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 - 4에 소재한 이주국 장군 고택. 집안을 돌아보면 안채에 붙은 부엌과 광을 손본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민속자료를 넘을 그런 집이다. 꾸밈도 그렇고 집안의 조경 수법이나 채의 구성, 공간의 사용 등이 매우 뛰어난 집이다. 더욱 사랑채 하나만 놓고 본다면, 얼마나 고쳤는지는 몰라도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주국 장군 고택

 

이주국 장군은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다. 이주국(1721∼1798) 장군은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조선조 경종 1년인 1721년에 원삼면 문촌리 현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는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 터 등이 전한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정병하씨 소유의 가옥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자로 길게 늘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바로 꺾인 담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다. 이런 집의 형태를 볼 때 과거에는 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안담이 있고, 중문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안채는 좌측으로 퇴를 달아낸 건넌방과 세 칸의 대청, 안방 그리고 꺾인 날개채에 부엌과 광을 두었다. 현재는 날개채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은 부엌방으로 개조를 하고, 맨 끝에 광도 방으로 개조를 하였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안채의 망와(望瓦)에서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 造作)'이란 글씨가 발견이 되어 영조 29년인 1753년에 최초로 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다락방이 정말 좋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는 - 자형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앞에서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은 방과 마루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좌측의 맨 끝은 다락방과 부엌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방문은 모두가 이중의 겹문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문은 모두 범살창으로 구성이 되어 단조롭다.

 

사랑채는 청방을 전체적으로 놓고, 가운데 두 칸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툇마루가 끝나는 곳에 한 칸의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으로 올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툇마루에 접한 부분은 간단한 문이지만, 양편의 창문은 모두 띠살문 네 짝으로 달았다. 이렇게 띠살문을 달아 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다락방을 사랑채의 주인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양편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문. 이 다락방이 누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누정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만한 공간이다.

 

사랑채의 다락방 밑으로는 개방된 아궁이가 있고, 그 위는 다락이다. 그런데 이 아궁이 역시 특이하다. 한편 다락방의 밑이 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짜임새 있게 제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네 칸으로 꾸며진 사랑채. 앞쪽 끝의 다락방은 양편을 띠살문으로 했다. 정자의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문은 겹문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문은 범살창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아궁이 다락방 뒤에 다락을 두고, 그 밑을 개방된 아궁이를 조성했다. 다락방 밑은 광이다.

 

날개 잃은 공(工)자 형의 안채

 

안채는 ㄱ 자형의 집이다. 전체적으로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세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꺾인 부분에 두 칸의 부엌과 광을 들였다. 현재는 부엌과 광은 개조를 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특이함은 바로 이 안채의 구성에 있다. 건넌방의 앞으로는 반 칸의 퇴를 냈다. 높은 마루를 깔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 문 위에 편액이 걸려있어 다가가 보니 '사당방(祠堂房)'이란 글을 적었다. 안채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을 달아내어 사당으로 꾸민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묵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주국 장군의 후손들이 떠나고, 현재의 주인이 이 사당도 묵는 방으로 사용한 듯하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공(工)'자의 한 날개가 잘린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기단이 모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마감을 했다. 건물의 주춧돌도 마름모형의 다듬은 돌이다. 이런 기단이나 주추로 보아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지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문채와 사랑채는 손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높게 한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반칸을 달아내어 높은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드렸다.

 
안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칸을 달아낸 방이 있다. 방문 위에는 사당방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세칸의 넓은 대청. 기단이나 툇돌, 주춧돌 등이 모두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메주가 익어가는 집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돌다가 안채의 건넌방 옆으로 돌아가니, 벽 앞에 메주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청소를 잘 안 해. 시골집은 다 그렇지 머'라고 하셨는데, 이런 메주를 보니 정말 시골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무에 걸린 메주들을 보면서, 고택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정감이 가는 집들이 우리 가옥인데, 우리는 점차 생활의 불편함만 늘어놓으면서 멀리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나 시골스러운 모습이다. 건넌방 옆에 메주를 달아 놓았다.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이 마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인 탑동 삼층석탑이 마을 뒤편에 서 있다. 이 탑 뒤로는 건장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나 있고, 옆에는 최근에 지은 절인 듯 대웅전이 보인다. 이 탑동마을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에 소재한 국보인 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상징인 삼층 석탑에서 연유가 된 명칭이다. 탑동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때 조성된 탑이다. 이 탑에는 전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탑동에 사는 여자장사와 장자골에 사는 남자장사가 서로 내기를 하여, 탑동마을 여자장사가 이기는 바람에 탑동 삼층석탑만 남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이 탑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난 후, 익산 금마지역에 미륵사지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절 서로 연모하던 총각장군과 처녀장군의 정이 두터웠으며,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탑골 삼층석탑을 쌓고 총각장군은 익산의 왕궁 탑을 쌓았는데, 처녀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기를 한 후 처녀장군이 보니, 총각장군의 탑을 쌓는 실력이 어설펐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총각장군에게 실망을 하여, 총각장군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말을 했다. 총각장군과 결별을 한 처녀장군은 수절을 하며,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탑을 ‘여장군탑’이라고 불렀다.

 

 

미륵사지 탑이 무너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전설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붙게 마련이다. 여자장사가 시합에 이긴 연후에 노모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전국을 다니면서 약을 구하려다 건장산 약수를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효(孝)’를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장군과 여장군의 이야기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여장군이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된 후 남장군도 미륵사지 5층 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이 두 탑이 서로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또 여장군이 이기자, 남장군탑은 부끄러움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설의 재미가 발견이 된다. 남장군은 미륵사지 오층석탑을 쌓았는데, 그 탑이 부끄러움에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이야기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반전을 계속한다.

 

 

탑동마을의 탑은 경사가 있으면 탑신이 열린다.

 

탑동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하여 탑을 쌓았다. 그런데 이 탑동 삼층석탑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일층의 탑신은 여러 조각을 합하여 몸체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 탑신이 열린다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조성을 한 몸돌의 틈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8,15 광복절에 이 탑의 몸돌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또 이탑이 열릴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층석탑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기단부의 받침돌 한편에 맷돌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기 이 삼층석탑의 기단석에 맷돌을 만든 것일까? 단층 기단에 삼층석탑, 그리고 상륜부 일부가 남아있는 탑동 삼층석탑. 그 기단부 초석에 새겨진 맷돌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곳에서 맷돌을 갈아 음식을 해먹으면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8,15 광복에 이곳에서 떡이라도 한 것일까? 많은 탑을 다니면서 이렇게 기단부에 맷돌처럼 조형을 한 것은 처음으로 본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한 것을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래저래 탑동 삼층석탑은 사람에게 궁금증만 한 아름 안겨주었다.

아침부터 때 아닌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기 시작한다. 날을 잡아 정자 기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다가 정오를 넘기고 결국은 길을 나섰다. 처음 계획은 영덕까지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빗발이 점점 거세지는 것이 계획대로 여정을 마무리할지가 걱정이다.

 

요즈음은 이상 기온인 많다가 보니 어디를 선뜻 나서기도 쉽지가 않다. 조금만 흐려도 길을 나선다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도 그런 까닭인데, 블러거라고 밝히신 분이 몸소 정보까지 주어가면서 정자 기행을 돕겠다고 하니 비가 온다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나선길이다. 어차피 길을 나섰으니 내려가면서 여기저기 들러보리라 마음을 먹고, 태백산 신흥사와 영은사를 거쳐 주지스님께서 주시는 차 한 잔 마시고 시간을 뺐기다 보니 생각 밖으로 시간이 지나버렸다.

 

 

바쁜 답사의 길, 그러나 여유로움도 만끽해

 

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7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데 길이 좋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길이 좋아서 고속국도와 지방국도를 적당히 이용을 하면 생각 밖으로 빠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 늦어진 길이니 국도를 따라가면서 동해의 풍광에 젖어보리라 마음을 먹고 구 길로 접어들었다.

 

가는데 까지만 간다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삼척시는 동해 바닷길을 달리는 7번국도 여기저기에 정자 모양을 한 쉼터를 만들어 놓아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에 몇 번인가 길을 멈추고는 했지만.

 

 

삼척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해신당이다. 남근을 깎아 바치는 해신당은 몇 번 들려보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관람을 해보자고 작정을 하고 입장권을 끊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 이미 날이 어둑해졌다. 해신당을 둘러 본 후 마음에 미련이 생겨 전시관 안내를 보는 분에게 혹 이곳에 정자가 없는가 물어보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물었는데 이분,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한곳을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그것도 일일이 약도를 짚어가며 메모를 해주시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오늘은 정자 한 곳도 찾아가지 못하나보다고 포기를 하던 차에 이렇게 안내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를 해야 할 일인가.

 

어둠이 깔린 빗길에 만난 정자

 

 

낮에 내려간 길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보니 날이 저문다. 해신당에서 30여 분을 달려 올라와 정라항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농협 건물을 끼고 우측을 바라보니 문화재 안내판이 보인다. 알려준 길은 조금 더 지나야하지만, 비는 쏟아지고 마음은 바쁘니 어찌하랴. 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안내판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려 한달음에 계단을 오른다.

 

작은 육향산 위에 있는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 비각과 함께 모여 있는 작은 정자 하나. 계단 밑에는 평수토찬비가 있고, 계단위에 척주동해비와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육각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현대적인 모습이다. 육향정(六香亭), 말대로라면 여섯 가지 향기가 있는 정자라고 풀이를 해야 하는데 무엇이 여섯 가지의 향기일까?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진다. 카메라 렌즈에 물이 묻어 찍기가 어려울 정도다. 불빛도 없는 육향정의 주변이라 겨우 사진 한 장을 찍고 뒤돌아서야 하다니. 그러나 저 멀리 고깃배의 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낮에 보는 동해바다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82-1에 소재한 육향정 앞에 자리한 척주동해비의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비다. 일명 퇴조비라 불리듯이 조류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다. 이 비가 훼손을 당하면 다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비를 신령하게 여겼으며, 이를 탁본을 떠 집에 모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 형산비의 대우수전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에 목판에 새기어 읍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 강홍대와 삼척 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이라는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빗길에 찾아간 육향정. 비오는 날 바닷가 비린내에 코끝이 간지럽다. 그렇게 하루 종일 비오는 길을 찾아다닌 이곳저곳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다.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정자 기행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36번지에 가면 성문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전북유형문화재 제 87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상은, 발견 당시에는 성문안마을 밭 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고, 대좌와 광배가 각각 떨어져 있었단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에는 전설이

 

2002년에 석불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높이 245㎝, 너비 98.8㎝, 두께 35.4㎝의 석불입상으로 밝혀졌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넙적하고 크다. 귀는 볼 아래까지 내려와 있어 풍만하다. 얼굴의 전면과 길고 큰 귀에 비해, 가는 눈과 작은 입은 어딘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 석불입상의 목에는 희게 붙여 놓은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다. 머리 부분이 6ㆍ25때 떨어졌던 것을 다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코는 떨어져 나가 부자연스러운데, 그 이유를 마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소가 달아났다는 것이다. 화가 난 농부가 소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하필 석불의 코를 맞혀 석불의 코 한쪽이 떨어져 나갔단다. 그런 연유에서인가 그 농부는 그날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 길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의 죽음이 석불에게 해를 입힌 벌이라고 하여, 석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부처인데, 그런 일로 인해 농부를 죽였을 리가 없겠지만, 그런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이 석불입상이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는 갓이다. 전설이야 늘 그렇듯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나면, 더해지면서 전해지는 것이니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다가 과장이 된 듯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 광배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쳐

 

현재 성문사 대웅보존에 모셔진 학정리 석불입상은 모습이 특이하다. 목에는 이어 붙인 밑으로 삼도가 보인다. 그리고 법의는 통견으로 했으며, 가슴부분에 U 자형의 주름이 잡혀있다. 두 손은 풍성한 법의 안에서 두 팔을 마주했다. 발밑까지 흘러내린 법의는 발목 부분에서 다시 U자형의 줄이 있고, 그 아래는 주름을 잡은 형태이다. 발은 법의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데, 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법상으로 가려져 있어 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이 학정리 석불입상의 광배는 새로이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뒤에 하얀색으로 마련한 광배가 어딘가 어색하다. 발견 당시 대좌와 광배가 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광배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조성한 광배가 영 딴판이다. 물론 석불입상의 격에 맞는 광배를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보기에도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목이 떨어진 석불좌상에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머리가 영 딴판이라든가, 석불입상에 회칠을 해 문화재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등, 우리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행위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치고 있는 경우이다. 학정리 석불입상도 제 광배가 조금 쪼개지고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원래의 것을 함께 놓았다면 그 가치가 지금보다 나았을 것 같다.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은, 새로 만들어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을 잘 지켜내는 것이다.

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찾아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든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중앙에는 부처를 새기고 양 옆에 협시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