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2시경 팔달구 지동 창룡문로 58번길 일대에 30여명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는 삼성이라는 마크가 보였다. 지동 골목길에 4년차 마련하고 있는 벽화골목의 조성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돕기 위해 온 일행이다. 이날 지동을 찾은 삼성전자의 일행은 삼성전자 네트워크업무 상품전략 그룹의 연구원들이다.

 

오늘 저희들은 30명 정도가 봉사를 하러 왔어요. 저희 심성전자에서는 봉사프로그램이 있어서 각 연구팀마다 봉사를 다니고 있어요. 저희들은 회사에서 봉사를 할 프로그램을 알려주면, 그 중에서 택해서 봉사를 하게 되죠.”

 

 

 

이날 상품전략 그룹의 연구원을 인솔하고 지동으로 찾아 온 곽민정(, 35) 과장의 말이다. 곽민정 과장은 이번에 지동 벽화골목에 봉사를 하러 온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난 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 지동에 들려 벽화를 보고 가기도 했다고. 그래서 이번에 봉사를 지동으로 정했다고 한다.

 

지난 해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어요. 골목마다 그려진 그림들이 너무 예뻐서 이곳에 와서 꼭 한 번 봉사를 하고 싶었어요. 오늘 이렇게 와서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는 800m 조성할 예정

 

그동안 지동의 벽화골목은 매년 정해진 거리를 그림을 그려나가 지난해까지 3년 동안 1.6km의 벽화길이 조성되었다. 올해 800m를 조성하면 2.4km로 벽화골목이 늘어나게 된다. 전국 최장의 벽화골목이다.

 

올해 저희들이 조성할 800m의 벽화골목은 한글 골목에 입히다라는 주제를 갖고 벽화를 그려나갈 계획입니다. 앞으로 3년을 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 3.6km의 벽화골목을 다 그리기 위해서는, 처음 5개년 계획으로 세웠던 것을 2년을 더 연장해 7개년 계획으로 변경을 했습니다.”

 

지동 벽화길 조성을 책임지고 있는 총괄감독 유순혜 작가의 말이다. 유순혜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내년부터는 1번 벽화골목을 보완하면서, 그동안 미진했던 부분들을 정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매년 테마가 있는 벽화길 조성할 것

 

내년부터는 수원 화성과 연계를 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저희 지동에 소재한 전통시장으로부터 창룡문까지 부분별 특색 있는 그림으로 화성과 연계를 하여는 것이죠. 전통시장 인근의 벽화는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고, 창룡문 인근은 손그림 위주로 그려나갈 예정입니다. 7년간의 벽화골목 조성이 끝나고 나면 3.6km라는 전국 최장의 벽화골목이 조성이 됩니다.”

 

그동안 지동 벽화골목 조성은 골목마다 테마가 있는 그림들을 그려왔다. 딴 곳처럼 화려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아이들에게 교육이 될 수 있고, 가족들이 찾아와 아람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조형물을 중간 중간 마련한 것이다. 거기다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동편을 끼고 조성한 벽화골목답게 화성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하였다.

 

 

 

 

저희 지동 벽화골목은 동화골목, 시 골목, 사계골목 등 다양한 테마로 마련을 했습니다. 도한 지동 벽화골목의 정점은 역시 제일교회 종탑에 마련한 노을빛 갤러리와 전망대입니다. 올해는 시골목과 연계가 되는 곳에 동화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 비탈길에서 골목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동 관계자의 말처럼 또 하나의 아름다운 벽화골목이 올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올해 벌써 두 차례에 걸쳐 160명이나 다녀간 삼성전자 연구원들. 그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크다.

 

5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수원천 위에 걸린 매향교로 파발마들이 달려왔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으로 납신다는 파발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세 필의 말은 그렇게 대로를 달려 행궁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뒤이어 많은 무리들이 행궁을 향해 열을 지어 행진을 했다.

 

218년 전 정조대왕은 개혁정신과 당대 과학의 힘을 집대성하여,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성을 축조했다. 이 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으며, 사적 제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사상의 산물이다. 강한 국권을 지향하던 정조대왕은, 가장 강한 군대인 장용외영의 무사들을 훈련시켜 이 화성을 지키게 만들었다.

 

 

수시로 화성 행궁으로 행행을 한 정조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 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궁 앞 상설 한마당 개막

 

5일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1795년 음력 윤 2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5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3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뒤이어 경기감사, 훈련대장 등 말을 탄 정조대왕 당시의 인물들이 지나고, 뒤편에는 말을 탄 정조대왕과 어머니인 가마에 오른 혜경궁 홍씨가 이어졌다. 주변에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행궁을 행해 가는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외국의 방송사들까지 촬영에 열심이다.

 

정말 멋있습니다. 이런 행렬은 수원이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 합니다. 정말 행복하네요.”

 

길에게 어가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한 시민의 말이다. 이렇듯 행궁 앞 상설한마당의 개막일에 만난 정조대왕.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대왕의 백성사랑과 그 품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사적 제3,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보물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특이한 성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수원 화성. 이번에 화성을 돌아본 것이 벌써 7번째이다. 화성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 마디로 싸움을 하기 위한 성곽이긴 하나, 그것이 다가 아니란 생각이다.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파손을 가져왔으며, 여기저기 탄흔이 보이기도 한다.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원 화성.효심에서 시작되어 당파정치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그 결실을 보기 위해 축성을 한 화성.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화성이 꽃피는 계절을 맞이하여 꽃으로 치장을 하였다. 화성과 꽃, 화성을 돌다가 보면 주변에 핀 꽃들과 유난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리고, 들리면 곡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은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를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존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을 천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을 하였다.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상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두었다.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여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 반야(般若)2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금상(今上) 16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자리한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이 절은 현륭원의 건립과 때를 같이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다.

 

용주사의 각 부재의 사용이나 문양, 공간배치 등은 궁궐의 형식과 유사하다. 용주사는 창건 당시 140여 칸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창건당시의 규모나 형태가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는 18세기 말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려한 장식의 대웅보전

 

용주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존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35호이다. 대웅보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내부와 외부를 모두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규모는 정면 3·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로, 사일스님이 팔도도화주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주련 글귀는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 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 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 총섭이 중수하고, 1931년에는 주지 강대련이 1965년에는 주지 전관응이, 그리고 1987년 주지 서정대가 수리하였다.

 

융릉과 동일한 양식의 대우석

 

대웅보전의 기단은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다. 대우석은 일반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나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과 비운, 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이 대우석의 문양으로 보아 용주사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다. 대웅보전의 창호는 빗살꽃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의 전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젖혀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닫집을 조성해

 

대웅보전의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과거에는 불전(대웅전)에는 참배객이 들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으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으며 불단과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대웅보전의 기록으로는 홍천호가 찬한 대웅전상량문, 닫집내부에서 발견된 대웅보전 원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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