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람이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박달나무라는 이야기만 듣고, 천연기념물을 찾아나섰다. 안내판이 서 있는 주변에 보는 아름드리나무들이 꽤 많은데, 어떤 것이 천연기념물인지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해당 지자체에 안내를 부탁한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된 천연기념물 가침박달나무.

 

전북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37에는 천연기념물 제387호 임실 덕천리 가침박달군락과, 제388호 임실 덕천리 산개나리군락이 있다. 군락이라고 했으니 많은 나무들이 서 있을 텐데,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어찌 찾아내랴. 결국은 해당지자체 담당자에게서 따끔하게 일침을 당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실을 ‘감치다’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는 가침박달나무

 

산길을 따라 울타리쪽을 장식하고 있는 임실 가침박달나무는, 산기슭 및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나무이다. 4~5월 경에 꽃이 피며, 가지는 적갈색으로 털이 없다. 원래 ‘가침박달’의 ‘가침’이란느 말의 어원은 ‘실로 감아 꿰맨다’는 ‘감치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가침박달나무의 열매를 보면 씨방이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은 실이나 끈으로 꿰맨 것처럼 되어 있다. 또한 나무의 질이 단단한 박달나무에서 ‘박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가침박달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연기념물인 가침박달나무와 꽃(꽃 사진은 문화재청 자료) 

 

천연기념물인 임실의 가침박달나무 군락은, 직선거리 500m 내에 약 280그루 정도가 분포하고 있고, 3㎞ 내에 다시 300그루 정도의 무리를 이루고 있어 그 분포지의 넓이가 상당히 넓은 편이다. 나무의 높이는 대부분 2∼3m 정도이며, 가침박달나무는 한국에서 1종 1변이종이 자라고 있다. 주로 중부 이북에 분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남부지방인 임실군 관촌은 가침박달나무 분포의 남쪽한계선으로 밝혀졌다.

 

연한 황색 꽃을 피우는 산개나리

 

가침박달나무의 생김새를 몰랐다고 하지만, 산개나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일반적으로 많이 자라고 있는 개나리처럼 생겼거니 하고 찾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높이 1~2m 정도인 산개나리는 키가 작고 줄기가 분명하지 않다. 산개나리 역시 담당 공무원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산개나리의 어린 가지는 자주빛이 나며 털이 없고 2년쯤 자라면 회갈색을 띤다. 잎은 2∼6㎝로 넓고 큰데, 앞면은 녹색으로 털이 없으나, 뒷면은 연한 녹색으로 잔털이 있다. 꽃은 연한 황색으로 3∼4월에 잎보다 먼저 핀다.

 

가칭박달나무가 서식하고 있는 곳 한편으로 이 산개나리 군락이 있는데, 이곳에는 약 230그루가 산개나리가 분포하고 있다. 산개나리는 북한산, 관악산 및 수원 화산에서 주로 자랐는데, 현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소수만 남아있다. 임실 관촌 지역이 남부에 속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중북부지방에 분포하는 산개나리가 자생하고 있는 것은 이곳의 기후가 중부지방과 비슷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개나리와 꽃(꽃은 문화재청 자료)

 

요즈음은 이 가침박달나무와 산개나리를 몰래 캐어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저 소중한 것을 제자리에 놓고 즐길 줄 모르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천연기념물이 훼손당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언제나 이런 소중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려는지.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천연기념물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나는 천연기념물을 만날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한 마디로 그 나무에 대해 감칠맛 나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경우에는 그래도 워낙 많이 보아온지라 조금은 알 수가 있지만, 그 외에 나무에 대해서는 고작 할 수 있는 설명이 자료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웅장하다'거나 '보기가 좋다' 혹은 '소중하다'가 내 지식의 끝이다. 조각자나무에 대한 지식도 그러하다.

 

 

독락당 안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독락당 뒤편에서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15호 조각자나무. 이름부터가 생소한 이 나무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경계로 하는 울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약 470년 정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5m에, 둘레는 5m 정도이다. 이 조각자나무는 중국산으로 회재 이언적이 중국사신으로 다녀온 친구에게 받아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조각자나무(Gleditsia sinensis Lam)는 콩과의 갈잎큰키나무이다. 높이가 20 ~ 30미터까지 자라는 조각자나무는 껍질은 흑회색이고 줄기나 가지에 가시가 돋는다. 독락당 조각자나무에는 원줄기에 길이 10㎝, 지름 1㎝정도의 갈라진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소엽은 타원형 내지 피침형이다. 가장 자리에는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조각자나무는 황록색의 꽃은 6월에 피고, 꼬투리는 편평하며 길이 20 ~ 30㎝, 너비 3cm로 곧고 쪼개면 매운 냄새가 난다. 종자와 가시를 모두 약용으로 한다. 독락당 조각자나무를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바람에 가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독락당 울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조각자나무는 독락당 뒤편의 담을 안으로 돌려쌓아 놓은 곳에 소재한다.

 

나무 앞에는 보호철책을 둘러 이 나무를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다.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나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천연기념물을 촬영을 할 때는 잎이 무성한 계절에 다녀야 하므로 시기적으로 맞추기가 힘들다. 더구나 독락당의 조각자 나무가 있는 울 안은 들어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있는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데 가장 어려움은 바로 이런 점이다.

 

약용으로도 사용한 진귀한 나무

 

조각자나무는 가시와 잎 등이 모두 약용으로 사용이 된다. 중국 금세기 최고 최대의 중약학 성서라고 일컫는 <중약대사전>에는 조각자의 효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조각자의 가시는 일 년 내내 채취할 수 있으나,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채취시기로써 적당하다. 이 가시의 성분은 플라본 배당체, 페놀류, 아미노산을 함유한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물에 불려서 얇게 썰어서 햇볕에 말린다. 이 가시의 효능은 급성편도선염, 옹종, 창독, 여풍 등과 태반이 나오지 않는 증상을 치료한다. 조각자나무의 열매를 ‘조엽’이라고 하는데 맛은 매우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 풍담, 습독을 제거하고 기생충을 구제하는 효능이 있다. 가래를 삭이는 작용, 항균작용, 회충성 장폐색증, 귀지가 막힌 증상, 중풍으로 인한 안면 신경 마비, 돌발적인 두통, 해수 및 가래가 끓는 증상, 개선과 나병을 치료한다.

 

이와 같이 조각자나무는 모든 것을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나무라는 것이다. 나무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독락당 조각자나무의 가치를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생물학적이나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산재해 자라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갓바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대구 팔공산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팔공산 갓바위가 아닌 목포에 있는 갓바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포 갓바위가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이 된 것은 2009년 4월 27일이니,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목포의 명물인 갓바위 정도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갓바위를 찾았을 때는 관람을 위해 바다 위로 가설한 통로가 없었다. 이번 답사 길에 가보니 갓바위를 관람할 수 있는 통로가 개설이 되어 편리하게 볼 수가 있었다. 갓바위는 목포팔경 중의 하나다. 중바위라고도 부르는 이 바위는 오랜 세월 자연적인 풍화작용과 파도와 해류 등에 의해 바위가 침식되어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이다.

 

자연이 만든 희대의 걸작품

 

자연이 스스로 이리도 신비한 풍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갓바위'. 풍화혈인 이 갓바위는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갖고 있다.

 

 

 

갓바위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설에 기인한다. 옛날에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가는 한 젊은이가 살았다. 비록 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 젊은이는 부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부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양반 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였단다.

 

그러나 주인이 일을 한 품삯을 주지 않자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부친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라는 것이 전해지면서 빠지기도 하고, 보태지기도 한다. 젊은이는 부친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다가, 이 곳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부친의 묘를 쓰려고 하였단다.

 

 

아버지바위와(위) 아들바위(아래)

 

슬픈 전설을 간직한 갓바위

 

바닷가에 온 젊은이는 잘못하여 관을 바다 속으로 빠트렸다. 이 젊은이는 그때부터 '불효자는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하여 갓을 쓰고 슬퍼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 자리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큰 것은 ‘아버지바위’ 작은 것은 ‘아들바위’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이 영산강을 건너려고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갓을 벗어놓고 갔는데, 그것이 바위가 되어 이 바위를 ‘중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전설이야 어찌되었든 이 바위는 예사롭지가 않다. 갓바위를 마주하며 오른쪽 바위는 남성의 힘이 느껴지고, 왼쪽의 것은 여성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여성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왼쪽 바위가 오른쪽 남성의 바위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전설처럼 아버지에게 기댄 아들인지, 아니면 아들의 어깨에 몸을 의탁한 아버지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개의 바위가 어우러져 신비함마저 느끼게 한다.

 

갓바위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다

 

먼 길을 달려 찾아간 갓바위. 예전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주변 경관에 조금은 낯이 설기도 하지만, 갓바위 가까이 다가가 훼손할 염려가 없으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두 개의 바위가 11월 중순의 찬 바닷바람에 움츠리고 있는 듯도 하다.

 

 

갓바위 앞에 마련된 관람 길 밑에는 작은 바닷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하고 있다. 아마 갓바위가 뒤늦게나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축하라도 하는 것인지. 바람결에 선 갓바위는 슬픈 젊은이의 전설을 간직한 채, 저만치 앞을 지나는 배라도 보고 있는 것인가? 곁에서 보면 영락없는 갓을 쓴 모습으로 보이는 갓바위를 보면서, 우리 자연의 오묘함을 또 한 번 깨닫는다.

 

그러한 아름다운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폭파해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의 후손들에게 참 못난 선대라는 오명을 벗지는 못할 듯 하다. 갓바위를 보면서 푸른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상당히 오래 묵은 거대한 나무나, 아니면 대단한 경관, 혹은 희귀종인 동물 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천연기념물 중에는 작은 식물들도 상당히 많이 있다. 천연기념물을 지정하는 목적이 희귀종은 동식물의 보호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느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홍삼, 수삼, 백삼 같은 삼 종류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느삼은 그런 삼의 종류가 아니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물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제372호로 지정된 개느삼은 평안남도, 함경남도, 강원도 양구군 이북의 추운 지방에 분포한다.

 

 

수고 1.5m 정도의 작은 식물

 

개느삼은 줄기가 굵고 키는 1m~1.5m 정도로 자란다. 잎은 넓으며 봄에 돋았다가 가을에 떨어진다. 꽃은 황금색으로 이른 봄에 피며 줄기의 끝부분이 약간 꼬부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양구군 일대는 지역적으로 풍부한 북방계 식물의 남한계선을 연결하는 곳이다. 금강산과 설악산의 인근에 위치하여 중부이남 지역과는 또 다른 식물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양구 지역에는 이 일대에만 분포하는 개느삼, 당버들 등의 희귀식물이 보고되고 있어서 식물지리 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느삼을 찾아 온 식물원을 누벼

 

강원도 양구군에 위치한 양구생태식물원. 이곳에 천연기념물 개느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느삼을 찾아 양구로 향했다. 양구군 동면 천봉로를 지나 생태식물원에 도착을 했다. 그러나 넓디 넓은 이 식물원에서 개느삼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개느삼을 찾아 헤맸다. 계절이 늦어 꽃은 없을 것이고 잎만 갖고 개느삼을 찾으려니 그 또한 만만치가 않다.

 

땀을 흘리면서 개느삼을 찾아 식물원을 헤맨 지 두 시간. 한편에 개느삼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출력을 해온 개느삼과 닮은 식물은 없다. 또 다시 찾아 헤매다가 지나는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몇 번을 지나친 곳에 개느삼이 있다. 이럴 경우 무지를 탓할 수밖에 없다.

 

 

천연기념물하면 거대한 나무를 생각하기 쉽다. 은행나무나 수백년 묵은 소나무 혹은 이팝나무 등을 보아오다가 다년생이지만 1.5m 정도의 식물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꽃을 핀 사진을 보고 찾아다니다 보니 계절이 다른지라 꽃이 없어 찾기에 더욱 애를 먹었다. 개느삼을 찾으면서 느낀 것은 작은 풀 한 가지도 자연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몇 시간 흘린 땀의 가치는 충분하단 생각이다

고려 성종은 제6대 군주로 재위기간은 981~997년이다. 벌써 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다.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에 소재한 청안초등학교 교정에는 천살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65호이다.

 

은행나무는 생명이 길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병충해가 없으며 잎을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을에 단풍이 들 때까지,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로수 등으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에는 용문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

 

잎이 없어도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압권인, 천살을 넘긴 청안초등학교 교정 안 은행나무. 나무의 높이는 17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7.4m이다. 동서로 뻗은 가지는 16.5m, 남북으로도 17.5m여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학교 교정 안에 우뚝 서 있다.

 

"아저씨 은행나무 찍으러 오셨어요?"

"그래."

"그거 왜 찍어요?“

"응, 신문에 내려고."

"그럼 교과서에도 실려요?"

"아니. 신문에만 실려."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천년을 넘게 살았잖아요. 이렇게 큰 나무는 교과서에 실어주어야 한데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들이 쫒아와 하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이 교정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린 마음에 천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다. 비록 잎을 다 떨어뜨리고 있기는 하나, 천년 세월을 살아 온 은행나무답게 당당하다.

 

성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징

 

고려 성종 때 이곳의 성주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성내에 연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청당(淸塘)'이라는 못을 파고 그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들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 현재 청안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라는 것이다.

 

괴산군은 고려 성종 14년인 995년 지방제도 정비 후에, 충주, 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中原道)에 속했다. 이후 현종 때 괴산지역은 충주목의 속군인 괴주군과 청주목의 속현인 청천현, 청안현, 청당현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이 청당현이 연못이 있는 이 지역을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은행나무는,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다고 한다. 더욱 학교 교정 안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아이들에게도 큰 자랑거리이다.

 

귀 달린 흰 뱀이 사는 은행나무

 

청안 읍내리 은행나무 속에는 귀 달린 흰 뱀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를 해하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나무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무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수술을 한 자욱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는 밑동서부터 잔 가지들이 무수히 솟아나 있다. 그리고 중간에도 잔가지들이 솟아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고려 성종 때 이 나무를 심은 성주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저 나무가 성주라면, 그 숱하게 자라나고 있는 가지들은 백성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천년 넘은 세월을 그렇게 마을 주민들에게 상징처럼 살아온 은행나무. 2월 찬 날에 아직 밑에는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있지만, 그 자태만큼이나 당당하다. 앞으로 또 천년을 저리 살아간다면, 그 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잎이 무성한 날,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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