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샤놓았다.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이 화재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 어진을 피난 시키기 위한 이안청. 복도로 운한각과 연결이 되어있다.


격자창을 내고 그 밑에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돌의 크기가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져 멋을 더한다.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화령전의 한편에 서 잇는 전사청은 화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드릴 때 정화구를 뜨던 우물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풍화당의 양편에는 마루를 높이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둔 방이 있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화성에서 가장 견고한 구간은 바로 화서문(서문)과 장안문(북문) 사이일 것이다. 우연히 이곳의 야경을 보게 된 후 화성의 진가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럼 지금까지 자랑 질을 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분들도 계실 것. 하지만 화성이야 전 구간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화성의 견고함을 보려면 서문과 북문 사이를,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을 보려면 이곳에서 방화수류정까지 일 것이다.

 

화성을 겉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미할 수도 있다. 성 밖으로 보이는 성벽과 치성 위에 올려 진 구조물들. 그 외에 무엇이 있느냐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은 단순히 성벽과 치성위에 올린 구조물이 다가 아니다. 화성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곳 안 되는 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공심돈, 우리나라의 많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축조물이다. 1796년 3월 10일 완공한 서북공심돈. 공심돈이 완공을 한 이듬해인 1797년 3월, 서북공심돈을 둘러 본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공심돈은 그 건축물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10호로 지정이 되었다.

 

원래 화성에는 모두 세 곳의 공심돈이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그리고 남공심돈이다. 하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동, 서북공심돈만이 남아있다. 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공심돈의 형태는 특이하게 조성해, 마치 화성 안에 작은 고성(古城) 하나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높은 성벽과 견고한 전각들

 

이곳의 성벽은 견고하다, 그리고 어느 곳보다 높다. 이곳은 평지에 축성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화서문서부터 장안문 사이에 북포루와 북서포루를 마련했다. 북포루(北鋪樓)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야경으로 보는 북포루는 절로 감탄이 나온다.

 

화성의 구조물인 '포루(鋪樓)'의 설명을 보자.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은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 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 11개(사방 각 4촌)를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고 하였다.

 

 

어찌 화성을 무시할 것인가?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시설은 성 5곳에 조성한 '포루(砲樓)'이다. 화성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놓았다. 이는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춰 뒀다가 위·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포루는 3층으로 축조가 되었는데, 지대 위에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인 '혈석(穴石)' 을 전면에 2개, 좌우에 3개씩 놓았다. 야경으로 보는 북서포루는 근처에 다가서기도 힘들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아마 이런 모습을 달빛에 적이 보았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혼이 백리나 달아났을 듯.

 

 

그렇게 야경에 취해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걸음을 빨리한다는 것은 화성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저만큼 장안문이 보인다. 그러나 그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다. 이곳에서 좀 더 이 아름다운 밤경치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비가 멈춘 밤하늘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보면 화성을 본떠 조형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 쪽으로 보면, 비와 함께 탑의 형태로 조형한 구조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이 조형물은 정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그대로 모사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원래 정조의 태실과 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에 소재한다.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태실은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한 비가 놓여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모형 태실과(위) 영월에 있는 강원 유형문화재 태실 및 비(아래) 

 

태실도 수난을 당한 정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이다. 전국에는 태봉, 태재 등의 명칭이 붙은 수많은 태를 묻은 곳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현의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실의 풍습은 매우 오래된 듯하나, 조선시대 이전의 태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이산은 조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여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현재 영월에 남아있는 정조의 태실은 192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태실을 창경궁 안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를 꺼내 관리상의 이유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태실과 태실비는 광산의 개발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에 소재한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원당형 부도를 닮은 정조의 태실

 

정조의 태실은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사찰 등에서 스님들의 사리 등을 모셔 놓는 팔각 원당형 부도를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꽃무늬나 도형을 장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난간을 돌렸다. 다른 한 점은 원통형의 석함 위에 정상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놓여 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에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그사이에는 구름문양을 채웠다. 비의 몸돌은 이수와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 육년시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이라 종서로 음각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뜰에 놓인 정조대왕의 태실과 비. 수원이라는 곳은 정조대왕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태실의 조형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다. 곁으로 지나치면서도, 안내판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왜 이런 것을 여기 세워야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역사, 특히 수원과 정조대왕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장안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당시 지금의 거북시장은 모두 영화역에 있던 마방(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옛 장소) 이었다고 합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의 설명이다. 9월 12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수원에 장시를 열고 있는 22곳의 재래시장 중에서, 넓이로 따지자면 1~2위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가 사방으로 뻗은 길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처음에 이 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북시장이란 명칭을 사용 한 것은 40~50년 정도입니다. 당시 이곳이 거의 한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 분의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북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자랑하던 곳

 

18세기 우리나라의 싱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였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평 규모에 말을 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고, 원은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다. 영화역은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영화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관리를 했을까? 장안문 앞에 있는 영화역에서는 단연히 정조의 능행차에 필요한 말들 수백 마리를 관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거북시장 인근이 모두 마방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52칸이나 되는 영화역과 역마산, 마장산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영화역은 찰방역이었는데 이를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일에 정조는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지시를 한다. 북문 밖에 역관을 설치하고자 하나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영화역의 규모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거북시장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웃음 띤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저희 거북시장이 1980~90년대 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번화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시장은 특성이 없는 재래시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저희들도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관광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거리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전신주 지중화사업, 간판정리 등의 예산도 확보되었습니다. 현재 용역을 마치고 11월이면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북시장의 옛 영화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 수막거리’라는 이름은 날마다 술집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구나 정조 당시에는 장안문 밖에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번화한 거리는 새삼 가늠할 수가 있다.

 

수막거리 형성이 거북시장을 살리는 길

 

차한규 회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길을 돌아본다. 현재 거북시장은 여기저기 온통 먹거리 집들만이 즐비하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특화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비해, 거북시장은 그런 것이 눈에 띠질 않는다. 꼭 이곳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찾아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옛 수막거리를 돌아본다. 과거 분내 풍기고, 웃음을 팔던 주모들이 있던 곳. 치미자락을 위로 끌어 잡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녹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특화된 거리가 필요할 때이다. 장안문을 나서 현 수성중학교까지 길에 뻗어 있었다던 새 수막거리. 그 거리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역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북시장 상인회. 아마도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수막거리를 감도는 날을 고대해 본다.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가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시간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문이 없지만 예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이 있었을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서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 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을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의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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