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영월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영월군 수주면의 주천강(酒泉江)이 흐르는 곳에 요선정이라는 정자 옆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요선정 동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높이 3.5m의 여래좌상이다.

 

마애불 옆에 지은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진감이 넘치는 마애여래좌상

 

하나의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양감이 풍부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있다. 법의는 묵직하게 표현을 하였는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간략한 옷 주름을 선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두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가슴까지 올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과 평행하게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바위에 3.5m나 되는 크기로 돋을새김과 선각으로 처리를 한 마애여래좌상은 주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태로 새겨져 있다. , , 입 등이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상당히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진 머리광배와, 두줄의 선으로 표현된 몸 광배를 갖추고 있다. 하체는 지나치게 크게 표현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좌대에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상체의 표현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쳐나지만, 지나치게 커진 무릎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영월지방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보인다.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요선정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인 요선정.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주천강이 흐르는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은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목천IC 나들목을 나서 병천 방향으로 약 4km쯤 가게 되면 상량골 마을이 나온다. 기술대연구소 옆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은지리 은석골을 만난다. 첩첩산중이라고 해야 맞을 듯한 산위로 향하는 이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은석골에서 거리를 둔 은석산의 남쪽계곡에 은석사가 자리하고 있다.

 

은석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은석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은석사와 동일한 사찰로 추정되며, 현재의 절은 와편 및 초석 등으로 볼 때 1530년 이전에 건립된 절로 보인다. 414일 이 은석사에서 9회 은석사 진달래 화전축제를 연다고 해서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찾아갔다.

 

 

단출한 은석사에 손님들이 찾아들어

 

은석사를 찾아가는 초행길은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을 여기저기 돌아 찾아가니 주차장이란 작은 푯말이 붙은 곳에는 수십 대의 차량들로 들어차 있고, 여기저기 차를 세울만한 곳에는 모두 차들이 들어차 있다. 이곳은 은석산을 산행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잔칫집답게 사람들이 모여 전이며 화전을 들고 있다.

 

절은 의외로 단출하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거주하고 계시다는 은석사는, 본전인 보광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인 <천안 은석사 목조여래좌상(天安 銀石寺 木造如來坐像)>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2호인 <천안 은석사 아미타극락도(天安 銀石寺 阿彌陀極樂圖> 등 두 점의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조형한 목조여래좌상

 

목조여래좌상은 은석사 보광전에 모셔진 조선조 후기의 목조불상이다.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135cm, 어깨 폭 27.6cm로 불상의 얼굴은 방형이다. 불신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나 좁은 어깨와 넓은 무릎 폭으로 인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두 귀는 크고 목은 짧은 편이다. 짧은 목에 삼도가 뚜렷하다.

 

여래좌상의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였고, 별개로 만든 왼손은 발 위에 놓아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다. 오른쪽에 어깨위로 둥글게 걸친 변형 우견편단식 법의와 옷주름은 단조롭게 표현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여래좌상은, 허리를 곧추세운 채 굽어보는 듯한 자세와 단정한 이목구비,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신체 묘사 등이 특징이다.

 

 

목조여래좌상의 후불탱화인 아미타극락도

 

원래 은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이 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한다. 조선 영종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 묘가 절의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은석사에서 이 묘를 지키는 일도 함께 맡아했다고 한다.

 

목조여래좌상 뒤편에 걸린 후불탱화인 아미타극락도는 가로 185cm, 세로 145cm로 견본채색(絹本彩色)을 사용하였다. 이 아미타극락도는 부분적으로 변색되어있고, 군데군데 훼손이 심한상태이다. 하단부 좌우에 화기(畵記)가 남아있어, 함풍 11, 즉 철종 12년인 1861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후불탱화는 여래좌상의 후불탱화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화기에 적힌 것을 보면 태화산 마곡사 부용암에 봉안되었던 것을 옮겨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원의 이름 등은 훼손이 심해 알 수가 없다.

 

 

봄날 찾아간 은석산 은석사. 이날 진달래화전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짜장스님이 이곳에서 350명에게 스님짜장 봉사를 했다. 스님짜장을 맛보기 위해 길게 줄이 늘어진 것을 보고, 짜장스님의 인기는 갈수록 더해만 간다는 생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조성한 보광전과 삼성각, 그리고 두어 동의 요사 등이 있는 은석사의 봄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집을 딴 곳으로 옮기는 것을 두고 이건(移建)’이라고 한다. 집을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여 다시 그대로 복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체하는 과정에서 자칫 집에 손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건은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 안, 충북 유형문화재 제220호인 문의 노현리 민가는 바로 이렇게 이건을 한 집이다.

 

이 집은 원래 강릉 김씨 김승지의 종가였다고 한다. 그런 집을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이씨 가문에서 사들인 것 같다. 괴정 이현승 참봉이 이 집을 구해 살던 집으로, 1993년 손자인 이양훈 씨에 의해 이곳 문의문화재단지 안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이 집은 자 형의 안채와, 초가로 된 광과 사주문이 자리하고 있다.

 

 

초가로 된 광을 보면 부농이었다.

 

초가로 된 사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문채인 듯한 초가가 보인다. 모두 세 칸으로 된 이 초가는 한 칸의 마굿간과 한 칸의 방을 두고, 그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그저 어느 시골집에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그러나 안채 앞에 있는 광채를 보면, 이 집이 부농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모두 다섯 칸으로 된 광채는 초가이면서도 보기 드물게 잘 지어진 집이다. 모두 앞에는 두 짝 판자문을 달았으며, 넓이는 동일하게 한 칸씩이다.

 

 

기단을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광문을 구성한 목재가 단단하다. 이런 초가로 된 광채의 형태로는 상당히 뛰어난 치목의 형태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노현리 민가에 살았던 가정이 부유한 농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뛰어난 안채의 구성

 

노현리 민가의 안채를 보면, 아마도 옛날에 이 집에는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것 같다. 안채의 구성에서 이 집의 모습이 그려진다. 안채는 자 집이다. 일곱 칸으로 꾸며진 안채는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 대청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건넌방이 자리한다.

 

 

안채의 안방부터 대청까지 연결하는 툇마루는, 안채에서 주로 생활하는 여인들이 땅을 밟지 않도록 동선을 구성하였다. 툇마루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건넌방의 마루는 대청마루보다 높인 높임마루를 놓았으며, 그 밑으로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두 칸 대청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쌀독이며 반다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청의 뒤편으로는 두 개의 판자문을 내어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넌방과 맞닿은 벽 위로는 대청다락을 내어놓았다.

 

 

노현리 민가의 특징은 건넌방 밖으로 낸 반 칸의 마루이다. 건넌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누마루를 깐 정자마루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부녀자들이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한담을 나누고는 했을 것이다. 안방의 뒤편에는 툇마루를 놓아, 집의 좌우에서 부녀자들이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지금은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아마도 예전 노현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을 때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것 같다. 비록 넓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참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집이다. 지난 31일 찾아간 집이지만, 내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노현리 민가. 그래서인가 이 집과 닮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판서 김세균(1812~187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익(公翼)이고 호는 만재(晩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헌종 7년인 1841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고동 8년인 1871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후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수원유수가 되었다. 왕명으로 <기년아람>의 속편을 편찬하였으며, 저서에 <완염통고(琬炎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리를 옮기면서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

 

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뒤로 덕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세균 판서고가는, 원래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던 고가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집은 본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현재 집은 사랑채고, 안채는 이전 시 딴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이전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들은 워낙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일반적인 문화재들처럼 한 부분씩 떼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을 전체로 옮기는 기술이 발달이 되었지만, 아마 1983년경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니, 집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도 다 해체해 옮긴 후 다시 조립을 했을 것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사랑채만 남은 김세균 판서고가

 

김세균 판서고가는 몇 번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사람이 없어, 매번 주변을 돌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지 속 시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면 답답하다. 김세균 판서고가 역시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보아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월장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밖에서만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많은 고택을 돌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김세균 판서고가는 사랑채와 광채만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이집은 돌계단을 올라 일각문으로 마련한 대문이 있고, 대문의 우측에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본 광채는 세 칸 정도로 지어졌으며, 두 개의 판자문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앞으로 ㅡ자 형 네 칸으로 되어있고, 뒤로 날개를 붙여 세 칸을 달아내었다. 이 날개채의 끝은 사랑방으로 제사의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한 끝에 놓은 개방된 대청이 특별해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개방된 대청을 한 끝에 놓았다는 것이다. 안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겨우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축대 위에 발끝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안의 사랑채는 그래도 특별함이 있다. 대문간에서 바라다보는 사랑채는 좌측 끝에 툇마루를 더하여 뒤로 길게 대청을 드렸다. 이 대청은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을 내어 개방이 되어 있고, 밖의 벽으로도 전체를 문을 내어 누정과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는 두 칸의 방을 드렸는데, 그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깔았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툇마루에 연결해 판자벽을 달아 마감을 하였다.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은 이곳은,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는지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곳의 뒤편엔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아마 부엌의 용도로 지어진 구조물인 듯하다. 앞으로 보면 방인데, 뒤로 돌아가면 부엌인 이 방은 이 집의 구조가 특이함을 알게 해준다.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사랑채가 안채의 구실에 제몫을 다하는 집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사랑채이면서도 안채의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ㅡ자 형의 공간 네 칸에 두 칸의 방이 있고, 뒤편에 꺾인 부분에도 두 칸의 방을 두어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마 이 집이 원래의 안채와 사랑채를 그대로 다 옮겨왔으면, 지금보다도 더 품위가 있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고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으면 손을 보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고 조금씩 변해가는 고택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난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사고를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김세균 판서고가를 돌아보면서, 툇마루에 놓인 메주뭉치가 보기 좋아 혼자 웃는다. 남들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 다닌 적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만큼 고택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만.

충북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마애불을 찾기 위해 삼방리를 찾았다. 삼층석탑과는 달리 같은 삼방리인데도 그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중간에 마땅한 안내판이 서 있지를 않으면, 문화재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삼방리 마애불을 찾을 때도 몇 번이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다녔다.

 

마을에서 안내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 시골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없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어물어 찾아간 삼방리 마애불. 밑에다가 차를 대고 올라가라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길이 보이기에 그냥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다. 올라가니 길도 없고, 차를 돌릴 만한 곳도 없다. 산길이라 눈은 쌓였는데 후진으로 내려오려니, 가슴이 다 서늘하다. 자칫 조금만 실수만 있어도 계곡으로 처박을 판이니. 

 

바위에 새간 마애여래좌상   

  

엷은 부조로 조각한 마야여래좌상.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엷은 부조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선각수준이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3.7m, 폭 4.1m, 두께 2.4m 정도의 바위의 한쪽 면에 새긴, 높이 3.5m의 마애여래불이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이 마애불은, 앞에 선 안내판이 없다면 주의 깊게 보아야만 한다. 그냥 지나치면서 이 마애불을 보면 거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깊은 산속에 이런 마애불을 새겼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마애불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왜 옛 선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 이렇게 산중에 있는 바위만 보면, 마애불을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길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깊은 산중 암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면서 늘 갖는 의문이다.

 

고려시대에 조각을 한 수많은 마애불들을 보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부처를 새길 만한 바위만 보이면 어김없이 새겨진 마애불들. 이렇게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무엇을 기원했던 것일까? 아마 고구려의 후손들이기에 잃어버린 북녘 땅을 되찾으려는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삼방리마애불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충북지역의 마애불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 마애불들은 모두가 거대마애불로 조성이 되어있으며, 비교적 간결한 선각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놓은 독특한 수인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는 사각형이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몇 가닥으로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의 선과, 도식적인 꽃잎의 형태에서는 조각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마애불들의 대체적인 모습들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단아한 체구와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는 어딘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의 마애불치고는 수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얼굴부분은 대체로 양각이라기보다는 선각에 가깝다. 앞에서 보기에는 선각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조금 도드라지게 조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에는 군의대의 매듭이 보인다.

 

전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 비바람에 씻긴다면, 이런 형태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다. 마애불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덕분에 얼음판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으니 고맙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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