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동대동 809-1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대천한내돌다리’. 한내돌다리는 조선시대 남포, 비인, 서천지역의 사람들이 보령현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되었던 12간 돌다리이다.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의 기록에는 고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축조된, 전라도 함평의 고막천석교와 같은 비슷한 유형으로 조성되었다 전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사람들과 우마차등이 통행하였고, 일제초기까지 주 교통로로 이용했다고 한다. 규모는 폭 2.38m, 길이 50m 정도였다고 하니 적은 다리는 아니다. 다리를 조성한 석재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인근 왕대산의 돌과 같아, 채석 후에 뗏목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반 한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초까지도 20m 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되었다.

 

 

우마차 통행에 적당한 돌다리

 

대천한내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인 시렁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고 한다.

 

 

다리의 구조는 1.5~2m 정도의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놓았다. 이것으로 다리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4.5m, 70~90cm, 두께 30~40cm의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바닥을 구성하였다.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루어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된 다리이다.

 

한내돌다리를 밟아보다

 

지난 6일 찾아간 보령시 문화재 답사. ‘한내돌다리는 그동안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돌다리들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돌다리마다 갖가지 사연도 많지만, 돌다리들의 모습들이 하나 같이 독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돌다리들이 무지개모양의 아치 모형으로 구성을 하고 있는데 비해, 한내돌다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꼭 들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지만, 그것이 대수랴. 대천천 한 옆에 복원을 해 놓은 한내돌다리. 주변 정리를 해놓고 다리 밑으로는 수초가 자라났다. 물의 깊이를 보니 옆으로 흐르는 대천천과 비슷한 수위를 갖고 있어, 대천천과 연결이 된 것은 아닌지. 돌다리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 얹은 시렁돌 틈 사이로 물이 보인다. 다리 위를 걸어본다. 예전 이 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것일까? 아마도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짚신 두 켤레 덜렁거리며 한양으로 올라간 사람들. 소고삐를 잡고 불어난 물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 그런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렇게 대천한내다리에 빠져있는데,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구경도 좋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그보다 큰 낭패는 없다. 그동안 많은 카메라를 망가트리면서 다닌 문화재답사이다. 비록 몸이야 젖어도 카메라만은 젖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돌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우선은 비를 피하는 수밖에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올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아주 오래 전 송춘희라는 여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수덕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 때문인가? 먼저 비구니인 여승을 떠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주변에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된 선원인 정혜사와 비구니 강원인 견성암이 있다.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이 견성암의 비구니들 대문으로 보인다. 노래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켜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노래가 처음 불려 질 때인 1966년에는 수덕사가 인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이 몰려든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고,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갖은 상품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요도 이제 가사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수덕도령의 애끓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7월 28일(일)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보면 좋다고 했던가? 딱히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집에서 세 곳을 돌아오면 좋다고 하니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두 번째로 찾아간 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산향토지>에 보면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홍주마을에는 수덕이란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수덕이라는 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수덕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덕숭이라는 낭자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문이 좋아도 상사병을 앓는 것인지? 수덕도령은 애를 태우다 못해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수덕도령이 하도 끈질기게 청혼을 하자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부터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절을 빨리 짓고 덕숭낭자를 품을 생각을 한 탐욕 때문에 벌을 완성하자 불이 나버렸다.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한 수덕도령은 이번에도 덕숭낭자를 그리워했기에 또 불이 나 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절을 지을 것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었다. 그 때문인지 절이 완공이 되었다. 함께 살 것을 허락한 덕숭낭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직 덕숭낭자만을 그리며 절을 지은 수덕도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 덕숭낭자를 안아버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덕도령의 손에는 버선 한 짝만이 들려있었단다.

 

덕숭낭자를 끌어안았던 자리는 큰 바위로 변하고 그 자리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버선꽃(물단초)’이라고 부른다. 덕숭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부르고, 산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했으며, 지금도 ‘덕숭산 수덕사’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전설과 수덕사의 중창 내력을 보면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짜 맞추기 식의 논리를 펼 것은 아니지만, 혼자 생각에 젖어 고뇌를 한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귀퉁이 깨진 삼층석탑,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리지?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 대웅전을 찾아가면 그 앞에 탑이 한 기 서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양 옆에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기단에는 가운에 탱주를 새겼다.

 

높이 410cm의 이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상륜부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받침인 노반이 있고, 그 위로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인 보륜과 보개를 올려놓았다.

 

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은 1층과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탑의 모양을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몸돌의 가운데 기둥인 탱주가 생략된 점이나, 지붕돌의 받침이 4단인 점을 볼 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탑이다. 수덕사의 삼층석탑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남아 아름다운 석탑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이 수덕사의 깨진 석탑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일까? 아니면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때문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고나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다. 하긴 저 깨진 채로 서 있는 삼층석탑도 참 바보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 탑을 조성할 때 저렇게 귀퉁이가 깨진 채로 사람들을 만날 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저 탑이나 나나 다 깨어진 채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날이 잔뜩 흐렸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한 줄기 비를 쏟아부을 듯한 기세이다. 이런 날 문화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는 어렵다. 그것도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질퍽한 맨 땅을 밝고 다녀야 하니, 그 고통은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에 소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 (慶州九黃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높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받침돌을 거북이인 당간지주, 이런 받침돌 처음이야

 

당간이야 절마다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절 입구에 세워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을 걸어둔다. 그런 당간은 특별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거의 보편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형하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구황동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다른 면이 있다. 훼손이 되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을 들여다보니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가 돌거북이라니 놀랍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이렇게 받침돌이 거북의 형상을 한 것은 처음 만났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의 10% 정도나 보았을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였지만, 이제 겨우 눈을 떠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화재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래와 중간,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를 관통해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밋밋한 형태로 조성을 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을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당간지주는 아마도 숱한 신라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문화재들이 안고 있을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맺힌 역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련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 당간지주를 떠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저렇게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있다는 굳건함 때문이다. 오늘 따라 조금만 더워도 답사를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1에 소재한 각화사는 신라 때 최초로 건립이 된 절이다. 현재 각화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화사 각화사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비 받침인 각화사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덥혀 있고, 그 안에 ‘王’자와 ‘佛’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대체로 조각의 수법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효대사가 창건 한 각화사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에 달현이 중수하였다. 영주-봉화-울진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의 봉화 동쪽 방향 21km 지점인 춘양삼거리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9km 정도를 가면 각화사 입구가 나온다. 각화사는 이 입구에서 2km쯤 올라가면 된다.

 

각화사는 원래 춘양고교 교정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사찰의 명칭도 남화사였다고 한다. 이 절을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화사에는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각화사는 조선시대에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인 1606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균형미를 잃어 안타까워

 

현재 각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이 각화사 절 입구 오른족애 놓인 비 받침돌이다. 이 각화사 귀부는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한 마디로 균형미가 갖춰지지 않은 고려 때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각화사 귀부는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이 귀부에 비의 몸돌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오히려 그렇게 후에 제작해 올린 비문과 머릿돌로 인해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까 보아 걱정스럽다. 각화사 귀부는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30년 세월 만나본 문화재, 하지만 난 아직 초보자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간 숱하게 많은 문화재를 만났고, 그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 이제 겨우 발걸음을 땐 초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문화재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들이다. 혼자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워,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겠다고 쓰기 시작한 기사가 꽤나 쌓였다. 그러나 아직 돌아볼 문화재가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한 마디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이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문화재를 찾아보고 글을 쓰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이다. 소중한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개와 땀을 흘리며 찾아보기. 정말 누군가 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찰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이 자리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크지 않은 송광사 동종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조성된 보물인 종루가 있다. 그 종루 한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송광사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크지 않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다.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만들어진 동종

 

현재 송광사의 동종은 사용을 하지는 않는다. 종루에 그대로 보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종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서 이 범종은 숙종 42년인 1716년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영조 45년인 1769년에 이 범종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범종을 보면 참으로 놀랄만하다. 어떻게 종의 겉부분에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한 것이라? 종의 거는 부분인 용뉴는 대개 용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글자와 보살상, 비천인, 유두, 넝쿨무늬 등을 어떻게 조각을 한 것일까? 한꺼번에 조형을 해야 하는 범종이다. 그 범종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고 조형을 한 것이 아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부어넣어 만들어 낸 범종이다. 물론 나름 정리를 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범종, 그 종소리가 듣고 싶다. 오늘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예불시간에 맞춰 찾아가 종소리라도 듣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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