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서 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모임이 있어 중국집에서 독하디 독한 53% 짜리 술을 하고, 2차로는 간단하게 먹자고 생맥주 집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1월 중에 연천으로 주상절리를 보러가자고 약속을 한다. 여름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지만, 겨울에 강이 얼면 트레킹을 할 수 있다니, 사뭇 기대가 크다.

이야기를 한창 하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잠시간에 길이 온통 미끄럼틀이 되었다. 조금씩은 두어번 내렸지만, 이렇게 많이 내리기는 처음인 듯하다. 서둘러 해어지고 1월을 약속하는 수밖에. 길을 걸으면서 내일은 화성답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화성의 여장위에 흰 눈이 소복히 쌓였다.

눈 내린 화성 아름다워

아침에 출근을 했다가 서둘러 만두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화성답사에 나섰다. 동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썰매를 갖고 간다. 아마도 썰매타기라도 할 모양이다. 화성에는 눈이 오고나면 자연적인 썰매장이 여기저기 생겨난다. 화성 안쪽으로도 성 밖으로도 경사가 있어, 겨울철 썰매타기에는 제격이다. 눈이 오고나면 썰매를 타는 아이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동안 화성을 연재하면서 여름에 찍은 사진을 갖고 글을 쓰려니 영 성의가 없어 보인다. 무엇이나 현장과 시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이런 호기를 마다할 수 없다. 길을 미끄럽고 손은 떨어져 나가는 듯 하지만, 카메라를 둘러메고 화성 답사를 시작한 것이다.

화성의 경사진 곳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무관함)

아이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사내녀석들은 짓궂다. 아래서 타니 조금은 심심했나보다. 경사가 급한 성벽 가까이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거기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소리소리 지르면서 타고 내려오는 썰매타기. 보기만 해도 즐거워 보인다. 그런데 이 녀석을 말소리를 좀 들아보자.

"야 거기서 타니까 재미있지?"
"엉, 졸라 재미있어"
"그러니까 위로 올라가서 타야 해"
"정말야 졸나 재미있어. 야 너희들도 여기섶 타봐 졸라 재미있다"


어이가 없다. 도대체 저런 말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 어른이 해도 상스러운 말이다. 그런 말을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은 아이들이라도 함부토 혼을 낼 수가 없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들은 아이에게 훈시만 해도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덤벼든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저 말이 욕인줄은 알고 있을까? 안다면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할까? 어디서 저런 말을 듣고 사용을 하는 것인지.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그리고 정말 웃기는 방송 등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이놈들 그런소리 하면 혼난다"
"우리가 왜 혼나요. 졸나 재미있는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어른이 무엇이라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은 아이들. 이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참 마음이 아프다. 인기리에 방영이 되던 TV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끝이났다. 나랏말을 창제한 세종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많은 후기를 남겨 놓았다. 백성들이 이 글을 깨우처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창제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 언어를 우리는 지금 사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아이들이 언어를 제데로 익힐 만한 곳이 없다. 본 제목을 줄여서 간단하게 처리하기, 이상한 말 양산해 내기. 뜻이 애매모호한 말을 만들어 퍼트리기.

이런 것들이 블로그나 방송, 혹은 신문이나 잡지 들을 통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말을 하기를 바랄 것인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진 엉덩이보다 더 아픈 것이, 바로 이런 아이들과 접하고 있는 요즈음의 현실이다. 누구를 탓하랴, 나도 그 중 하나인 것을.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9) - 공심돈

공심돈, 우리나라의 많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축조물이다. 1796년 3월 10일 완선한 서북공심돈. 공심돈이 완공을 한 이듬해인 1797년 3월 서북공심돈을 둘러 본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공심돈은 그 건축물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10호로 지정이 되었다.

원래 화성에는 모두 세 곳의 공심돈이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그리고 남공심돈이다. 하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동, 서북공심돈만이 남아있다. 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공심돈의 형태는 특이하게 조성해, 마치 화성 안에 작은 고성(古城) 하나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화서문 곁에 축조된 보물 제1710호인 서북공심돈과(위)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에 서 있는 동북공심돈(아래)

치성 위에 올린 특별한 구조물 서북공심돈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그 모양이 각각 특색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꾸며졌다. 치성 위에 올려놓은 서북공심돈은 아래 치성은 돌로 쌓았으며, 그 위에 상부벽체는 벽돌로 쌓았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전각을 올려놓았다.



화서문 곁에 서 있는 서북공심돈은 그 안이 비어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꾸며졌다. 그러나 화성에서 출입이 제한된 곳 중 한 곳인 서북공심돈은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서운하다. 화성 안에서도 독창적인 형태로 조성이 된 서북공심돈, 아마도 정조는 이 축조물을 보고 만족하였던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구경을 하라고 한 것을 보면.


3층으로 축조된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

둥근 고성을 연상케 하는 동북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은 바로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을 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이 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아름다운 공심돈에 매료당하다.

서북공심돈은 1796년 3월 10일에 완공을 하였으며,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9일에 완공이 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 그리고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에 오른 동북공심돈. 그 위에서 주변을 살펴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지금의 모습들이 왠지 낯설다.
어른들과 어린이들 모두 하나가 되어 활 시위를 당긴다. 활을 떠난 화살이 30m 앞에 놓인 곰두리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른다. 누구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 것인지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쏜 화살이 맞았다고 즐거워 한다. 

11월 27일 오후. 수원에 소재한 사적이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동장대인 연무대 앞에는 국궁체험장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국궁체험을 즐기기 위해서이가. 하절기에는 오후 5시 30분까지, 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까지 활을 쏜다. 30분에 한 번씩 사대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게 국궁체험을 하는 것이다.





각궁은 고려 때부터 사용

우리가 일반적으로 국궁이라 부르는 각궁은, 삼국시대의 맥궁에서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활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각궁이 언제부터 널리 보급되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함흥 선원전에 보면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각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각궁을 사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각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전통적인 활인 각궁은 참나무, 산뽕나무, 물소뿔과 소의 힘줄, 대나무 등을 이용하여 만든 복합단궁의 형태이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10여 종 이상의 활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각궁 한 종류 뿐이다. 하기에 우리가 국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각궁을 일컫는 말이다.




안내를 따라 쏘아보는 국궁

사대에 오른 체험을 하는 관광객들은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선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라 활과 화살을 들고 과녁을 향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간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국궁체험은 사용료가 10발에 2,000원이며 두 번을 쏠 수 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다. 설명을 듣고도 따라하기가 힘든가 보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김아무개(남, 42세. 서을)는 10발을 다 쏘고 난 후





"정말 뜻 깊은 체험입니다. 이렇게 화성 안에서 활을 쏘니 정조대왕 때 장용위 군사라도 된 기분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홍보를 많이 해야겠네요" 라고 한다.

부모님들과 함께 왔다는 양모군(남, 11세. 초등학생)은

"정말 재미있어요. 우리 활을 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라고 하면서 즐거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화성의 국궁체험.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국궁체험장으로 몰려들 것이란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성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궁체험을 할 수 있도록 통역관을 배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아무래도 맛집 블로거는 못할 듯싶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카메라부터 들이밀고, 다음에 먹으면서도 연신 찍어대야 하는데 우린 죽어도 그 짓은 못한다. 내가 일부러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들과 밥상머리에 앉아 카메라를 들이민다는 것 자체가 쑥스럽기 때문이다.

이번 출장길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그 중 한 분이 점심대접을 하겠다고 해서 찾아간 곳. 화성시 향남읍 하길리 569-5번지에 소재한 ‘뽕나무 골’이란 식당이다. 식당 주차장에는 이미 만차가 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좁지 않은 식당 안에 무슨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아마도 인근 뿐 아니라 먼 곳에서도 찾아온 듯하다.


아이폰에 역광까지. 사진은 엉망입니다.

누에
박물관이 있는 '뽕나무 골' 식당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벽에 곤충들이 가득하다. 옆으로 보니 이상한 것들이 즐비하게 전시가 되어있다. 자세히 보니 ‘누에박물관’이란다. 예전 베틀이며 여러 가지 누에를 치는 기구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왕 왔으니 이런 것도 찍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카메라가 없다. 단 분 차를 이용했으니 당연히 카메라는 차에 두고 올 수 밖에.

이래서 난 파워블로거가 못 되는 것인가 보다. 블로그의 필수품이 카메라라고 하는데, 점심 한 그릇에 정신을 빼앗겨, 카메라를 두고 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이폰이 있으니 우선은 그것으로 대처를 하는 수밖에.




점심에 받은 뽕정식. 황제가 따로 없네.

뽕정식이라고 하는 상차림을 시켰다. 소갈비찜이 나오면 1인분에 2만 5천원이고, 돼지갈비찜이면 2만원이란다. 싼 가격은 아니다. 도자기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들을 보니 26가지나 된다.

이럴 때는 정말 나 스스로를 책한다. 바보처럼 카메라를 두고 오다니. 이것만 해도 글 두 개는 쓸수 있는데 말이다. 밥상과 박물관을 찍었으면, 하루 글 쓸 소재는 충분한데 말이다. 그래도 한 두 어장 찍으려는데, 식당 안에 밥을 먹으로 온 사람들이 연신 쳐다본다. 잠시 고민을 해댄다. 그래도 막 찍어버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배짱이 없다.





더구나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시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나저나 이 먼 곳을 다시 오기도 그렇고, 참으로 난감하다. 할 수 없이 아이폰을 꺼내 몇 장만 찍는다. 찍으면서도 연신 부담스럽다. 거 참, 내가 맛집 블로거도 아닌데, 왜 꼭 이래야 하는 것이지.

어쨌든지 밥상을 받고 보니 황제도 부럽지 않다.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만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대접을 받는 자리이니 그 맛을 음미를 해가면서 천천히 먹을 수도 없는 일. 그저 앞에 놓인 반찬만 뒤척이고 있었다니.



먼저 자리를 일어나 박물관으로 가 일일이 찍어댄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이람. 아이폰에 밧데리가 10%가 남았다고 한다. 더 이상 찍었다가는 통화도 못할 지경이다. 이쯤해서 사진찍기를 그만해야 하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밥상도 그렇고 박물관도 그렇고. 다음에 이 방면으로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한번 들려보아야겠다. 황제 노릇 한번 하려고.

주소 : 화성시 향남읍 하길리 569-5
전화 : (031) 353-6220(예약) / 353-6223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7) - 봉돈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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