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줄기가 흰색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백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니다.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지정 해제된 백송들

 

흔치 않은 나무인 백송이 그나마 살아있는 곳도 많지가 않다. 예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던 나무들이 고사를 했거나, 지정 해제를 당했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태풍으로 안해 쓰러진 통의동 백송.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었다(인터넷 검색)

 

천연기념물 제4호였던 서울 통의동 백송은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1993년 3월 24일 바람에 쓰러져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를 동반한 돌풍에 쓰러져 줄기가 부러져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 7월 19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였으나,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이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의 백송은 1965년 10월 15일 고사로 인해 지정 해제가 되었으며, 2003년 7월 4일 지정 해제가 된 원효로의 백송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었던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6호였다.

 

이 외에도 고사나 보존가치를 상실해 지정 해제가 된 천연기념물 재7호였던 서울 회현동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6호였던 경남밀양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4호였던 충북 보은의 백송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81호였던 개성리의 백송은 미수복 지역에 있어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90호이기도 하다.

 

 

조계사 대웅전 앞 백송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하고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수송동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이며,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옆에는 차들이 주차를 하고 있어, 매연으로 인한 생육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 밖에는 안된다는 백송. 수송동의 백송은 생육의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얼마나 더 오래 살아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 부터라도 백송 근처에 차량을 대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연기념물이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생물학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편 산 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이다. 나무의 수고는 약 20m,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는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이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큰 키로 자라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대부분 작은 나무만 볼 수 있다.

 

 사진 위는 11월 22일의 물푸레나무, 아래는 문화재청 자료로 잎이 무성한 모습의 물푸레나무 

 

마을에서 신목으로 섬기던 나무

 

11월 22일 오전, 모처럼 답사를 떠났다. 그동안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마을지를 쓰느라, 거의 한 달여를 답사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길을 나선 것이다. 화성으로 들어서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저수지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산 중턱에 잎을 다 떨군 물푸레나무가 보인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동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으며, 이 나무를 해하면 마을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온 나무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 속이 비어있는 나무의 밑동

 

나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이 눈여겨본다. 아마 나무라도 어찌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사진만 찍고 있다는 것은 것을 알고 안심을 했는가보다. 대개 마을에서 신목으로 삼아 섬기는 나무를 조사할 때는, 유난히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의 눈총 때문이다.

 

속빈 줄기 안에 또 작은 가지가 자라고 있어

 

수령이 350년이 넘어서인가, 나무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 밑동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거의 밑동의 반 이상이나 속이 비어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다. 나무도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는 수령을 다 채워 스러지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런 아픈 상처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륜을 느끼게 만드는 표피

 

나무 주변에는 굵은 동아줄을 쳐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은 차에, 마침 한 편 줄이 늘어진 것이 보인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 형태를 살펴본다. 350년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주민들의 서원을 들어주었을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새삼 그 위용에 압도를 당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을 일부러 가을이 지난 후에 찾아보기도 한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 그 줄기나 속을 일일이 살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의 한편에 이상한 것이 있다. 텅 빈 안으로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 안에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안에 줄기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다.

 

 원줄기의 빈속에 또 다른 가지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나무가 보인다 (붉은 원안)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무의 원줄기 안에 또 다른 줄기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 동안 수많은 노거수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마도 이 물푸레나무가 그 원 즐기 속에 또 다른 나무 하나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나무가 자식을 그 줄기 안에서 키우고 있는 것일까? 마치 새끼를 밴 듯한 놀라운 모습이다.

 

한참이나 그 속이 곳을 바라다보면서 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런 기이할 때가 또 있을까? 내년 여름에 이 나무의 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때는 뱃속에 든 것이 줄기인지 뿌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 분들도 만나 뵙고 나무에 얽힌 사연도 알아보고.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안녕동)에는 사적 제206호인 융능과 건능이 자리한다. 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화성 융능과 건능’이다. 융능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후에 의황제와 의황후로 책봉되었다)의 능이고, 건능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11월 10일(토),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인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함께 융건능을 찾았다. 미디어 다음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찾아간 융건능. 아마도 십 수 년 전 이곳을 들린 후에 꽤나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다. 문화재란 늘 돌아보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인사지만, 그 많은 문화재를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그저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보고는 한다.

 

 

융능 재실 안에 숨은 천연기념물

 

융건능 입구에 보면 매표소가 있다. 그 매표소는 재실의 한편 벽에 붙여 조성을 했는데, 매표소 옆으로 작은 협문이 있다. 협문은 매표원들이 출입을 하므로, 늘 열려있어 안을 돌아보기가 수월하다. 그 재실 앞마당에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개비자나무’이다.

 

사람들은 비자나무라고 하면 알지만, 개비자라고 하면 의아해 한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이다. 개비자는 개비자나무과 개비자나무속에 속하는 약 7종의 교목과 관목을 말한다. 비자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고 하여서 개비자나무란 명칭이 붙었는데, 얼핏 보면 그 생김새가 비자나무와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

 

우리나라에는 개비자나무(C. koreana) 1종만이 북위 38°선 이남에서 자라고 있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상록교목이다. 개비자나무는 보통 키가 3m 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융건능 재실 앞마당에 서식하고 있는 이 나무는, 키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른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개비자나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상태도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다고 하며, 또한 융릉 재실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2009년 9월 16일자로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었다.

 

 

문화재, 그렇게 관심이 없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돌 한개 풀 한포기도 놓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답사를 나가면 남들이 이렇게 표현을 한다. ‘미친 듯 돌아다닌다!’고.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문화재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시간에 문화재 하나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재실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곳을 들어가지를 않는다. 조금은 실망스럽다. 늘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을 하는 나이기에, 그래도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를 않다니. 어찌 보면 내가 잘못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 융릉이 조성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 이 개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하면 벌써 수령이 220년이 넘었다. 그렇게 그 재실 앞뜰을 지키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재실 안을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 밖에다가 그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표시 하나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는 그 가치를 계산할 수가 없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와 장인들의 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청천마을은 단일 성씨인 달성 배씨들의 집성촌이다. 100여 호가 살고 있다는 청천마을은 40대를 이어졌다. 마을 앞을 줄지어 선 고목들이 서 있는 청천마을. 이곳에 왜 이토록 오래 묵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일까?

 

처음으로 이곳에 터를 잡은 배희는 이곳에서 자손들을 번창시키고자 했는데, 서해의 해풍이 불어와 농사에 피해를 주었다. 먹고 살아야하는데 해풍으로 인해 집과 농사가 피해를 입었으니, 자손들이 번창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나그네가 마을 앞에 팽나무와 개서어나무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했단다.

 


무안읍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우측에 커다란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 있다.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청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이 생긴 지가 5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조 세조 2년인 1452년, 칠곡에 살던 배회가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마을이라고 한다. 청천마을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마을 유래비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많이 자란다. 팽나무는 생육이 좋고 25 ~ 30m정도까지 자라나며 병충해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팽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던 것이 주효했는지, 그 뒤로 농사가 풍년이 들고 자손들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현재 청천마을에는 팽나무 54그루, 느티나무 60여 그루가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팽나무는 생육이 좋고 25 ~ 30m정도까지 자라나며 병충해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에 만난 팽나무들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 상당 수 있다. 대개 남쪽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의 분포지 역시 남쪽에 치우친다.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팽나무(제161호),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팽나무(제309호),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팽나무(제310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황목근(제400호)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팽나무들이다.

 

흔히 동구나무로도 많이 불리는 팽나무는 마을 앞에 정자목으로 많이 심는다. 팽나무는 바닷바람을 잘 버텨내기 때문에 방풍림을 조성할 때 많이 식재를 하기도 한다. 청천마을의 팽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더욱 한 두 그루가 아닌, 50여 그루가 마을 앞을 일렬로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철 늦은 가을에 만난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그 나무 밑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이를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전설이 생각이 난다. 자손이 번성했다는.

 


  
현재 청천마을에는 팽나무 54그루, 느티나무 60여 그루가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청천마을의 팽나무들은 고유번호를 갖고 있다. 나무마다 걸린 번호표

 

500년 이상을 방풍림으로 마을을 지켜 준 청천마을의 팽나무군락. 나무마다 번호표를 달고 있다. 이미 고목이 되어 명을 다한 것들도 보인다. 외과수술을 한 나무들이 보여 이 팽나무 군락이 오래되었음을 알려준다. 높이 30여 m, 둘레가 평균 3m나 되는 팽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마을. 청천마을에는 또 다른 전설 하나쯤은 있을만하다. 내년 여름 팽나무가 무성하게 잎을 달았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천연기념물 제290호 괴산 삼송리 왕소나무. 삼송리의 소나무는 마을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작은 소나무 숲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12.5m이고, 수간 둘레는 4.5m이다.

 

이 숲에서 가장 커서 왕소나무라고 불리며,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줄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용송(龍松)’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삼송리라 부른 것도, 이 소나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인근에 이와 비슷한 노송 3그루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삼송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왕송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지킴이로 숭앙을 받던 소나무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매년 1월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며 새해의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한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에 대한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송리의 소나무 역시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주민들의 보호를 받아왔다.

 

이런 천연기념물인 소나무가 28일 전국을 강타한 태풍 불라밴으로 인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오전 9시까지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10시 쯤에 보니 뿌리 채 뽑혀 쓰러져 있었다는 것.

 

유리창보다도 못한 국보와 천연기념물

 

28일 하루 종일 모든 방송사들은 실시간으로 태풍의 진로와 피해상황 등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방송사들이 앞을 다투어 유리창이 깨지고 전기가 나갔다고 열을 올려 방송을 하고 있는 시간, 국보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지붕 기왓장들이 날아가고, 천연기념물 삼송리의 왕소나무가 뿌리 채 뽑혀버렸다.

 

그러나 방송에선 그런 것에 대한 보도 한 번 들을 수 없었다. 다만 YTN이 각황전과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일부도 피해를 입었다고 방송을 할 뿐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데 그까짓 문화재가 대수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600년 이상을 그 자리에서 지켜 온 소나무이다. 그 의미가 남다르다.

 

 

왕소나무를 애도한다.

 

600년이란 역사를 생각해 보자. 100년도 못 넘기는 인간들에 비해, 말없이 이 땅과 민초들의 삶을 600년이나 보아온 나무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즐거움을 알고 있었을까? 마을에서 서낭목으로 삼아 마을의 안녕을 빌어 오던 나무이다. 그런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송두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진출처 / 세종데일리

 

태풍이 올 때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들이 수난을 당한다. 지나고 난 뒤에 미쳐 간수를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사전에 방비를 할 수는 없었을까? 풍속이 50m이면 나무가 뿌리채 뽑히고, 전신주가 넘어간다고 방송에서 수도없이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다면 더 높고 더 바람을 많이 받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이 왕소나무는 당연히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닌가?

 

바로 이런 점이 쓰러진 채 널브러진 왕소나무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나무도 오래 묵으면 정령이 있다고 했던가? 오늘 이 왕소나무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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