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나 천연기념물 등을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일 년에도 한두 번 정도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들려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한다. 이런 버릇은 언젠가 문화재가 갑자기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난 뒤부터이다. 그 다음부터 지나는 길에 문화재가 있으면 일부로라도 들려보고는 한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스님은 이천 백사면 도립리와 함께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영험한 나무로 전해지는 반룡송은 이 나무의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늘로 오르고 싶은 나무

 

반룡송은 이천 백사면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1.7㎞ 떨어진 도립리 어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반룡송의 높이는 4.25m, 가슴높이의 둘레는 1.83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넓게 퍼져 있으며, 하늘을 향한 가지는 마치 용트림하듯 기묘한 모습으로 비틀리면서 180°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송이란 이름이 걸맞다는 생각을 한다. 한 가지는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나무이면서도 두 나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에 늘어진 가지는 땅에 끌릴 듯 휘어져 있다. 4월 26일 찾아간 반룡송. 벌써 6~7 차례난 만난 반룡송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으면서, 하늘을 향해 승천을 할 날을 기다리는가 보다.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신비한 나무

 

이 반룡송에 전하는 이야기는 많다. 그만큼 인근마을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나무로 대우를 받고 있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반룡송의 나무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하여, 가급적 나무 근처에서 나무에게 해를 입힐 만한 일들은 하지 않는다.

 

 

 

 

반룡송은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히고 있다.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 도선스님이 심었다고 한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아직 푸른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룡송. 아마 앞으로 만년을 살아 만년송으로의 이름을 갖기를 바란다. 혹 그 이전에 정말 승천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괜한 생각을 해본다. 반룡송을 뒤로하며 돌아본 나무 위로 봄날의 늦은 햇살이 아른거린다.

겨울에 가장 만나고 싶은 문화재들은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아무리 날이 춥다고 해도, 소나무 종류의 천연기념물들은 언제나 그 푸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춥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인가 움직임이 영 둔하다. 이런 날 가만히 집안에만 있자면 갑갑증이 인다. 가까운 곳이라도 답사를 할 작정으로 길을 나섰다. 여주에서 이포대교를 지나 이천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산수유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천 백사면의 산수유마을은 수도권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곳이다. 봄이 되면 많은 인파가 노랗게 핀 산수유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아마도 이제 머지않아 이 마을은 또 한 번 홍역을 치루어야 할 것만 같다.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백사면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수유 마을로 들어가다가 보면, 좌측 밭 가운데 키가 낮은 소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승천하고 싶은 소나무인가?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반룡송(蟠龍松)'은 하늘을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나무를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단다.

 

가까이 다가서 본다. 중앙에 본 가지가 있고, 그 위로 환상적인 가지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다. 180° 로 둥글게 말아가면서 퍼져나간 가지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신라 말 도선스님이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과 이천 도립리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심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지는 반룡송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나무의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신비함을 가득 담아낸 수령 1,100년이 지난 소나무

 

높이 4.25m, 가슴높이 둘레는 1.83m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졌다. 땅속에 묻혀 자란 또 다른 가지는 흡사 중앙에 머리를 둔, 꼬리처럼 보이기도 해 신비감을 더한다. 이 꼬리부분이 있어서 반룡송이 하늘로 승천을 해 버릴 것만 같다. 얼핏 보아도 단순한 소나무이기보다는, 무엇인가 신비한 힘을 가진 특별함이 있다.

 

 

찬 날씨도 잊어버리고 몇 번이고 주위를 돈다. 저녁 햇볕이 가지 틈 사이로 들어오니, 솔잎들이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몰 전에 반룡송을 보면 승천을 하는 용을 볼 수 있다고 했는지. 금방이라도 햇볕 사이로 승천을 할 듯한 모습이다.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는 백사 도립리의 반룡송.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숱한 세월을 이곳을 지켜 온 반룡송. 앞으로 용송으로 만년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돌아보다가 보니 여기저기 마른 나뭇잎들이 보인다. 나이가 먹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는 것인지, 아니면 생육상태가 나빠진 것인지 걱정스럽다. 반룡송을 떠나기 전,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아 승천을 할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본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푸른 물, 그리고 그 안에 냇돌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소나무 숲. 우리가 흔히 ‘청령포’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다. 숙부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던 어린 조카 단종.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물론 기록에는 양위라고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그 후 1446년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다가 이포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육로로 여주의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고달사지를 지나 문막,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가 되었다.

오직 뱃길만이 접근이 가능한 ‘청령포’와 ‘관음송’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삼면이 남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드는 곳이며 물살이 거센 곳이다.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그 어느 곳으로도 밖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마치 섬과 같은 이곳 청령포에는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켜 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수정'은 현재 골프장 안에 있다. 이 어수정은 단종이 유배를 가다가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관음송(觀音松), 이 나무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수령이 6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정도에, 가지 길이는 동·서쪽이 22m, 남·북쪽이 19.5m 정도이다.

단종은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이 고달사지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쉬어갔다는 바위와 '노림'이라고 부르는 숲이 있다. 일설에는 단종이 흥원창까지 갔다고도 하나, 여주지역의 많은 지명에서 여주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1.6m 정도 되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시절 이 갈라진 곳에 앉아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이라는 말도 단종과 연관이 있다. 즉 단종의 '슬픈 유배생활을 보았으며(=觀),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音)'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 구슬픈 소리는 이야기가 아닌 단종의 슬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단종 임금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서북의 한양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동쪽의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이 좁은 곳에서 나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임금은 아마 어디를 보나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울음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슬픔을 묵묵히 바라다보며 함께 한 소나무는 그 후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속이 타버린 단종의 마음이 전해져 나라걱정을 하는가 보다.

단종이 이 갈라진 소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이 나무는 단종의 이야기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아닌 울음소리 였을 것이다.


임은 떠나고 세월만 남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관음송을 보기 위해, 청령포를 찾아 영월 땅에 들어설 때마다 비가 내렸다. 세 번이나 찾았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령포를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영월이라는 곳이 단종임금의 슬픈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갈 때마다 눈물이 되었는가 보다.

네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관음송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들보다 유난히 높게 자란 관음송. 가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갈라진 나무줄기 위에 잔가지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곡이 졌다. 마치 단종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이곳 고도와 같은 청령포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단종을 위해 관음송 스스로 춤을 추지는 않았을까?



그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연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잊고 살아가는데. 관음송 한 그루만이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인지. 단종을 위로하느라 추던 춤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만 둘러본 날이었다. 아마도 하루에 수령이 꽤 오랜 나무들을, 10여 그루는 보았을 것이다. 그 중 한 그루가 바로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313-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83호인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이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이밥’ 즉 ‘쌀밥'과 같은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이는 것이, 마치 쌀밥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여름이 시작될 때인 입하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중 작은 중산리 이팝나무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넓은 공원과 같이 곳이 있고, 마을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나무들을 심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작은 이팝나무들이 보인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수령이 약 250살 정도로 보이며, 나무의 높이는 10.5m 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2.7m 정도이다.

중산리는 마을을 들어서는 도로보다 낮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산리 마을 앞의 낮은 지대에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가지가 고루 퍼져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먼지 등으로 나무의 생육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들 가운데, 작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저 나무에는 전설이 없어. 우리도 안타까워’

현재 우리나라에는 7그루 정도의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지방 기념물 6그루를 합해, 모두 13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이팝나무들 중에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6호인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5호인 김해 신천리 이팝나무는 한쪽 가지가 길 건너 우물을 덮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우물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2월 말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는데, 이곳의 말로 ‘용왕(龍王) 먹인다’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14호인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모구 7그루가 지정이 되어있는데, 마령초등학교 담장 곁에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팝나무를 ‘이암나무’ 또는 ‘뻣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팝나무가 모여 자라는 곳은, 어린 아이의 시체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아기사리’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그 마을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산리 이팝나무에는 그 어떤 전설도 전하지가 않는다. 마을 앞 정자에서 쉬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중산리 이팝나무에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가 없는지, 말씀을 드려보았다.

“저 나무에는 아무런 전설도 없어”
“대개 천연기념물에는 무슨 전설 등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여. 우리도 저 나무에 무슨 이야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어. 우리들도 참 안타깝지”
“저 작은 나무들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요?”
“글쎄, 사람들은 저 큰 나무 자식이라고 하는데, 딴 곳에서 갖다 심은 것 같아”

그 외의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천연기념물을 만나 무엇인가 잔뜩 기대를 걸었는데, 아무런 이야기 하나 못 건지는 이런 날은 맥이 풀린다.


우리나라의 크고 오래된 이팝나무는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피는 것으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비의 양이 적당하면 꽃이 활짝 피고 부족하면 잘 피지 못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강수가 필요하므로 이팝나무의 생육에 따라 풍, 흉년을 미리 점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을 어르신들조차 전설 하나 간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중산리 이팝나무. 그러나 그 나무의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그만해도 마을의 자랑이 아닐까? 중산리를 떠나면서 나무가 오래도록 잘 자라기만을 기원한다.

난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있다. 문화재를 한 번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인근을 지나갈 때는 꼭 다시 한 번 들린다. 문화재란 늘 신경을 쓰고 찾아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엔가 훼손이 되어있거나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천연기념물의 경우에는 계절별로 한 번씩은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계절별로 그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계절마다 갈아입는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보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의 은행나무들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보석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를 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 3월에는 잎이 없이 가지만 앙상한 나무를 보고 왔는데, 이번에는 벌써 윗가지에는 햇볕에 노란색이 보일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높이 34m 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 11m 정도인 보석사 은행나무. 아마 수령으로 친다면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듬직하다.

뿌리부분에는 2∼3m 높이의 잔가지들이 돋아나 있는 보석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난 3월에 찾아갔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나무를 위하는 제를 지낸다고 알려주었으나, 찾아가지를 못했다.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준다는 신성한 은행, 9월 4일 찾아간 은행나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맨 위 사진은 지난 3월에 보석사를 찾아 만난 은행나무 모습. 잎이 달리지 않았다. 가운데는 나무에 걸린 서원지. 목신제를 지내면서 걸어놓은 것이다. 맨 아래 서원지의 형태


보석사 창건 당시 심었다는 은행나무

보석사의 은행나무는 보석사를 창건한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 당시인 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설대로라면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1,125년이나 된다. 영험한 나무로 근동에 소문이 나 있는 이 은행나무는, 1945년 조국의 광복 때와, 1950년 한국전쟁 때, 그리고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9월 4일 보석사 은행나무를 찾아갔다. 나무 밑동에 색색으로 걸린 서원지가, 3월보다 더 많이 달린 듯하다. 아마도 올 해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새로 걸어놓은 듯하다. 색색으로 걸린 서원지들이 푸른 은행나무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3월에 보지 못한 은행잎이다. 보석사 은행나무는 마치 2단으로 꾸며놓은 듯하다. 밑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퍼지고, 중간 위 부분에서 부터는 갑자기 줄어들었다.



가을이 다 지나기 전에 꼭 다시 오마

중간에 사방으로 퍼진 가지의 길이는 동, 서쪽이 24m, 남, 북쪽이 20.7m나 된다. 보석사 대웅전을 마주하고 좌측으로 약간 비켜선 맞은편 산자락. 그곳에 홀로 고고한 자태로 서 있다. 주말을 맞아 보석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이 나무의 오랜 기운이라도 받아가려는 것일까?

나무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금방이라도 나무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 것만 같다.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오후의 햇볕을 받은 은행나무의 윗부분에는 벌써 노란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 나무가 노랗게 물을 들이면 또 한 번의 장관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다시 찾아오마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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