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은 그 축성을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조선조 정조 18년인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화성은 정조 이산이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되었다. 또한 아버지인 장헌세자를 향한 효심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축성 이전부터 몰려든 상권

 

성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하다. 화성은 축성을 할 이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축성이 시작되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필품은 물론, 물자조달을 위한 장거리가 형성이 되었다. 팔달문 앞에 있는 상권은 이미 정조 이산이 화성을 축성하기 이전부터, 이곳을 기점으로 난전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수문을 복원하고 있는 곳에서 그 위편 매향동 방향으로 수원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개울가에 세워 놓은 그림을 그려 넣은 안내판이 눈에 띤다. 팔달문시장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안내판은, 팔달문시장의 개장배경과 함께 정조 이산의 꿈이 이곳 상권에 함께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정조 이산이 직접 6만냥이라는 밑천을 대주어 이룩한 시장. 남문인 팔달문 앞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어 시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 시장으로 인해 경제를 살리고 더욱 강한 왕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 것이다.

 

전국의 선비상들이 몰려든 수원

 

유상, 일반적인 장사치들이 아니다. 유상이란 수원 팔달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선비들이었다. 물론 이 유상이란 말은 버드나무를 심은 수원을 ‘유경’이라 부른데서 비롯한 용어이다. 이들을 새롭게 조명해서 부르는 용어가 바로 유상이며, 전국 각처에서 모인 선비들로 이루어진 장사치들을 뜻한다. 그래서 이 유상들은 정조의 효심과 장조의 강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뜻에 동참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 유상들 중에는 윤선도 가문의 후손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참여를 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주었다.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갖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수원 팔달문 시장의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유상의 근거지인 수원의 팔달문 시장. 지금도 이곳은 팔달문시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7~8개의 시장이 모여 있는 상권의 중심지이다. 수원시는 이곳을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사업비 12억원(국,·도비 포함)을 투자해, 유상박물관과 팔달문시장 문화센터, 조형물 설치, IT 콘텐츠 제작 등 1차 사업을 완료했다. 또한 2차 사업은 12월까지 10개월에 걸쳐 추가로 진행될 예정이다.

 

 

 

팔달문 시장 등 재래시장 경쟁력을 키워주어야

 

그러나 이런 제반의 행위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수원시는 수원역사의 AK백화점을 비롯하여 역세권 상권을 조성한다며 대형 롯데쇼핑물 등을 허가를 내주었다. 거기다가 호매실 등에는 대형 매장인 홈플러스 등이 속속 입점을 위한 공사에 착수를 했다. 이러한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과연 기존의 상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찌보면 시가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유상선포식’ 등을 하고 재래상권을 살리겠다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그리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러한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대형마트 등의 영업시간을 한 달에 두 번정도 쉬는 날을 제정하고, 영업시간을 단축한다고 하지만, 그도 '눈 가리고 아웅' 이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대형 냉장고 등을 갖추고 있는 작금에 하루 정도 대형마트 등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재래시장으로 상권의 중심이 옮겨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재래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조치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이산 정조의 꿈은 220년이 흐른 지금 끝이 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세상은 변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유상선포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유상들이 옛 선조들의 당당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단 생각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이십사반(武藝二十四般)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조선조 정조(正祖)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간행 연대는 미상이다. 모두 4권 4책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는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편찬했다. 선조 31년인 1598년에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 武藝諸譜〉와, 영조 35년인 1759년에 나온 〈무예신보 武藝新譜〉를 증수하여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한 책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완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무예통지 武藝通志〉,〈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실제로 무기를 다루는 그림을 통해서 해제를 기록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무예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무술까지 기록하고 있어, 무예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24반의 무예는 본국검, 예도, 제독검, 쌍수도, 쌍검, 마상쌍검, 등패. 쾌검, 왜검교건, 월도, 마상월도, 협도, 장창, 기창, 죽장창, 기창, 당파, 낭선, 권법, 곤봉,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의 24반이 수록되어 있다.

24반 무예를 보여주는 사람들

3월 10일. 수원 화성 행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전과 오후 주말이 되면 하루에 두 차례씩 정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병기총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각종 무술을 보여주는 24반 무예의 시연이 잇기 때문이다. 행궁 앞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모여, 시연을 보면서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밤 무예를 시연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조 이산이 장용영의 군사들을 통해 강한 왕권을 추구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기 위해 140여권의 각종 서책을 인용할 만큼 다양한 무예에 대한 모든 것을 적었음을 보아도, 이 한권의 책이 대단한 무예총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4반 무예보기>














건물 안에는 많은 악기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편종과 특종, 편경과 특경, 운라, 공후 등. 화성 행궁에서 비장청을 지나면, ‘외정리아문’이란 현판을 달아놓은 문이 보인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한편은 담장인 ㄷ 자로 막힌 건물의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의 좌우에는 ㄱ 자 건물을 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빈 공간이고 위는 다락과 같이 꾸몄다.

그 건물 끝에는 방을 하나 드렸는데,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인형) 무엇인가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유기그릇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이곳을 처음에는 정리소라고 하였으며,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역대 임금이 행차 시 행사를 준비하던 곳

이 정리소는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아마도 ‘아문’이란 현판을 달아 놓은 것도, 유수가 이 정리소를 관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그만큼 이 행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이 깊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당을 지나 외정리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마루를 놓은 전각이 보이고, 그 안에는 ㄱ 자로 지은 광채와 같은 곳이 있다. 이 건물 안에 편경 등 제례나 연례에 사용하는 악기들을 진열하였다.




12차례에 걸친 정조의 능행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의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이산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정조 24년인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 때, 이 외정리소에서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이곳에 많은 악기와 유기그릇 등이 보이는 것은, 행사 때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연희를 베풀면 상당한 인원과 많은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연희를 베풀 때는 아마도 외정리소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했을 것만 같다.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 시계방향으로 편종, 편경, 아래는 우측부터 특종, 특경, 운라


행궁 안 한편에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에 보면 수 많은 무희들과 악사들,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행사 역시 외정리소에서 담당을 하였다는 것이다.

왕의 모든 행사를 담당한 외정리소

외정리소의 행사 담당은 정조가 승하한 뒤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 하였다. 아마도 이런 제의례를 할 때도 외정리소에서 맡아했을 것이다. 또한 그 뒤로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외정리소는 많은 왕의 행사를 맡아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형. 외정리소는 이런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1998년 12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된 외정리소. 행궁을 돌아보면서 만난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편경 등 많은 악기가 낯설지 않음에서인가(사실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악을 전공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재직을 한 적이 있기에 늘 이런 악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외정리소라는 곳이 정감이 가기도 한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과 휴양, 혹은 능원 등에 참배를 하기 위해, 정궁을 벗어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행궁은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왕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 다니던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이다. 기록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남군영의 건물과 신풍루에서 바라다본 남군영의 지붕(뒤편 좌측), 그리고 신풍루에서 바라다 본 북군영의 지붕(뒤편 우측. 맨 아래)


능원의 참배와 정조의 힘을 보이기 위한 곳

화성 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다. 화성 행궁은 단지 능원의 참배뿐이 아니라, 정조대왕이 양위를 하고 난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직접 살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그만큼 딴 행궁에 비해 정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궁과는 그 규모와 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한남정맥의 중조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남진하여, 광교저수지에 모이게 된다. 이 물은 다시 화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수원천으로 남진해 서해로 흘러든다.


남군영의 행각. 장용외영의 기마병들이 묵는 곳으로 방과 광(무기고, 식량창고 등), 100명의 장용외영의 기마부대가 묵었던 곳이다.


산과 물이 일체가 되어 있는, 그 기가 모이는 곳에 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지으면서, 진남루라는 행궁 정문의 이름을 ‘신풍’으로 바꾸어 달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제2의 고향으로 화성을 마음속에 둔 것이다.

정조의 위엄은 군영에 있었다.

정조대왕이 화산으로 행차를 할 때보면,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위엄을 느낄 수가 있다. 아마도 정조는 강력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 정조는 자신의 금군이었던 장용외영을 화성에 주둔시켰다는 것만 보아도, 정조가 생각한 화성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장용영은 정조의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를 혁파 한 후, 정조 9년인 1785년에 설치된 금군 조직이다.


남군영의 현판과 남군영 대청에 전시가 되어있는 당시의 갑주들


정조는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 발전시킨 군영을 조직하여,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편제를 조성했다. 이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화성에 주둔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풍루 좌우에는 군영이 자리하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좌, 우측에 자리한 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원래 이 군영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며, 정조 18년인 1794년에는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의 기마부대를, 화성과 행궁을 위주로 주둔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화성을 거점으로 한 강력한 군주상을 세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먼저 충직하고 강력한 군권만이, 강한 군주를 만들기 있었기 때문에.

화성행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누문이다. 처음에는 6칸으로 된 문을 세우고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정조는 1795년에 문의 이름을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정조는 이름을 고치고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리기도 했다.



2월 13일, 신풍루에 오르다

정조 18년인 1794년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는 누대 양편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하였다.

2월 13일(월) 화성 행궁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간 곳이지만, 신풍루는 아래에서만 사진을 찍었을 뿐, 위로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 때문이다. 화성사업소에 들려 신풍루를 촬영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신풍루로 올랐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


신풍루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123번지에 소재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인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는 신풍루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신풍루 위로 올라보니, 팔달문 밑으로 놓인 행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문밖으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도로와, 건너편 창룡문 쪽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아마도 이 행궁을 짓고 난 정조 당시에도 이곳 신풍루 앞은 이렇게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뒤로는 팔달산을 끼고, 앞으로는 넓은 도로를 볼 수 있는 곳, 이 신풍루의 누각에 올라 정조는 마음속에 담은 큰 뜻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장초석으로 바친 기둥, 장엄함의 상징

6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신풍루는 위로는 누마루를 놓고, 아래는 3개의 얼문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행궁의 정문 또한 남다른 신경을 써서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키만한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층 누각을 받치게 하였다. 안쪽으로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삼문은 판문으로 해서 달았으며, 문의 좌우에도 판벽을 둘렀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누각은 가파르다. 그만큼 누각을 높였다는 것이다. 누마루를 깐 이층에는 사방을 둘러 난간을 달아냈다.


이층 누각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남군영과 북군영의 지붕들이 보이고, 팔달산 쪽으로는 시원하게 공간을 내어 정전의 바깥 출입문인 좌익문을 만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행궁의 문인 신풍루. 아마도 이 신풍루의 이름을 직접 지은 정조는, 이 누각 위에서 강한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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