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디를 가든지 나가야만 한다. 답사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오늘(9월 4일)은 준비를 하는 일이 있어, 멀리는 못가고 가까운 화성 외곽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후 2시 경에 집을 나서 화성을 반 바퀴 돌았다. 그런데 낭패가 있나,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오더니 배터리가 떨어졌단다.

 

이럴 때 난 늘 감사를 한다. 요즈음에는 아이폰으로 촬영을 해도 쓸 만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절반만 돌기고 작정을 하고 나갔으니, 당황을 할 필요도 없다. 화성 남쪽의 용도부터 화서문(서문) 까지 걸었다. 이미 바짓가랑이는 다 젖어버렸다. 신발 안에도 물이 들어와 질퍽거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십년 넘어 만나는 반가운 친구의 부탁

 

“예, 하○○입니다”

“야, 임마 나다”

“누구신데요?”

“야, 나 신○○이야, 그저께 한국에 나왔다”

“정말이냐 그럼 진작 연락하지 그랬냐.”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뵙고 그러느라고. 너 전화번호 바뀌는 바람에 애 먹었다. 너 지금 어디냐?”

“나, 지금 화성 돌고 있는데”

“야. 너한테 ○○이 하고 가는 길이다”

 

이런 친구 녀석들이라고는. 십년이 훌쩍 지난 다음에 한국에 나왔다고 찾아온단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가관이다.

 

“부탁 하나하자”

“먼데?”

“야, 한국에 들어와서 매끼 식당에서 먹었더니 죽겠다. 네가 밥 한 그릇 해줘라”

“미친 놈, 내가 어떻게 해줘. 가정식 식당 데리고 갈게”

“필요 없다. 그냥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밥이나 해줘라”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머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밥을 해줘. 그러면서도 시간을 보니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여유가 없다. 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냉장고부터 열어본다. 마땅히 음식을 마련 할 것이 없다. 두부 한모, 명태포, 어묵, 감자 몇 개, 참치 한 통. 그것이 다이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십 수 년 만에 한국에 나온 녀석인데 그냥 김치라도 우리 것을 먹이고 싶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녀석이라 형제 같은 놈이다.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잠도 같이 자고는 했던 녀석이다.

 

친구녀석을 위해 준비한 상차림

 

참 이것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냥 있는 찬만 갖고 먹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미안한 감도 있다. 우선 있는 것을 갖고 준비를 시작했다.

 

 

 

1. 명태포 계란국

① 우산 명태포를 잘게 잘라 물에 불렸다. ② 그리고 청양 고추를 하나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가급적이면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너무 짠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③ 끓고 있는 동안 밥을 앉혔다. ④ 물이 끓을 때 미리 준비한 계란을 넣고 저어준다. 그렇게 동태포 계란국이 완성이 되었다.

 

 

2. 어묵감자볶음

① 감자와 어묵을 채썰기를 한다. ②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 볶아준다. ③ 너무 타지 않게 볶다가 통깨를 조금 넣어준다. 간은 소금으로만 맞춘다. 소금은 1,000도에서 구운 소금을 사용하다.

 

 

3. 두부와 소시지 부침

① 두부와 소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계란에 담갔다가 프라이팬에 부친다. ② 간은 미리 계란을 풀을 때 맞추어 둔다. ③ 너무 타지 않게 적당히 익힌다.

 

 

4. 참치 김치찌개

① 언제나 빠지지 않는 나의 주 메뉴이다, 굳이 많은 반찬이 필요하지 않다. ② 김치와 참치통조림을 함께 넣고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③ 고춧가루를 조금 풀어 매콤하게 만든다. ④ 팔팔 끓을 때 떡을 조금 넣어준다.

 

있는 자료를 갖고 준비한 음식이다. 그런데 참 블로그가 무엇인지. 요리하랴 사진 찍으랴 하다가 보니 땀이 줄줄 흐른다. 그리고 집에 있던 찬인 김치와 깻잎, 명란젓과 조개젓, 무장아치, 김을 차려 놓았다.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한 시간이 좀 더 걸렸나 보다.

 

 

단 두 녀석이 왔다 갔을 뿐인데

 

준비를 마치고 나니 두 녀석이 들이닥친다. 하도 허겁지겁 준비를 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두 녀석은 연신 ‘고맙다’와 ‘맛있다’를 연발한다.

 

“야, 너 옛날 음식솜씨 안 변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먹기나 해라“

“그런데 이제 사람 필요하지 않냐, 언제까지 혼자 밥 해 먹을래?”

“됐네, 이 사람아”

 

농을 할 정신은 있다. 전화가 울린다. 연신 “예, 예”를 연발하더니 수저를 놓자마자 올라간단다. 사업차 왔는데 시간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야, 네가 내일 서울로 올라와라”

“시간이 어찌 되려나 모르겠네.”

“너 안 오면 내일 또 밥 먹으로 온다.”

 

 

그렇게 두 녀석은 가버렸다. 전쟁이 따로 없다. 단 두 녀석이 왔다갔을 뿐인데, 그릇이 산더미다. 내일은 어디 멀리 답사를 가던지 해야겠다. 이왕이면 저 녀석들을 끌고 갔으면 좋으련만.

8월 19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먼 길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비로 인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신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로 향했다. 2000년도에 15,900,000㎡ 라는 넓은 면적을 지정한 천연기념물 제414호인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려보았으니,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차로 공룡알 화석이 있는 바위 앞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을 출입을 통제시키고, 관람로를 따라서만 공용알 화석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방문자 센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왕복 3km 정도를 걸어야 공룡알 화석을 볼 수가 있다.

 

풀숲에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공룡  ‘트리케라톱스’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서식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의 공룡알 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약 8300만∼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1999년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삼한염, 중한염, 하한념, 한염, 개미섬, 닭섬 등 6∼7개 지점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되었다.

 

지금은 이상한 돌로 땅위에 솟아오른 이 섬들에서는,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이 되었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곳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더욱 이 곳에서는 공룡의 뼈 조각도 여러 곳에서 발견이 되기도 해, 전문가들은 시화호 일대가 약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뻘에도 공룡알 화석이 있을 것으로 추정

 

시화호 화석지에서 그동안 발견이 된 것은, 가로·세로 50∼60㎝ 크기의 둥지 20여 개에서 둥지마다 5∼6개, 많게는 12개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었다. 공룡알 화석은 보통 주먹 크기보다 작은 타원형으로 지름 11∼12㎝이고, 큰 것은 14㎝나 되며, 지금까지 모두 180여 개가 발견되었다. 현재 뻘로 덮여있는 부분에서도 뻘을 제거하면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곳에서는 줄기에 마디가 있는 늪지 갈대 등의 식물화석과, 생물의 흔적이 있는 화석도 대량 발견되었다. 또한 이곳은 지금도 갯개미취, 꼬마부들, 칠면초, 갯방동사니, 범부채, 산조풀 등의 식물과, 너구리, 고방오리, 고라니, 멧토끼, 중대백로, 황로, 수리부엉이, 쇠백로, 황조롱이 등의 동물들도 상당수 서식하고 있다.

 

 

 

 

이곳 고정리 말고도 삼존리 등에서도 2006년 1월 26일 또 다시 15개의 공룡알 화석이 발견이 되었으며, 2008년 5월 30일에는 전곡항 방조제에서 공룡의 뼈가 발견이 되어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화성시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이곳이 자연사박물관의 최적지라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뿔공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명칭을 붙인 이 뿔공룡은 중생대 백악기인 약 1억 3천만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이다. 이 공룡은 2008년 5월 30일 화성시 전곡항에서 제 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성시 공무원 김경하에 의해서 전곡 제방 환 전석에서 발견이 되었다.

 

2008년 5월 30일 화성시 전곡항에서 제 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성시 공무원 김경하에 의해서 전곡 제방 환 전석에서 발견이 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명칭을 붙인 이 뿔공룡은 중생대 백악기인 약 1억 3천만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이다(위는 모형 아래는 뼈)

 

이 공룡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뿔공룡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종이라는 것이다. 전체 길이는 약 1.7m~2.3m 정도이며, 꼬리뼈에 척추뼈보다 5배나 더 긴 신경돌기와 독특한 복사뼈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높고 납작한 꼬리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족보행에서 출발해 사족보행으로의 진화과정을 거친 걸음걸이의 빔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두 번째로 공룡알을 만나다.

 

방문자센터를 들려 자료사진을 몇 장 찍고 관람통로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비가 오면 뻘이 질척거리기 때문에 목재를 이용한 탐방로를 이용해야 한다. 먼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하는 말들이 재미있다.

 

 

 공룡알 화석과 (위) 공룡알이 발견 된 옛날의 섬(아래)


 

“겨우 공룡알 화석 8개보자고 3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좀 황당하네.”

 

하지만 이렇게 공룡알 화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그들은 모르는가 보다. 중간에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조망대도 설치해 놓고,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의자도 조성해 놓았다. 처음으로 본다면 상당히 기대가 되었겠지만, 이미 한 번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설렘이 덜 하는 듯하다.

 

 

걷다가 보니 풀숲에 공룡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트리케라톱스’인 듯한 이 공룡을 찍고 공룡알 화석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공룡알 화석을 돌아보고, 주변에 화석이 있던 옛 작은 섬들을 돌아본다. 하늘은 잔뜩 어두워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굵은 비를 한 줄기 쏟아낼 것만 같다.

수원 행궁 - 화서문 뒷골목에서 만난 이야기들

 

뒷골목을 걷다가 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우중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뒷골목에는 의외로 이야기꺼리들이 숨어 있다. 요즈음 수원의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에 푹 빠진 것도, 그런 재미를 붙여서이다. 그리고 그 뒷골목에서 만나는 음식 한 가지 정도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 덤으로 붙어 온다면 그야말로 재수있는 날이란 생각이다.

 

어제 줄기차게 퍼붓던 비가 밤늦은 시간에 그쳤다. 오늘은 모처럼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이런 날이면 좀이 쑤셔 붙어있을 수가 없다. 수첩과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뒷골목을 찾아 나섰다. 화성 행궁 앞에서부터 화서문까지 가는 골목길은 고작 700m 정도이다. 그 안에는 어떤 모습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장님 하늘에서 우리학교를 지켜주세요‘

 

행궁 앞을 벗어나 화서문 쪽으로 길을 시작하면 신풍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앞으로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해바라기와 수세미, 호박 등이 달려있는 커다란 화단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잘 가꾼 텃밭이 있다. 신풍초등학교는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그런데 그 담장에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 신풍초교 동문이신 고 심재덕 시장님, 116년 역사 이 학교 하늘에서 꼭 지켜주세요’

 

이런 문구가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116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신풍초등학교가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옮겨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풍초등학교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학교다. 1896년 수원군 공림소학교로 개교하여, 일제 수난기와 6·25사변을 거치면서 도내에서는 최초로 초등교육의 뿌리를 내린 터다.

 

 

 

수원교육청 앞에는 심심찮게 신풍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학교자리는 원래 화성행궁이 서 있던 곳이다. 행궁 복원을 시작할 때부터 이전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학부모와 선생님들, 그리고 동문들까지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 행궁의 복원도 생각해보아야 할 국책사업이다.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야기꺼리는 찾아보면 되는 것이지

 

짠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외형상으로는 지저분한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수원시에서 매입을 하여 부수려던 건물 하나를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준 곳이다.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은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 건물 벽에는 작은 그림 도판들이 빼꼭 들어차 있다. 그것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좌측으로 난 차도를 따라 걸으면 화령전 솟을 문이 나온다.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이다.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화령전 앞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마도 신풍초등학교 아이들인 듯하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모여서 번호를 따라 외발로 뛰는 놀이가 재미있다. 그런 놀이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걷다가 보니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넝쿨이며, 대문 앞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들이 보인다. 그 또한 길을 걷는데 감초역할을 한다.

 

고추 화분이 놓인 집 대문간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주의 소독함‘, 얼마나 지나가면서 고추들을 따가기에 이런 푯말가지 붙여 놓았을까? 남의 고추를 말도 않고 따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길 끝에서 만난 초가집, 선술집이 따로 없네.

 

길 끝에 화성이 보인다. 꺾인 길을 돌아서니 그 끝에 초가집 한 채가 보인다. 주인장의 말로는 한 30여년 정도 된 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을 판다. 그야말로 화서문과 어우러진 선술집처럼 느껴진다. 낮 시간이라 술을 한 잔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붙어있는 가격표가 재미있다.

 

뒷골목, 난 왜 침침한 뒷골목이 좋은지 모르겠다. 혼날 말이지만 뒷골목은 낙후된 곳일수록 정겹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보다. 그 뒷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역시 난 뿌리부터가 서민인 듯하다. 하기야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거들먹거려보았자. 땅 속에 들어가면 한 줌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아침부터 참 지겹게도 쏟아 붓는다. 잠시 길을 걸었을 뿐인데,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한다. 비가 내리면 좁은 뒷골목을 다니면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일부러 맞고 다녔다. 아마 그런 어릴 때의 기억이 있어, 이상하게 뒷골목에 정이 더 가는 것만 같다.

 

사실 뒷골목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높지 않은 담이 만들어주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훈수를 막아가며 장기를 두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할머니들이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다가 보면, 어느새 손녀는 잠이 들어버린다.

 

 

 

그림들의 이야기가 있는 지동 뒷골목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화성을 바라보며 마을이 형성이 되어있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지나 게이트볼장을 끼고 걷다가보면, 골목 담장에 그림들이 보인다. ‘지동 벽화길’이란다. 이곳은 추억의 골목길 축제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길 축제'란 그야말로 골목길에서 열리는 축제를 말한다.

 

2011년 ‘지동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해 8월부터 ‘수원화성과 지동 골목길 반가운 동행’이라는 주제로, 시범골목 약 1km의 구간에 골목의 특색을 살린 벽화 그리기와 조형물들을 설치하였다. 이 지동 뒷골목의 벽화그리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이 그림들이 다 완성이 되고나면, 수원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으려는지.

 

 

 

돌계단을 내려 서 천천히 벽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벽에는 수많은 군상들을 만날 수가 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조형을 하고 화장을 한 벽들이,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한 벽에는 거울을 여기저기 붙인 곳도 있다. 지나는 행인들이 자기 키에 맞추어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인가 보다.

 

“할머니 거기 문 없는데, 어쩌시려고”

 

여기저기 작은 의자와 아름답게 그린 그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누군가 담벼락에 커다랗게 초가 집 한 채를 그려 놓았다. 아마도 그런 시골마을의 초가집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천천히 골목을 지나본다. 어릴 때 살던 서울의 집도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벽을 참 다람쥐처럼 타고 오르기도 하고, 성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가끔 이 골목을 걷는다.

 

 

지난 해 골목축제 때 모습이다

 

어느 집인가는 벽에 커다랗게 화성을 그려져 있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골목을 걷는데 웬 할머니 한분이 계단을 올라 벽 앞에 서 계시다. 그런데 벽에 문이 보이질 않는다.

 

“할머니 거긴 문이 없는데 어쩌시려고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신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귀가 어두우신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으시다. 이런 나를 지나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신이상자로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피식 웃는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어째 이런 재미있는 뒷골목 길을, 그렇게 골목에 샛바람 지나듯 휑하니 가버리는 것일까?

 

 

 

오랜만에 지나가본 길에는 그림이 더 늘었다. 어느 집 담에는 예쁜 의자도 함께 마련을 해주었다. 이런 작은 뒷골목에 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더운 날씨 탓인가 기척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걸어 온 골목길을 뒤돌아본다. 벽 앞에 선 할머니는 아직도 꼼짝 않고 그곳에 서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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