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동문인 창룡문 성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은 누가 했으며, 석수는 누구, 그 외에 몇 명이 참여를 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실명제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성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기록을 해 두었다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적힌 기록을 보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 아무개가 언제부터 어디서 일을 했는지, 또 임금은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정조의 애민주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적은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에도 보인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을 한 화성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돌 하나 목재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해 놓았으며, 일일이 그림을 그려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에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도 꼼꼼히 기록을 해 놓았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형태가 여러 가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에 지워져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성벽의 기록으로 보아, 모든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머릿돌에 해당하는 회사명을 적어놓듯, 그렇게 책임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밥숟가락의 숫자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 단청에 들어가는 물감은 물론, 가마니와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등 화성성역의궤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고 적고 있다.  

 

 

 

2달만 일을 하면 초가집을 한 채 살 수 있어

 

정조는 화성 성역을 하면서 각 처에서 올라온 인부들에게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 축성 및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의 축성시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735냥4전3푼이었다. 이 가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게 2만4419냥7전으로 19%, 목수들에게는 1만3381냥으로 10.4%, 대장장이는 1만745냥8전7푼으로 8.3% 등의 순이었다.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 지급한 돈이 11만7520냥 8전7푼이었으며,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561냥5전7푼이 지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817냥8전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와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이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부들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화성이 딴 성과는 달리 치밀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명제와 함께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냥 겉도는 화성이 아니라, 화성을 하나하나 보아가면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융릉의 병풍석 / 사진자료 문화재청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년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년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년 11월 12일,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위)과 가을빛이 물든 곤신지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지난 11월 10일(토),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다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였다. 입구에서부터 융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가을이 내려 앉아있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정겹다. 누군가 가을은 발밑에서 온다고 했던가. 숲을 벗어나면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이 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을 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을 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도 가을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 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 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융릉 전경

 

융릉 앞에 조성한 석인도 사실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낸다. 효성이 깊은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당대의 최고 석공들을 데려다가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장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심사

 

11월 10일의 답사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동행을 한 답사였다. 그런데 곤신지를 지나 융릉의 홍살문 앞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사가 영 불편하다. 홍살문 옆에는 ‘판위’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다. 네모나게 조성을 한 판위는 임금이 능에 제사를 올리려고 찾아왔을 때, 능을 바라보고 절을 하던 곳이다.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는 사람

 

판위 앞에는 한 무리의 학생인 듯한 사람들이 서 있다. 문화재를 해설하는 분인지 학생을 인솔하고 온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판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들에게 문화재를 안내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할 수 있을까? 이 분 제대로 문화재 해설을 할 수 있는 소양은 갖추었는지 궁금하다.

 

 융릉의 정자각과 비각

 

석물 보러 갔다가 숲만 보고 왔지요.

 

정자각을 돌아본 후 비각으로 향했다. 비문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능으로 올라 석물을 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으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킨다는 푯말이 붙어있다. 물론 출입통제를 하는 목책 울타리도 쳐놓았다. 어이가 없다.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나게 조성을 했다는 융릉의 병풍석 등을 보러왔는데, 먼발치에서만 보아야 하다니.

 

그것도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뒤틀린 심사가 급기야 울화로 변한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능 근처에도 들어가 볼 수가 없게 만들다니. 여주 세종대왕 능에도 관람을 할 수 있는 관람통로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훼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 융릉과 블로거들에게 설명을 하는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 앞으로 보이는 통제 목책

 

참으로 어이가 없다. 보호란 무조건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결국 융릉을 먼발치에서, 능위로 보이는 것만 보고 온 셈이다. 융릉을 보러갔다가 가을이 깊은 숲만 보고 왔다. 바람에 날려 땅을 구르는 낙엽처럼, 씁쓸한 마음만을 안고.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안녕동)에는 사적 제206호인 융능과 건능이 자리한다. 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화성 융능과 건능’이다. 융능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후에 의황제와 의황후로 책봉되었다)의 능이고, 건능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11월 10일(토),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인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함께 융건능을 찾았다. 미디어 다음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찾아간 융건능. 아마도 십 수 년 전 이곳을 들린 후에 꽤나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다. 문화재란 늘 돌아보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인사지만, 그 많은 문화재를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그저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보고는 한다.

 

 

융능 재실 안에 숨은 천연기념물

 

융건능 입구에 보면 매표소가 있다. 그 매표소는 재실의 한편 벽에 붙여 조성을 했는데, 매표소 옆으로 작은 협문이 있다. 협문은 매표원들이 출입을 하므로, 늘 열려있어 안을 돌아보기가 수월하다. 그 재실 앞마당에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개비자나무’이다.

 

사람들은 비자나무라고 하면 알지만, 개비자라고 하면 의아해 한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이다. 개비자는 개비자나무과 개비자나무속에 속하는 약 7종의 교목과 관목을 말한다. 비자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고 하여서 개비자나무란 명칭이 붙었는데, 얼핏 보면 그 생김새가 비자나무와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

 

우리나라에는 개비자나무(C. koreana) 1종만이 북위 38°선 이남에서 자라고 있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상록교목이다. 개비자나무는 보통 키가 3m 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융건능 재실 앞마당에 서식하고 있는 이 나무는, 키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른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개비자나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상태도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다고 하며, 또한 융릉 재실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2009년 9월 16일자로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었다.

 

 

문화재, 그렇게 관심이 없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돌 한개 풀 한포기도 놓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답사를 나가면 남들이 이렇게 표현을 한다. ‘미친 듯 돌아다닌다!’고.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문화재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시간에 문화재 하나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재실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곳을 들어가지를 않는다. 조금은 실망스럽다. 늘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을 하는 나이기에, 그래도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를 않다니. 어찌 보면 내가 잘못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 융릉이 조성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 이 개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하면 벌써 수령이 220년이 넘었다. 그렇게 그 재실 앞뜰을 지키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재실 안을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 밖에다가 그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표시 하나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는 그 가치를 계산할 수가 없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와 장인들의 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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