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번지에 소재한 정용채 가옥은,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안의 짜임새가 돋보이는 집이다. 조선조 말기에 지어진 살림집인 정용채 가옥은 뒤편에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삼태기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50여 칸으로 꾸며진 이 집은 대문칸의 상량문을 통해 188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안채의 경우에는 그보다 앞 선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1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오는 동안, 원형에 가깝게 관리를 해온 집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ㅁ자형의 구조, 공간 배치가 뛰어나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좌측으로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고, 들어서면서 우측으로는 부엌과 방을 드렸다. 좌측으로는 방을 드려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행랑채는 14칸 정도의 규모로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줄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 자형의 안채와 쪽문으로 연결을 하였다. 부농의 집답게 행랑채는 각종 광이며 곳간 등을 두었다.

 

대문채와 떨어져 지은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바라보면서 우측에 대청을 두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남쪽 두 칸 방 뒤편에 안채 대청과 연결이 되는 복도를 두었다는 점이다. 번잡하게 식솔들의 눈을 피해 사랑에서 바로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명확하게 짓고 있으면서도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 집의 구조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안채의 날개채 부분과 행랑채가 맞닿아 있고, 중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폐쇄적인 안채의 구성에도 채광을 생각해

 

안채는 ㄷ 자형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양편 날개채는 모두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중문을 두어 폐쇄적이다. 가운데 세 칸 대청을 마련하고 양편에 방을 두었으며, 날개채는 부엌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바깥마당으로 나가면 안채에 달린 남향받이의 방이 있다. 이는 폐쇄적인 안채의 공간 구성상 채광에 유리하도록 꾸민 것이다.

 

 

 

바깥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 등을 두었는데, 이 집의 특성상 폐쇄적인 안채를 벗어나 모든 실생활의 살림을 바깥마당에서 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마당에 접한 방 앞에는 마루를 두어 생활하기에 편리함을 꾀했다는 점도 정용채 가옥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폐쇄적이면서도 한 편에 여유를 부린 그러한 구성이다.

 

반듯한 가옥, 집안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마디로 정용채 가옥의 특징은 반듯하다는 점이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집안의 곳곳은 윤기가 흐른다. 마당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집안의 마루 등에도 먼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뒤편 바깥마당 우물에는 덮개가 덮여 있어, 이 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 보면 가장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행랑채 담 밖으로 나오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아래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중요민속문화재인 정용래 가옥이 보인다. 폐쇄적이면서도 실생활에 편리하게 구성이 된 정용채 가옥은,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배치수법이 뛰어나다. 구성에 있어서도 각 채별로 뚜렷하게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쓰임새에 따라 면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바깥마당의 공간이 나름대로 용도에 맞게 구성이 되어있고, 폐쇄성이 짙은 안채에 날개를 달아 채광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정용채 가옥.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꾸밈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하루 만에 3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진 수원지역은, 곳곳에 침수피해를 입기도 했다. 화성의 멸실된 구간을 복원한 남수문은 이런 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 6일 오후 찾아간 복원된 남수문 구간은, 여기저기 비에 이겨내지 못하고 흉물로 변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원천의 상류인 광교저수지의 물은 6일 0시를 기해 방류를 중단했지만, 정작 수원천에는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비에는 시간이 지나 굳어지지 않은 곳은 당연히 파이게 마련이다. 공사를 할 때는 그런 것도 염두에 두고 했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남수문 근처 곳곳에 문제점 발견

 

남수문 성 안쪽에는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 위를 걸어가는 행인이 뒤뚱뒤뚱 불안해 보인다. 낮은 징검다리 위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 장마 때를 대비해 조금 높게 징검다리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물길 양편으로 조성한 흙더미는 이미 다 파헤쳐져 남수문 안쪽으로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도 보인다.

 

물길은 전체를 흐르고 있는데, 단 한 곳뿐인 어도는 그야말로 말로만 어도일 뿐,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어 보인다. 이미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어도를 통해 내려가는 물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구간 수문 중에 양편 두 곳은 사람들의 통행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남은 칠간 수문에는 어도를 갖추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곳만의 어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식의 보여주기 위한 어도일 뿐이란 생각이다.

 

날림공사 흔적 역력히

 

공기를 마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집중 호우 등에 대한 대비를 아예 염두에 두질 않은 것인지, 남수문 복원 공사 구간에는 날림공사를 한 흔적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벽 밑에 심어 놓은 잔디는 이미 다 파헤쳐져 돌들이 다 들어나 보이는 흉물이 되어버렸고, 그 흙들은 여기저기 쌓여있다.

 

 

사람들의 통행로에도 어디서 밀려온 흙인지 시커먼 흙이 쌓여있다. 이런 것은 하수구에서 쏟아져 내린 듯하다. 아름다운 화성을 생각하면, 남수문 주변은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꼴로 변해버렸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그리고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복원한 남수문. 비가 오는데 걱정스럽게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민 조아무개(남, 68세)는 답답하다고 한다.

 

 

“남수문은 두 번이나 홍수에 파손이 된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이번 장마에 또 어떤 변고가 있을까 궁금해 보러왔는데,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홍수에 대비를 해 단단히 지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변 조경공사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내렸다고는 하지만 장마철이 이제 겨우 시작을 했는데 저렇게 망가질 수가 있나요? 국민들이 낸 세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는 공사 책임자에게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죠.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나와 보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현장을 살펴보아야죠.”

 

그러나 이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더 이상 훼손이 되는 것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공사를 했으면, 이런 수고로움은 덜 수 있었을 것을. 아름다운 화성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했다는 남수문. 그 복원된 남수문이 하루의 집중호우로 인해 주변이 온통 볼썽사납게 변해버린 모습이 마음이 아프다. 그저 아름다운 남수문으로 영원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는 아마도 북수문인 화홍문과 더불어 물길을 지켜낼 수 있는 남수문이었을 것이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그런데 북수문이 일곱 개의 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아홉 개의 수문을 낸 것일까?

 

 

90년만에 복원 된 세계문화유산 화성 남수문의 성밖(위)과 성안(아래)

 

왕권의 상징이었을 남수문

 

아마도 남수문에 아홉 개의 문을 낸 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며, 꽉 찬 것을 의미한다. 왕의 복장 중 가장 품격이 높은 것이 ‘구장복’이고 보면 남수문은 왕권을 상징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북수문은 상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지만, 남수문은 팔달산 등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기 때문에, 그만큼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확보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북수문과 남수문은 1794년 2월 28일에 장안문, 팔달문과 동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남수문(위)와 1920년도에 촬영한 남수문(아래)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판다.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은 후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대석을 물리어 굳혔다."

 

난공불락의 조형물이었던 남수문

 

남수문은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9개의 수문 구간 위에는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다리의 길이인 동서 약 28.6m에 남북 3.6m의 검은색 벽돌로 꾸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을 내어 짧은 시간에 많은 군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장을 검은색 벽돌로 쌓아 57개의 총안을 내었다. 이 총포의 구멍이 수문을 향해 공격을 하는 적을 향하고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여장 역시 구간수문의 아치형에 어울리게 무지개형으로 조성하였다.

 

 

 

 일몰시간의 남수문 조명. 그 앞에 분수대만 있었더라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을...

 

또 하나의 명물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남수문 주변이 홍수로 떠내려 간 뒤 90년이 지난 올해 복원이 되었다. 물론 그 복원의 의미를 갖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어진 남수문이 다시는 홍수피해의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2차적인 것은 해당부서와 담당자들이 알아서 옛 남수문의 기능을 다시 되살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월 25일(월) 일몰시간이 지난 다음에 남수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간에서 아름다운 조명이 남수문을 화려하게 만든다.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동안 촬영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형미술이라는 화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 곳이었던 남수문의 야경이다.

 

 

촬영을 하다가 불현 듯 생각을 한다. 만일 저 앞에 분수라도 설치를 해서 그 분수에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참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재인청에 대해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는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던지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한 때는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집단

 

재인청은 무부(巫夫)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재인청의 수장은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의 선출은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사진 / 고 이동안 선생. 구글검색 자료 인용)

 

 

까다로운 규제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제 속에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끊임없는 학습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경기도 화성은 수많은 전통 예인들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 중에서 재인청을 기반으로 한 많은 예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해 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인간문화재이셨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14세 때 남사당패들을 따라서 부모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가출을 강행했다. 그런 가출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춤과 발탈로 한 생애를 보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학습을 한 예인이며, 다양한 끼와 재주를 발산한 스승이셨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서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글공부 마다하고 광대의 길로

 

12살 때까지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통감을 4권까지 배웠다. 아버지가 시키는 글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공부보다도 할아버지가 부는 피리나 젓대를 몰래 가지고 놀거나 어름타기(줄타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에 더 재미가 팔려 있었다.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그는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이동안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그는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14세의 어린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광대 수업을 받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됐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30여 종에 이른다.

 

(주) 살풀이 춤의 사진지료는 어려서 부터 이동안 선생에게서 직접 재인청 춤을 사사한 고성주와 문하생들

 

고 이동안 선생의 춤은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내노라하는 무용인들에게 전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동안 선생이 발탈로 지정을 받게 되자 많은 춤꾼들은 이동안 선생의 춤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운학 이동안 선생의 춤.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생애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그의 춤은 이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안의 재인청 살풀이

 

운학 고 이동안 선생에게서 옥당 정경파 선생에게 전승이 된 살풀이는 현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이다.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 경기살풀이는 두개의 수건을 이용해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승무와 함께 지정된 살풀이춤은 무속 음악 가운데 살풀이라는 무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경기도 재인청의 무부들은 원래 도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도살풀이를 추어왔다. 그러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처음에는 긴 천을 갖고 추었으나, 후에 그것을 반으로 갈라 두 개의 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원래 무당들이 신내기리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춤인데, 후에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 예술로 발전하여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살풀이춤은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복장에다 흰 수건을 가지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金入垂楊 玉謝梅(금입수양 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春水 碧於苔(소지춘수 벽어태) 봄 작은 연못의 물은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 誰深淺(춘수춘흥 수심천)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燕子不來 花未開(연자불래 화미개)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았는데.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인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달성이요,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최항은 그의 자형이다.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학문을 배은 서거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세종 26년인 144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인 1451년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인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45년간 6명의 왕을 섬긴 서거정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슬에 나아간 서거정은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세조 6년인 1460년에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과 시재를 겨루었다. 요동인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성종 7년인 1476년에는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성종 1년인 1470년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이 되고 달성군에 책봉되었다.

 

 

 

조선조 문인의 대표적 인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의 저술에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함께하였다.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와,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방이동서 이묘한 서거정의 묘

 

서거정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현재 봉담읍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도로변 우측,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번지에 소재한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0일 목요일 오후, 봉담읍에 소재한 서거정의 묘를 찾아보았다. 조선조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의 묘소 앞으로는 후손들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편에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었으며, 이 묘지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석은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썼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로 글자를 써넣었다.

 

 

 

축대 위에 지은 솟을대문의 앞에는 ‘전성문(展省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재실인 ‘염수재’가 있다. 염수재는 24평으로 염수재의 앞에는 ‘염수재기’를 적은 비가 놓여있는데, 비의 뒤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사가공 재실인 염수재는 서기 1976년도 이축하여 약 25년간 유지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오래되고 낡은 도가 지나쳐 고심하던 차에, 종산의 일부가 경부고속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그 보상금으로 1999년 3월에 옛 재실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실의 지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문호 서거정의 묘역

 

재실인 염수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히 비탈이 진 곳에 서거정의 묘를 맨 위에 둔 서씨일가의 묘역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서거정의 묘는 묘 앞에 세운 묘표와 좌, 우측의 문인석만이 옛 것이고, 남은 석물은 묘를 이전하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묘표에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서거정과 정경부인 선산김씨의 묘임을 적고 있다.

 

서거정의 묘로 오르는 길에 그 앞에 자리한 묘들을 보니, 봉분의 흙이 파이고 제대로 관리가 안된 듯하다. 서거정의 묘는 서울 방이동에서 이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묘를 이묘할 때 나온 묘지석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거정의 묘역은 당연히 화성시에서 관리를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근처의 공장 안내판과 함께 걸려있으며, 재실과 묘역 앞에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길가에 따로 서 있는 신도비의 앞에 퇴색이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묘소 안내문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의 묘역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대문장가요, 중국에서까지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서거정.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몰라라식의 처사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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