작한 티스토리의 덕이라는 생각이다.

현장을 찾아다니는 답사글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 하다. 다음측의 배려도 고맙다.

이렇게까지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것도, 알고보면 매일 거르지 않고 들려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알음부터 지금 새롭게 알아가는 모든 분들의 힘이 되는 그런 글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의 공은 모든 그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야 말로 문화재에 대한 글은 쓰지 않아도 나와 함께 우리 문화를 답사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진정한 전도사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여주장. 그냥 여주에 있는 장이 아니고, 500년 긴 성상을 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이다. 2009년 10월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시작해, 2010년 6월 더위가 막바지로 치솟고 있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5일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가을부터 여름까지 4계절을 장에서 지낸 셈이다. 그렇다고 장돌뱅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다

여주는 전통 있는 고장이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여주는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부한 농산물에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주변의 도시와는 달리 여주는 목(牧)을 둘 정도로 큰 도시에 해당했다.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이 중 여주에 이포와 조포가 있을 만큼 여주는 수운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이러한 여주의 5일장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기위해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료라고 나온 것은 다만 몇 줄에 불과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9개월의 여주 5일장 순례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여주 5일장은 독립운동의 시원지

여주 5일장. 그냥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여주 5일장에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난 뒤, 여주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유림을 위시한 많은 여주사람들은 일제에 항거를 시작한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본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여주장에 숨어들어 일본군 등 50여명을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주의 마을들이 일본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3, 1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13도 의병 총사령관을 여주 출신 이인영대장이 맡기도 했다. 결국 여주 5일장은 구국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주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

여주 5일장을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외에도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세상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부부장꾼, 비가오나 눈이오나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명 안되는 단골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멀리 꿈을 안고 이국으로 와 피곤한 삶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는 이주노동자들. 손톱이 다 뭉그러지도록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 대물림인 뻥튀기를 하는 어느 분의 이야기. 그 안에 삶의 모습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장으로, 도독은 마을로’

5일장은 인정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5일장으로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마을은 텅 비어버린다. 장으로 다 나가기 때문이다. 꼭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5일 동안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친하지 않아도 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5일장이다.

여주 5일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접고 또 접었다. 한정된 페이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 중에서 이야기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9개월의 작업 끝에 작은 책자 하나를 펴들었다. 『500년 세월의 여주 5일장』 비록 책은 볼품이 없지만 땀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주 5일장’ 책 안에는

이 책 안에는 5일장의 의미, 5일장의 역사, 5일장의 기능, 그리고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5일장 책을 집필하면서 느낀 한담을 적은 ‘강한루 마루에 땀을 식히다’로 되어 있다. 발품을 수도 없이 팔아 만들어 진 책이다.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컬러사진 한 장 넣지 못했다. 한정판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없다.



21번째 쓰는 책이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만큼 다리품을 팔아야만 했다. 손이 얼어오고, 몸에서 쉰내가 날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손에 받아 든 책이다. 이것이 여주 5일장의 모두는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여주 5일장이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500년 세월의 여주5일장’

발행일 : 2010년 6월 25일
발  행 : 여주문화원
발행인 : 이 난 우
지은이 : 하 주 성
디자인 : 김 금 자
비매품, 한정판 158쪽

(주) 이 책은 비매품 한정판이므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혹 꼭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제 방명록에 비공개로 받으실 주소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6분께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블로그를 접한 것은 2005년인가 보다. 그 전에는 플래닛이라는 것을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가 블로그를 하게 되고, 그 재미에 한참이나 빠져 있었다. 아마 블로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접하게 되고, 더 많은 지식을 얻기 때문이었나 보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 아픈 일도 많았다. 그러나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다음뷰에 송고를 하면서(그 때는 다음 뉴스였었던 것 같다) 쌓여가는 자료들을 보고, 그나마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2006년 3월에 19번 째로 황금펜촉을 달았다. 

블로그를 접고 난 후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에서는 황금펜촉이라는 것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지금도 베스트 블로거라는 황금펜촉이 있지만 당시의 황금펜촉은 남달랐다. 그만큼 황금펜촉 달기가 어려웠다는 생각이다. 2005년 12월부터 베스트 블로거인 황금펜촉을 단 블로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내가 2006년 3월 마지막 주에 달았으니 당시 베스트 블로거인
황금펜촉을 단 블로거로서는 19번째로 황금펜촉을 단 셈이다.

지금 보니 428명의 베스트 블로거들이 있으니, 내 뒤로 꼭 400명이 더 황금펜촉을 단 셈이다. 당시에는 베스트 블로거들의 글도 많이 올라왔지만. 오프라인에서의 블로거들도 상당히 친근하게 지내고는 했다. 물론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 무슨 일이 있으면 블로거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흔쾌히 함께 해주고는 했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그렇게 열심이던 블로그를 하루아침에 삭제를 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 주위에서는 삭제는 말고 중단만 하라고 권유를 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완전 삭제’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에도 다음블로그와 티스토리에서 모두 100대 블로거 중에 포함도 되었고, 블로거상 후보에 까지 오르기도 했으니, 삭제를 하면서도 그 아픈 마음을 누가 알고나 있었을까?

이제 두 번째 황금펜촉에 도전한다.

2008년 초에 블로그를 삭제를 하였으니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그때만 해도 50대라고 박박 우기고 살았는데, 이제는 환갑을 넘어버렸다. 만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블로그를 시작한다. 물론 블로그는 삭제를 시켰지만 아이디를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도 엄연한 황금펜촉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그 황금펜촉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블로거들은 왜 그 아이디를 안 쓰느냐고 성화다. 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시작하려고 한다. 늘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모처럼 돌아 온 블로그의 세계가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다양하던 다음뷰의 많은 글들이 한편으로 치우쳐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써오던, 그리고 앞으로 써가야 할 문화재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몇 사람이 읽어준다고 해도 좋다.

아직도 블로그를 운영하던 아이디는 황금펜촉을 달고 있다.

환갑이 지나서 다시 시작하는 블로그. 그리고 두 번째 도전하는 황금펜촉. 나에게는 이 두 가지만 있어도 즐겁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황금펜촉을 다는 날은, 코가 삐뚤어지게 막걸리를 마시겠다고 미리 작정도 해본다. 늘 도전하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이 곳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2009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300 여개의 기사를 옮겨놓는 것으로 시작하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적어가려고 합니다.

정자기행
'바람 정자 위에 불다'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정자들을 둘러보면서 적은 글입니다. 정자에 얽힌 이야기와 나그네가 정자를 보고 느낀 것들을 적는 곳입니다.

고택답사
'고택을 따라 나서다'는
중요민속자료, 문화재자료와 비지정인 옛 고택들을 둘러보면서 그 안에 내재된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고택답사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은 거의가 잠겨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마음대로 돌아볼 수가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애불답사
'천년 마애불의 미소'는
마애불을 따로 모았습니다.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 등에 조각한 불상을 말합니다. 대개는 선각이나 돋을새김을 하는 마애불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조들의 한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천년세월 그 자리에'는 천연기념물과  기념물, 고목 등을 모은 곳입니다. 답사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천연기념물에 대한 생각이나 모습 등을 담았습니다.

유형문화재
'기억해야 할 것들이'는
석불, 석탑, 부도, 석교, 석실, 선돌, 고인돌, 동종 등 문화재 등을 다루는 곳입니다. 수많은 문화재들을 일일이 구분을 지을 수가 없어서 이 곳에 모았습니다. 

역사의 흔적
'걸어도 매번 그 자리'에는
절집, 사지, 향교, 서원, 성곽 등의 답사내용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 하나가 더욱 재미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곳,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를 봅니다.

풍물이야기
'이런 것도 있었다네'는
예전 우리 생활 속에 있던 사물을 현대에 새롭게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스라히 잊혀져 가는 정겨운 모습들입니다. 옛 풍물을 비롯해 장승, 당집,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놀이나 도구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사람이 사는 세상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보고 들은 것을 적는 곳입니다. 이 곳은 '여주 5일장' 책을 쓰기 위해 9개월 동안 여주장을 돌아보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는 곳입니다. 때로는 애환도 있고, 때로는 진한 고통이 있기도 하지만 사람사는 세상이 다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지역축제
'가보자 축제 한마당'은
지역의 축제를 돌아보면서 그 모습들을 올리는 곳입니다. 그저 즐거운 모습만이 아닌 지역축제의 문제점들을 함께 다룰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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