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도화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고가는 조선 말기의 목조 기와집이다.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이 도화리 고가는 청풍면 도화리에 있는 집을 1985년 수몰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도화리 현장에 있을 때에는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가 있었고, 뒤뜰과 옆 마당에 밭이 있었던 집이었지만, 현재는 집만 옮겨온 상태이다. 이 집은 냇돌로 기단을 쌓은 집으로 왼쪽으로는 방, 부엌, 방이 배치가 되고,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방 두 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왼쪽의 방은 사랑방으로의 기능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방은 이 집의 사랑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툇마루를 놓기 마련인데, 도화리 고가의 왼편 방은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툇마루는 앞쪽과 집 뒤편까지 이어져 있다.

 

  
▲ 사랑방 툇마루가 달린 이 방은 사랑방으로 싸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랑방 툇마루가 놓인 곳에도 문을 내고 앞 뒤에도 각각 문을 내었다. 툇마루는 집 뒤편까지 이어진다.


문 앞 사랑방을 지나면 부엌이 있는 것도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즉 안방과 구별을 두기 위해 중간에 부엌을 두었다는 점이다. 사랑방은 툇마루에 문을 두고, 양편으로도 문을 내었다. 문을 모두 개방하면 삼면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이 되었다. 충실한 사랑방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는 셈이다.

 

판자벽으로 된 부엌

 

사랑방과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대청 건너의 두 칸의 방과 연결된 부엌이 있다. 그런데 이 부엌은 앞뒤 벽을 판자로 막았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고가 중에서, 이렇게 판자벽을 사용한 집은 오직 도화리 고가뿐이다. 이 부엌은 앞뒤로 나 있는 문을 중심으로 대청 쪽은 일반 담벼락을 사용했지만, 문에서 바깥 부분은 모두 판자벽으로 조성했다.

 

  
▲ 부엌 판자벽으로 꾸민 부엌. 앞 뒤가 다 판자벽이다.

  
▲ 부엌의 뒤편 부엌의 뒤편 판자벽에는 구멍이 나 있다. 까치구멍도 충실히 만들어 놓았다.


앞쪽의 부엌 문 위는 개방을 하였고, 뒤편의 판자벽은 이단으로 나누어 문 위로는 짧은 판자를 사용했고. 그 밑으로는 긴 판자를 사용했다. 이 부엌의 담도 문 쪽의 바람이 마주치는 담에는 심벽(心壁)으로 꾸몄다. 바람이 들어올 정도로 틈새가 벌어진 부엌에 심벽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모습이 오히려 이집의 멋으로 보인다. 이 판자벽을 막은 판자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다.

 

도화리 고가에는 두 곳의 부엌이 있는데, 모두 양편으로 문을 내고 까치구멍도 충실하게 아래편으로 두었다. 사랑방 쪽의 까치구멍은 바깥쪽으로는 이층으로 내어 환기가 빠르게 만들었다. 이 부엌에는 아궁이 반대편에 판자로 만든 마루를 중간에 놓아 그릇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 부엌마루 부엌에는 중간에 마루를 놓아 그릇이나 상 등을 올려놓고 아래는 장작을 쌓아둔다.

  
▲ 까치구멍 도화리 고가의 안방에 붙은 부엌에는 이층으로 된 까치구멍이 있다.


대청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선조들

 

고가를 돌다가 보면 대청 위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지른 것을 볼 수 있다. 그 두 개의 가로지른 나무는 때로는 끈으로 묶어 놓은 것도 있고, 아주 고정을 시켜 놓은 것도 있다. 세 칸이나 되는 도화리 고가에도 양편에 이렇게 가로지른 나무가 있다. 그 가로대 위에는 멍석이나 상 등을 올려놓았다. 넓지 않은 집에서 대청의 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 대청 대청을 적절히 이용한 도화리 고가

  
▲ 대청 가로지른 나무 위에 갖가지 물건을 올려놓았다. 좁은 집을 적절히 사용한 지혜다.


아름다움과 보온, 일석이조인 심벽

 

고가들을 돌면서 보면 아름다운 심벽들이 있다. 이 심벽은 돌과 백회 등을 이용해 조성을 한다. 도화리 고가의 심벽이 남다른 것은 바로 냇돌로 심벽을 쌓았다는 것이다. 일반 돌이 아닌 냇돌로 심벽을 쌓기는 더욱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정성을 드린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야기다. 이 심벽은 벽의 두께가 두꺼워져 보온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보온과 아름다운 집을 꾸밀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 심벽 도화리 고가의 심벽은 냇돌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그 심벽이 아름답기도 하고, 보온의 효과도 높인다. 또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을 막기도 했단다


도화리 고가를 돌아보면 평범한 가운데 재미가 있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것 하나에도 선조들의 지혜가 보이기 때문이다. 도화리 고가의 특이함은 바로 냇돌로 기단과 심벽을 치장한 집이라는 점이다. 

고택 답사를 하기 위해서 3일에 한번 씩은 답사를 나간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집의 구조를 찍고, 전체적인 정경을 촬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답사를 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졌다.

 

하나하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조금만 특이한 것이 있으면 몇 장이고 담아온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답사의 형태가 달라지고 나름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은 고가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중전리. 이 고가를 찾기 위해서 애를 먹었다. 번지가 나오지 않고 중전리라고만 소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큰 길에서 찾아 들어간 중전리.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마을 분들에게 이곳에 고택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몇 바퀴를 돌아보았지만, 고택 같은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다보니 좌측으로 중정리라는 이정표가 또 보인다. 그 길로 따라 들어갔지만, 길은 구불거리고 마을에 집이라고는 몇 채 되지 않는다. 차를 돌리려는데, 저 안쪽 산 밑에 초가가 보인다. 중전리가 지역적으로 넓어, 처음 찾아간 중전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니 큰 마을에서는 모를 수밖에.

 

 

중전리 고가는 한 마디로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신다. 집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대문채의 우측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대문의 좌측은 판자벽으로 막은 두 칸의 외양간과 헛간이다.

 

사랑채는 대문에서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그 끝에 터진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의 두 칸 방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다. 주위에 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터진 대청에서 주위의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대문채에 지붕은 이어지고 벽이 없이 꺾어진 방들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ㄴ 자형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채에 살림방을 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가 있는 대문채는 ㄴ 자로 꺾여있다. 그런데 대문 옆에 있는 헛간과 이어지는 부분은 지붕만 있고, 한 칸 정도가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한데 아궁이가 있으며, 두 칸의 방이 있다. 그리고 까치구멍을 낸 광이 있고,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는 안채의 건넌방과 마주하고 있는데, 현재 이 집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의 이야기로는 이 사랑채에 연결된 방이 살림방이라는 것이다.

 

집의 구조로 보면 행랑채에 해당하는 형태로 되어있지만, 이 방이 살림방이라는 말에, 안채에서는 살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채는 사람이 살았지만, 안주인이 이 사랑채의 꺾인 방에서 살림을 했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 안채로 가려면 판자로 막은 바람벽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대문을 열어도 직접적으로 안채를 볼 수는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되어있어, 중전리 고가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 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의 건넌방에서 살림방으로 연결이 되다

 

중전리 고가의 집의 구조는 남다르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는  마당 안쪽으로 방문이 나 있는데 비해, 이 안채의 건넌방은 안마당 쪽으로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그리고 사랑채의 꺾인 날개채의 끝에 달린 마루와 이어지는 곳에 방문이 나 있다. 즉 안채의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건넌방에서 이 살림채로 동선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꺾이는 부분에 안방과 있고, 다락을 둔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6칸의 집이지만, 방은 건넌방과 두 칸인 큰 안방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청 끝 안방의 앞부터 부엌의 까치구멍까지 이어서 툇마루를 놓은 것도 특이한 구성 형태다. 부엌에서 뒷문을 통해 안채의 뒤편에 있는 장독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중전리 고가의 색다른 형태이다. 대청의 안방 앞에는 대나무로 시렁을 놓아 병풍을 올려두었다. 우리의 고택 중에는 대나무 시렁을 둔 집이 상당수 있다.

 

 

방앗간이 있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는 외딴집이다. 금성면 중전리의 큰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래서인가 이 고가의 안채와 꺾은 날개채의 터진 부문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초가로 지은 방앗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채는 디딜방아를 놓은 곳과, 곡식을 쌓아두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었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중전리 고가는 안채의 뒤편에 돌로 축대를 쌓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다.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는 원래 초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기와집으로 꾸며졌다. 또 하나 이 중전리 고가에는 외곽담장을 두르고, 그 안으로 대문을 낸 것도 색다르다. 아마 이 곳에 사랑채를 두었기 때문에, 외곽담장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외곽담장은 안채의 부엌 끝과 맞물려 있어, 사랑채에서는 안채의 뒤편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현재 중전리 고가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의 구조는 특이하지만, 원형이 바뀐 것이 중요민속자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모악산에 오르면 꼭 한 가지 빠트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전북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대원사 용각 부도를 찾는 일이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용각 부도는, 용을 새겨 넣은 조각솜씨로 보아 당 시대의 고승의 부도로 여겨진다. 이 용각 부도를 찾아보는 것은 뛰어난 조각솜씨도 일품이지만, 찾아볼 때마다 조금씩 색다른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다

 

이 용각 부도는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기단위에 옥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상륜부는 부분적으로 손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백색 규암으로 조성한 이 부도는 석질이 연약하여 많이 마모가 되었다. 높이 187cm의 크지 않은 이 부도는 대석은 땅에 묻혀있다.

 

부도 옥신의 위아래에는 띠를 두르고 있으며, 하단의 띠 위에는 18개의 겹으로 된 연꽃을 둘러 새겼다. 중앙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 솜씨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섬세하게 하나하나 금방이라도 곧추세울 듯한 비늘이 온몸을 덥고 있는 용. 두 마리의 용은 그렇게 몸을 비틀고 탑신을 감싸고 있다.

 

두 마리의 용이 옥신을 휘감고 있다. 비늘 하나하나도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두 마리의 용은 발톱을 세우고 여의주를 다투고 있다. 

 

머리는 뿔이 나 있으며 입 부분에는 길게 수염이 나 있는데, 이 또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두 마리의 용은 발로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승천을 할 만한 이 두 마리의 용은 몸으로 부도를 감싸고 있다.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대원사 용각 부도. 언제나 들러서 돌아보고는 하지만 늘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것은 계절이나 일기에 따라서, 그 용이 보이는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정말 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이 부도가 달라진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용각 부도의 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때문인가 보다.

 

 옥신의 아래는 띠를 두르고 18개의 연꽃을 새겨 주위를 둘렀다

 

이것도 용처럼 생겼는데?

 

대원사의 향적당 뒤를 돌아 부도가 있는 산으로 발을 옮겼다. 대원사에는 모두 6기의 부도가 있다. 향적당 뒤편 모악산 중턱에 용각 부도를 비롯해 4기가 있고, 20m 정도 위에 2기가 있다. 부도는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보호철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용각 부도를 돌아보다가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용각부도 서쪽 하단부에는 흡사 새끼 용으로 보이는 조각이 있다. 머리와 뿔 등이 보인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용처럼 생겼다. 용각 부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한편 용머리가 있는 밑으로 영락없는 작은 용 한 마리가 있는 것 같다. 반대쪽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조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용의 머리에 뿔이 난 듯한 모습이다.

 

옥신의 상부에도 띠를 두르고, 밑으로는 구름을 새겨 넣었다.

 

대원사 용각 부도를 갈 때마다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볼 때마다 무엇인가 다른 점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는 몰라도, 문화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하고 한날 온 땅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런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신기해 들여다보고는 하는 것도, 아직은 더 돌아다닐 힘이 남아있기 때문인가 보다.

 

부도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괜히 혼자 헛웃음을 날린다. 참으로 허황된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용이 새끼용을 낳았나?' 하는 생각 말이다.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올해로 꼭 500년이 되었다. 물론 그동안 집의 형태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을 지은 후, 여기저기 달라진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행랑채가 없다거나 사랑방을 감싸는 외곽 담이 없는 것을 보면, 처음에 이 고택을 지은 후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정무공 오정방 고택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다운 집이다'라는 찬사를 할 수 밖에 없다. 가옥의 구성이 그러하다. 현재는 대문을 걸어 외곽 담장을 두르고 있다. 그 안에 대문채가 자리한다. 대문을 걸어 사랑채 쪽으로 나간 또 한편의 담장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사잇담이 되었다.

 


이 고택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정방(1552 ~ 1625), 오상(1512 ~ 1573), 오두인(1624 ~ 1689)과 같은 해주오씨의 명현들이,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오정방 고택은 처음에는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52번지에 세웠으나, 조선조 효종 1년인 1650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장대석 기단이 돋보이는 사랑채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안채와 붙어있다. 장대석 기단이 이 집의 견고함을 말해준다.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별채로 구성되지 않고, 안채와 단일채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ㄱ 자형의 건물에 - 자형으로 사랑과 대청, 안방을 두고,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둔 형태다.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을 4단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두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측면과 앞면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방이 끝나는 부분부터 측면으로는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사랑의 앞의 툇마루는 안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안채와의 구분을 사잇담으로 나누고, 그 마루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사랑채의 뒤로는 조금 비껴서 사당채를 꾸며 놓았다. 사당채는 1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별도의 담장을 둘러놓았다.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사당채. 현재는 독립채로 되어있으나, 처음에는 바깥 담장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잇담으로 가른 사랑채와 안채

 

오정방 고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사잇담이다. 이 사잇담은 대문에서 시작해, 안채로 가로지르며 형성이 되었다. 사잇담이 끝나는 마루에 문을 달아 안채와의 경계로 삼았다. 툇마루는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랑채와 사잇담이 만나는 곳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고, 툇마루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방과 대청 사이에도 문을 달았다. 사랑채에서 툇마루를 따라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쪽문을 자나야만 한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툇마루. 이 마루는 두개의 쪽문을 달아 안채의 출입을 통제했다.

 
사잇담 안에 있는 한 칸 방의 용도는?

 

문제는 이 사잇담 안에 있는 방이다. 도대체 이 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툇마루는 사랑채에서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같은 높이의 누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마루는 이 툇마루보다 낮게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이 한 칸의 방 앞에 또 다시 문을 달아, 안채와 구분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또한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드렸다.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사랑채와 안채의 사잇방. 이 방을 혹 정자처럼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집 안에 딸이 사용을 했거나, 안주인이 아닌 여인네가 사용을 한 것은 아닐까?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 온다고 했던가? 결국 이 방에 대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혼자의 즐거운 상상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사잇담이 있고, 사랑채에서 안채로 오려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다.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로 보여

 

전체적인 집의 구조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 자 형으로 지어졌으며, 대문을 두고 옆으로 두 칸의 광이 마련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처음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만한 집에서 일각문으로 대문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두르는 외곽의 담장이 없다는 점, 그리고 행랑채가 없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현재 오정방 고택의 대문은 과거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 옆에는 두 칸의 광이 있다.

 

격자살 창호가 아름다운 부엌

 

격자살 창호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된 창호를 말한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내는 이 창호는, 우리 고택에서 흔히 보이는 창호의 형태다. 오정방 고택의 부엌을 보면 이 격자살 창호를 이용해 멋을 내고 있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보다 부엌이 상당히 큰 형태로 꾸며진 오정방 고택이다.

 

안방에서 달아 낸 부엌은 3칸 정도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위를 다락으로 꾸며 모두 격자살 창호를 달아냈다. 중앙에 부엌문을 달아내고, 부엌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또 하나의 작은 격자살 창문을 내고, 좌측으로는 까치구멍을 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락 전체를 격자살 창호로 문을 달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두칸의 마루와 안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 안채다. 부엌은 격자살 창호를 달아 시원하게 연출했다.

 
 
사잇담에 작은 구멍 하나, 눈을 끌다

 

집안 곳곳을 돌다가 보니, 사잇담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그저 지나치기가 쉬운 것이, 그 앞에 오정방 고택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것 같은 이 작은 구멍. 담장 밑에 있는 이 작은 구멍은 물론 배수구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배수구 하나에도 미를 생각했던 우리네의 가옥.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를 창출해낸 마음일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에서 406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공근면 상동리 496-3에 소재한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는 석불을 도로 옆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이 상동리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앞으로는 금계천이 흐르고 있고, 옆에는 상동리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은 잘려나가 흩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려 다시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머리 부분 이전에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 자비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의 신체부분을 조성한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도, 신라 전성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 위에 올려 왼손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의 형태는 부처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상징이다.

 

남아있는 신체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런 손 모양과 당당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의 유려한 옷 주름 등에서도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양어깨를 거쳐 무릎에 이르는 선이 유려하다. 이 석불좌상은 그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경에 뛰어난 석공에 의해 조상된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8각 연화좌인데 하대는 안상을 새겨 넣었는데,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그 위로는 두장의 꽃잎이 아래를 향하게 조각을 하였으며, 연꽃을 새긴 원형의 상대와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중대는 전형적인 9세기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석불좌상에 비해 좌대가 조금 왜소한 듯하다. 이 석불좌상은 부드러운 옷 주름과 8각의 대좌 등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석탑과 함께 모셔져

 

석불좌상의 옆에는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의 기단은 이단으로 되어있으며, 아래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에 두 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위기단은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 조성을 해 끼워 넣었다고 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들려 있다.

 

 

이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일반적인 밋밋한 형식으로 조성을 한 삼층석탑은 상륜부는 남아있지가 않다.

 

두상을 잃어 새롭게 조형을 해서 올린 상동리 석불좌상. 뛰어난 조각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 조성한 머리로 인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했다. 흔히 요즈음 말로 ‘훈남’이 된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할 때 만나는 이런 문화재로 인해 마음이 아픔이 가실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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