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란 땅을 깊게 파서 물이 괴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하지만 우물은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물은 그 나름대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집집마다 우물을 꼭 파고는 했다. 물론 민초들은 그런 우물 하나를 판다고 하면 많은 경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을에 공동우물을 파서 식수원으로 삼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우물이 꼭 생명을 유지하는 식수원으로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옛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우물의 물맛이 좋으면 그 집 장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여러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우물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우물은 다 같은 것일까?

 

 위는 경주 김호장군 고택의 우물. 아래는 전남 보성 득량면의 마을 공동우물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어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우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가 하면, 산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옹달샘 등도 있다. 어느 곳을 가든지 당집 등이 있는 곳에도 제를 사용하는 데만 사용하는 우물도 있다. 예날 능원 등에도 제정 혹은 어정이란 우물을 팠다.

 

다양한 형태의 우물에는 또한 이런저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우물을 돌아보는 것만도 꽤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그저 우물을 마실 수 있는 물이나 떠먹는 곳쯤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우물에 대한 기록물 하나쯤을 남겨놓는다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인 듯하다.

 

 위는 서울 운현궁의 우물. 아래는 충북 증편 사곡리 우물

 

갖가지 사연도 많은 우물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생각 외로 많은 우물을 만난다. 그저 사진 한 두 장을 찍고 돌아섰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우물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 한권을 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별별 사연도 많은 우물들이다. 기회가 되면 우물만 한 번 엮어볼 심산이다.

 

여주군 북내면 한 골프장 안에는 ‘어수정’이란 우물이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로 귀향을 갈 때 마셨던 우물이라고 하여, 임금이 마신 우물이란 뜻을 갖고 있다. 충북 증평군 사곡리 마을에는 사람이 빠져도 빠지지 않고 떠 있다는 우물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잃은 어미가 다 죽게 되었을 때 꿈에 아이가 나타나 어미를 우물로 인도를 하고, 그 물을 먹은 어미가 기운을 회복하였다는 함양 지곡마을의 우물도 있다.

 

 
위는 함양 지곡마을의 종암우물, 아래는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성신사의 재정

 

이런저런 사연을 갖고 있는 우물들 중에 일반인들이 전혀 마실 수 없는 우물이 있다.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령전에서 만난 제정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는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제정은 복원을 한 것이다.

 

 여주군 북내면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유배시 마셨다는 어수정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11월 4일 파워소셜러 팸투어에서 만난 제정에 소셜러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선 우물의 형태도 남다르지만, 길게 물길을 내고 그 밑에 네모나게 물이 고이게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물은 맑아서 물고기를 넣어둘 정도이다. 팔달산에는 약수가 몇 곳이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의 물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령전 안에 있는 제향에 사용하는 물을 긷는 제정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우물. 그동안 참 다양한 형태의 우물들을 만났지만, 그동안 만났던 우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주 김호장군 고택에서 만난 천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신라 때는 절터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직도 우물은 제자리에 있다고)를 지키고 있는 우물과, 여주에서 만난 어수정, 그리고 화령전 안에 조성한 제정 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건조물을 지으면, 그곳에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있는 가신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수문장신이 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에는 용왕신이 있고, 마구간에는 우마대신이 자리한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조왕신이 있고, 물독에는 용궁각시가 있다고 한다.

 

대청에는 성주신이 있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면 삼신할미가 자리한다. 시렁위에는 조상신이 좌정하고, 안방의 벽에는 삼불제석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굴뚝에는 굴대장군이 있으며,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자리한다. 이렇게 집안에만도 수많은 가신(家神)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다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 신들은 사로 상응하면서 집안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화성에도 신이 있다.

 

가정에도 그 많은 신이 있는데, 화성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을 축성했는데 어찌 신이 없을 것인가? 화성에도 당연히 성을 지키는 신이 있다. 바로 서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에 모셔놓은 ‘화성의 신’이다. 성신사라는 명칭은 ‘성의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화성의 축성이 완료될 때쯤에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축조가 되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조는 7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정조는 성신사의 설치 후,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는 축문을 내리기까지 헸다.

 

사당의 조성이 완공된 후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1796년 9월 19일에 길일을 잡아 위폐를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성신사의 제사는 매년 봄, 가을이 시작되는 초하룻날인 행삭에 지내도록 하였다.

 

 

 

가을 빛 아름다운 성신사에 오르다

 

성신사는 일제 강점기에 훼파되었던 것을, 화성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4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신사를 복원하기 위한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2009년 10월에 중건을 마쳤다. 복원된 성신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짓고 문 좌우로는 5칸의 행각을 연결하였다.

 

10월 26일, 신풍루 앞에 서서 팔달산을 바라다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양편의 보호수가 일몰시간이 가까워서인가, 오히려 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성 행궁 옆 주차장을 벗어나 천천히 팔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물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정겹다.

 

일부러 차도를 버리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을 발밑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길을 벗어나면 좌측으로 성신사가 보인다. 아마도 일제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시기를 했는가보다. 많은 화성의 구조물들을 훼파한 것을 보면. 성신사의 솟을삼문을 들어서 정당 앞으로 가 고개를 숙인다.

 

 

 

성신사 주변을 돌아본다. 뒤편의 담벼락은 전돌을 사용한 심벽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 한편에는 제향에서 사용한 우물인 듯 육각형으로 조성한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속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팔달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제향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내년에는 날이라도 잡아 화성의 성신을 위하는 ‘성신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화성의 사라졌던 구조물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화성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될 텐데. 그때까지 화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검은 벽돌로 성에서 돌출시켜 쌓아올린 포루.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3층으로 지은 구조물이다. 포루는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이런 설명만 갖고는 포루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를 쏘는 포루가 있는데, 관리를 위해서 모두 잠가놓았다. 하기에 포루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포루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포루의 형태는 같게 생겼지만, 크기는 조금 다르다.

 

 

 포루는 성안에서는 맨 위에 전각만 들어나지만, 성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된 구조물이다.


 

3층으로 된 포루, 위용이 대단해

 

화성의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다. 맨 위에 총안을 낸 문은 판문(板門)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포루의 책임자가 있어, 적을 향해 공격을 지시하게 된다. 포루는 성 안에서 보면 맞배지붕이지만, 성 밖에서 보면 팔작지붕으로 그 형태가 다르다. 성 밖에서 보면 3층의 구조로 되어있지만, 성 안에서 보면 맨 위의 전각만 들어난다. 이 포루 안에는 몇 명의 군사들이 들어가 있었을까?

 

화성박물관 이달호 관장은 포루의 병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포루 안에 병사들이 몇 명이나 들어가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규모 등으로 볼 때, 한 층에 대략 5~6명 정도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2층 상설 전시관에는, 화성문화실에 포루의 한 면을 절개한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포루 안의 생김새와 그 안에 병사들의 모습이 모형이로 만들어져 있어, 포루의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과거 성벽 위에 있는 여장의 한 타에 5~6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을 보면, 아마도 포루의 한 층에 그 정도 인원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모형을 보면 맨 위층인 전각에는 포루 안에서의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과 총수들이 있고, 1층과 2층에는 불랑기를 가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임진왜란 전부터 사용한 불랑기자포

 

홍이포, 신기전, 녹로 로 등과 함께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861-1호는 육군박물관에 3점이 있으며, 861-2호는 서울역사박물관에 1점이 지정이 되어있다.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로는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 화포이다. 불랑기는 15세기 포루투칼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졌었으나, 이미 그 이전인 명종 때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불랑기자포에는, 자포 포신 표면 우측에 <가정계해 지통중칠십오근팔냥 장김석년(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포가 1563년에 제작되었으며 중량이 75근 8냥이고 장인 김석년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랑기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화성과 포루. 아마 당시 이들의 화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한 포루를 돌아보면서 과거 ‘정조의 꿈’이라는 화성이 더욱 달라져 보인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난 포루 하나로만도 가슴이 벅찬 이유이다. 역사 속의 산물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게 세월이 지나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

이산 정조는 화성을 축성할 때, 직접 화성축성 장소까지 행차를 하기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면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에 참배를 한 후 8일간의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 ‘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에 불을 밝힌 모습이다.

 

 

 

이산 정조의 꿈인 야조

 

정조는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명,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명,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명,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명,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더욱 장용영의 군사들은 가장 무예가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면, 그 훈련을 보면서 누구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훈련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야간 군사훈련

 

제49회 화성문화제의 둘째 날인 10월 8일. 오후 8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화성, 정조의 꿈 야조’는 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단의 숨소리와 마상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장용영 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보다 시연장을 더 넓혔다. 관객들은 도로건너 연무대 앞에 자리를 틀었고, 시연은 창룡문 앞 잔디광장 일원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올해 야조를 기대한 것은, 정조 당시 그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인지. 한 마디로 올해 야조는, 전혀 야조답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넓고 크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 등은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인 야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곳에는 정조의 꿈은 없었다. 그저 화려하게 포장된 그야말로 ‘총체공연’인 공연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처음 20여분 동안 무예24기 시범단의 모습은 늘 보던 대로였다. 늘 보아오지만 창, 검, 봉 등 <무예도보통지>에 보이는 무술과 마상재 등을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지만. 문제는 정조가 이곳으로 행차를 한 후이다.

 

야간군사훈련의 의미도 해석되지 않은 야조

 

그런 데로 연희가 시작되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창룡문을 화면을 삼아 스크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날고, 말을 탄 군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행기가 폭격을 하고 난리법석을 떤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징한 듯하다. 관람객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문에서 쏟아져 나온 무희들이, 창룡문 문루에서 떨어져 내린 긴 천을 끌어다 놓더니, 변형된 도살풀이를 추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넋이라도 달래 보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이때쯤엔 이미 ‘야조는 물 건너갔다.’라는 느낌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야간군사 훈련이 행해진다. 성문으로 쏟아져 나온 장용영의 군사들과 적들이 서로 진을 형성한다. 그리고는 ‘학익진을 펼쳐라’라는 호령과 함께 양편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성문 양편에서 발사가 되는 신기전은 폭죽에 불과했다. 신기전의 위엄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진배없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거기에는 장용영의 힘도, 정조의 꿈도 없었다. 결국은 이 마무리도 무예24기 시범단이 그나마 분위기를 살려주었을 뿐이다.

 

마지막은 더욱 가관이었다. 정조가 훈련에서 승리를 한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연희를 베풀라’고 명령을 했는데, 신칼을 든 무용수들이 나와 난리를 친다. 신칼은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추었다는 춤이다.

 

한 마디로 실망스런 야조였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진 야조는, 그렇게 허무함만 남기고 끝났다. 수원에는 화성이나 야조, 무예 24기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분들이 많다. 적어도 이렇게 광대한 무대를 사용할만한 야조를 생각했다면, 연결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물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해야만 했다.

 

 

실망만 가득안고 돌아서는데 야조를 늘 보아왔다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수원시민을 배제한 야조는 있을 수 없다. 수원시민들은 정조의 꿈에 당연히 동참을 해야 한다. 지난해에도 횃불을 들고 행사장에 참여를 해, 우리들의 행사라는 긍지를 가졌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서울사람들에게 퍼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수원시민들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연결도 안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 이런 야조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조대왕의 꿈을 찾을 것인가? 행사를 주관한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들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2013년은 수원화성문화제가 50회를 맞이한다. 제발 그 50회 야조에서는 진정한 정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야조를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제49회 수원 화성문화제가 10월 4일 오후 8시부터 방화수류정 성 밖 용연에서 전야제인 ‘용연지몽1’을 시작으로, 5일부터 7일까지 화성행궁과 화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수원천 일대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번 화성문화제에서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에 대한 꿈으로 축성된 화성에서, 정조대왕의 품었던 그 꿈을 아로새기고자 마련했다.

 

‘화성, 꿈을 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제49회 수원 화성문화제는, 10월 5일에는 화령전에서 열리는 ‘작헌의‘와 ’정조대왕 능행차‘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10월 6일에는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의 모습을 봉수당에서 볼 수가 있다. 셋째 날인 10월 7일에는 봉수당에서 열리는 ’혜경궁홍씨 진찬연‘의 모습이 재현 될 예정이다.

 

 

 

축제에 모인 분들에게 수원천을 권하고 싶다

 

3일 동안 열리는 화성문화제에는 외지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온다. 수원을 찾은 그 분들께 꼭 한 곳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주변에는 이런 저런 것들을 볼 것들이 많지만, 이왕 이곳에 왔으면 이것만은 꼭 한 번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에 꼭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 가급적이면 문화재 앞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지 말고, 조금쯤은 걸어서 가라고 권유한다. 조금 땀을 흘리고 난 뒤 만나게 되는 문화재, 그래야 조금 더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수문에서부터 수원천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갖가지 생태 체험을 할 수가 있다. 우선은 천변 양편으로 난 길이 풀로 뒤덮여 있다. 천천히 물소리를 따라 걷다가 보면,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그 뒤로는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을 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다.

 

새로 조성중인 다리 밑 벽화

 

조금 올라가다보면 매향교 밑을 지나게 된다. 아직은 완성되지가 않았지만, 이 다리 밑에는 벽화작업이 한창이다. 수원청개구리의 일화도 만날 수가 있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손짓을 한다. 매향교 옆에는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재미를 쏠쏠하게 느낄 수가 있다.

 

 

 

조금 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옛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줄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건너보는 징검다리. 아마도 50여 년 전쯤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아닐까? 북수문인 화홍문에 도착하기 전에 물오리 등도 만나게 되는데, 운이 좋으면 재두루미 부부와 만날 수도 있다.

 

‘방화수류정’, 이름만으로도 아름답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쫒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10월 5일부터 3일간 막을 올리는 제49회 수원화성문화제. 구경도 좋지만 아이들과 함께 수원천 길을 걸어 방화수류정에 올라보자. 또 다른 즐거움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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