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포구에는 개들도 생선 한 마리씩 물고 다녔다’

 

강경은 예부터 조운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강경은 현재도 유명한 젓갈시장이 선다. 사람들은 ‘젓갈하면 강경’이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강경은 금강 가의 포구로 유명한 곳이다. 한 때는 강경은 현재의 논산보다 더 큰 상업의 중심지였다. 금강 가의 나루에는 색주가가 즐비했는데, 성황리에는 100여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김장생이 지은 정자

 

강경에서 금강을 건너 부여와 서천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 곳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면 서원이 있고, 서원의 우측 낮은 산 중턱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번지에 소재한 임이정은, 지금은 계단을 정비하고 들어가는 길에 대나무를 심어 놓았다. 임이정은 김장생의 『임이정기』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如臨深淵, 如履薄氷)」는 구절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이 말은 즉 자신의 처지와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라는 증자의 글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임이정은 ‘황산정’이었다. 임이정은 김장생이 이 정자를 짓고,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기 위해서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으며, 왼쪽 두 칸은 마루방이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을 놓았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을 유지해

 

정자에 오르니 금강이 아래로 흘러간다. 서향으로 지어진 정자는 정면 세 칸의 기둥사이를 동일하게 조성하였다. 온돌방 앞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위는 누마루로 깔고,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다.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기둥머리를 배치하였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67호인 임이정.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정자이지만, 그 안에 품은 뜻이 컸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자의 앞쪽에는 보호각 안에 세운 임이정기가 있다. 머릿돌을 올린 비석은 고종 12년인 1875년 김상현이 글을 짓고, 김영목이 글을 썼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보호철책을 둘러놓았으며, 주변에 큰 석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자 외에도 가른 건축물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낙향하여 지은 정자 임이정

 

사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김장생이 인조 9년인 163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임이정을 짓고 난 뒤 6년 뒤 일이다. 김장생은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다음해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의 산직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후 황산서원을 세우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그 뒤 1630년에는 가의대부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계 김장생이 ‘계축옥사’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이 때 임이정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금강가 높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한 임이정.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운 임이정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를 살얼음을 밟듯이 세상을 조신하게 살라는 김장생의 뜻이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황사 바람이 드센 날 찾은 임이정. 앞을 흐르는 금강은 언제나 말이 없다.

홍천에 있는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한데,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작산은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 그리고 눈 덮인 겨울산이 일품이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이 우거진 숲이 있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정도다.

 

 

명산 중 명산 공작산

 

한국 100대 명산 중 한 곳인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의 팔작지붕과 1364년 만든 사인비구의 동종,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고찰이다

 

수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효시는 신라 성덕왕 7년인 708년에 원효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로부터 전한다. 그 뒤 영서지방의 명찰로 꼽혔으며, 세조 3년인 145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뒤 ‘수타사(水墮寺)’라고 칭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공잠이 재건을 하였으며, 1644년 학준이 당우를 확장한 이래, 계철·도전·승해·천읍 등이 불사를 꾸준히 계속하여 1683년(숙종 9)에는 옛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와 같은 절 이름이 된 것은 1811년(순조 11)이며, 1861년(철종 12) 윤치가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빗속에 운치있는 수타사

 

지난 달 오후 비가 추적이는 날 수타사를 찾았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났지만 비가 와서인가 날이 어둡다. 홍천에서 양평으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에서 10km 정도를 공작산 쪽으로 향해 가면 수타사가 나온다. 오래된 천년고찰답게 수타사는 고풍스럽다.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대적광전은 보수가 끝이 난 듯 새로운 목재를 이용한 부분이 오히려 신선함이 감돌게 한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수타사 사인비구 동종이다. 사인비구 동종은 모두 8개가 모두 보불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 제11호로 지정이 된 수타사의 사인비구 동종은 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주성동종인 사인비구 동종은 단조롭기는 하나 그 주조법이 뛰어나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새롭게 조성이 된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 참례를 하고 주변을 살펴본다. 마음에 염원하는 바를 지극히 빌어보고 옆을 보니 새로 조성된 탱화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탱화를 그대로 새로 그렸는데 하단 부분을 보니 우리 풍물이 그려져 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에 놓인 기물로 보아 지장탱화인 듯하다. 불과 30여분 동안 정신없이 돌아 본 수타사. 천년고찰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듯하다. 다시 한 번 시간을 내어 한낮에 찬찬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산문을 나선다.

 

 

나오는 길에 들린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소조사천왕상이 모셔진 전각 안에는 사천왕이 세상에 따라붙는 온갖 사귀를 막아준다는 듯 미소를 보인다. 그래서 절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마음 편히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 서운산은 남으로는 서운면 청룡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북동으로는 석남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석남사는 가파른 경사에 층계를 놓고, 전각을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운치 있는 절이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19년인 680년에 승려 담하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성왕 18년인 876년에 염거화상이 석남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고려 광종의 아들인 혜거국사가 후에 크게 중건을 했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서운산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아 헤매다

 

마애불이 있음을 알리는 이졍표

 

석남사에서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보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석남사까지는 300m, 정상까지는 1.8km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애불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금광면 상중리 산22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 높이 5.3m의 이 마애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남사를 한 바퀴 돌고 종무실에 가서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대답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애불이 500m 앞에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우측으로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직진을 해도 역시 산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마애불을 안내하는 표시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리를 건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으로 난 다리를 건너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500m 이상을 더 걸었을 것 같은데도, 마애불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새 산 정성이 바로 앞에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마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나,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편이라는 것이다. 다리 건너에 작은 이정표 하나만 세워주었어도, 이런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석남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석남사에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의, 자연암벽에 입상을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길이 갈라지는 마애불의 밑에서부터 돌로 탑을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이 지역의 마애불들이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를 한 것에 비해, 석남사의 마애불은 전체를 돋을새김 하였다.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전체적으로는 육중한 느낌이다. 암벽에 꽉 차게 조각이 된 마애불. 3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놓았는데, 그 모습이 투박하다. 그리고 몸에도 신광이 표현이 되어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겼을 텐데, 아직도 뚜렷하게 형태가 남아 있다.

 

발가락이 시리겠네요

  

얼굴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두광과 삼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연화대 위에 올라선 마애불, 법의 밖으로 발가락이 돌출이 되어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연화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발가락 부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경스런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양 발가락의 표현이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돌출이 된 연화대 위에 법의에서 벗어난 발. 그리고 한 편에 다섯 개씩의 발가락.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사실적이다. 법의 속에서 삐죽이 내민 열 개의 발가락. 전체적으로 무거운 마애불을 이 발가락이 희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모두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육계는 낮고 어깨는 넓게 표현을 하였다. 목에 보이는 삼도는 필요 이상으로 두텁게 해, 마애불의 인상이 투박하면서 무겁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덥고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U 자형의 주름을 이룬다. 주름은 복부 밑까지 내려오다가, 다리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석남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 그 모습 그대로

 

내의의 가슴께 묶은 매듭. 투박한 모습이며 밑으로 잡은 주름도 투박하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묶었으며, 밑으로는 주름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매듭이나 주름도 상당히 투박해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내영인과 같은 형태의 수인이지만, 한 팔을 아래로 하지 않아 내영인은 아니다. 일설에는 법설을 할 때의 수인과 같다고 한다. 양 팔에도 법의가 팔에 걸쳐있는 형태다.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산을 한 바퀴 돌아 찾아와서인가, 저녁 햇살이 비치는 마애불의 모습이 유난히 자비로워 보인다. 인간세상 고통을 지금이라도 다 가져갈 듯한 미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것인지.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향이 연기를 허공에 퍼트리고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이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불입상 1기가 서 있다.

 

미륵불로 조성된 매산리 석불입상.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려 초기의 석불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상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석불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 쓴 사각형의 보개와 비례에 맞지 않는 보관

보개와 보관이 마주하는 부분에도 연꽃문양을 조각해 나름대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이 미륵당의 부처는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모습보다, 오히려 괴이하기까지 한 모습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석불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길게 조성한 눈도 조금은 어색하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을에서 마국산 줄기가 있는 부처박골로 들어가는 길. 마을을 지나 하천을 따라 500m 정도를 지나면 동물의 분뇨를 갖고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난다. 이곳에서 500m 정도를 작은 내를 건너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문화재 관리소'란 작은 가건물이 있고, 숲길 안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떨어진 나뭇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가, 떨어진 낙엽들이 그대로 쌓여있다. 밟는 촉감이 좋아 이리저리 길을 벗어나 낙엽을 밟아본다. 마을에서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바위인줄만 알 정도로 희미한 선각처리가 된 마애불. 현재 이 마애여래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바위 주변에는 누가 쌓은 것인지 여기저기 돌탑이 쌓여져 있고, 하천도 큰 돌을 이용해 잘 정비가 되어있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떨어진 우측에는 돌로 쌓은 작은 네모난 돌집 안에 부처를 모셔놓기도 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곳을 관리를 잘 해온 듯하다. 커다란 바위는 주변에 보호책을 쳐놓았다. 불상은 높이 7m 가 넘고 동편을 바라보는 편편한 바위를 다듬어, 부조 한 후 선각처리를 하였다.

 

  
부처바위에 선각한 마애여래좌상. 얼굴 주변에는 7겹의 두광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결가부좌한 모습.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상으로 보이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난 탓일까? 육안으로도 잘 식별이 되지 않을 만큼 선이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오른손의 수인은 육안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두광은 머리주위를 일곱 겹으로 동심원을 둘러놓았고, 몸 주위에도 두 겹의 신광을 표시하였다. 얼굴이 둥글고 눈은 가늘며 입술이 엷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애로운 아미타여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왜 이곳에 들어와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이런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어떻게 이 호젓한 산중에 이런 커다란 마애불을 새겼을까? 늘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리도 간절했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들어와 이런 작품을 조성한 것일까? 쉬지 않고 질문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부처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에 고려 초기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보이는 이 마애불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인가 이곳에 들려 마애불을 찾겠다고 비료공장까지 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로 길을 돌아간 적이 있다. 이렇게 선각처리를 해서 육안으로도 확연히 볼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때 비를 맞더라도 올라올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그때 비를 맞더라도 부처바위 마애불을 보기 위해 올라왔으며, 좀 더 정확한 선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를 맞으면 선이 더 확연하게 들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보면, 늘 후회를 하는 일이 생긴다.    

 

  
누군가 마애불 가까운 곳에 돌로 집을 짓고 부처를 모셔놓았다


부처바위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 산중에 있었다. 1979년 이천문화원에서 답사를 할 때까지, 이 산중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많은 시간을 이렇게 바위벽에 앉은 채로 기다려온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이 호젓한 산중을 찾은 나그네에게 진정 인연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엷은 미소를 띠는 미소가 한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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