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돈암동 595 소재한 흥천사. 흥천사는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을 정릉으로 정한 후 세운 사찰이다. 당시 이 절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170여 칸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흥천사, 이 절은 어릴 적에는 정릉 신흥사라고 불렀다.

 

정릉 신흥사라고 한 까닭은 이 절이 정릉의 원찰이었고, 이름이 신흥사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이 근처에서 살던 나로서는 이 신흥사가 늘 벗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지금도 삼각산 흥천사라고 하면 왠지 생소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것보다는 어린 시절 우리가 부르던 정릉 신흥사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곳이다.

 

 

조선 태조 5년에 창건한 신흥사

 

신흥사는 조선조 태조 5년인 1396년에 왕실의 발원으로 지은 사찰이다.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사명을 신흥사라고 하였으며, 극락보전에 태조 왕궁의 궁중원불인 42수 관세음보살존상을 봉안하였으며, 국제를 거행하던 절이었다. 이 절은 왕실의 위엄을 모아 나라의 명찰이라 하여 조계종의 본사로 명명하였다.

 

1409년 선덕왕훙의 능을 숭신방 사아리로 이전하고 흥천사도 능방에 소암으로 이건해 이름을 신흥사로 불렀다. 중종 5년인 1510년에는 화재로 인해 혜진하고 대종은 덕수궁에 보관되어 왔다. 정종 18년인 1794년 성민화상 등의 발원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철종 4년인 1853년 계장화상의 발원으로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철종 6년인 1855년 순기화상의 발원으로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며, 고종 22년인 1885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다. 현재 흥천사에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대방, 삼성각, 종각, 칠성각, 용화전, 연화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보전은, 10겁 이전에 성불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철종 4년인 1853년에 계장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면 3, 측면 3의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극락보전의 정면에 달아 낸 창호의 조각인 상당히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의 건축물로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1985125일 극락보전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이 된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철종 6년인 1855년에 순기스님이 세웠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민간신앙으로서, 조선시대의 사찰에는 거개가 명부전이 건립되었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시왕을 거느린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있고, 그 뒷면 벽에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가 걸려 있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진 이 법당은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경내를 뛰어다니면서 노닐던 신흥사. 정릉신흥사는 삼각산 흥천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은, 정겨웠던 이름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무엇이 대수이랴. 어차피 그곳에 많은 조형물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인데.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곡사길 182(율현리)에 소대한 율곡사. 신라 경순왕 4년인 930년에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절이다. 절과 관련된 사초 중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현재의 대웅전은 2003년 해체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 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 4년인 1679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율곡사의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대웅전 앞쪽의 어간문을 비롯한 문의 문살은, 여러 문양으로 복잡하게 꾸며 건물에 더욱 다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화려한 닫집 밑에 아미타삼존불상 모셔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어 천장 속을 가리고 있고 불단 위쪽으로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율곡사 대웅전은 산 중에 자리한 건물치고는 비교적 큰 규모의 조선 중기 건물이다. 전체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멋을 갖추고 있어 조선조의 건축문화 연구에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정면에 마련된 불단 위에는 닫집을 달아내고 그 밑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셨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본존인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불의 크기는 1m 이상의 사람의 키만 한 불상으로서, 자세는 등을 세우고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의 반가부좌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모습이다. 중앙에 좌정한 아미타여래상은 머리의 육계는 구분이 명확치 않으나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표현하였다. 나발의 표현은 촘촘한 편으로, 얼굴은 방형에 가깝고 턱의 선은 비교적 둥글게 처리하였다.

 

아미타여래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서로 조화를 이룬다. 짧은 목 아래로 삼도를 뚜렷이 표현하였다. 삼도란 수행의 3단계인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삼도는 성문과 보살 모두에게 해당하는 수행의 3단계이다. 아미타여래의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두꺼운 대의를 입었고, 가슴 아래로 수평의 군의자락이 보인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으며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작은 구슬을 쥐고 있다. 오른팔은 구부려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어깨부위까지 들어 올린 상태이고, 왼손은 반가부좌한 오른발 위에 얹고 있다.

 

 

세분의 상이 흡사한 것이 같은 시기에 조성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자세, 손모양, 얼굴, 법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본존인 아미타여래상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 두 보살상은 장신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 표현은 아미타여래상과 같고, 다만 본존불에 비해 조금 길고 갸름한 편이다.

 

옷차림은 대체적으로 본존불과 같으나, 관음보살상은 오른쪽 어깨에 반쯤 걸친 소위 반단형식이며, 등 쪽에는 왼쪽 어깨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아미타여래상과 대세지보살상의 경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규모는 1m 이상의 비교적 큰 크기의 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적이고 안정감 있는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삼존불의 특징이 거의 일치하여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복장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조선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한다.

 

산청 율곡사에서 만난 대웅전과 아미타삼존불상. 문화재를 답사하면서도 이런 삼존불을 만나면 그 자리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만나는 부처마다 한 가지 원은 꼭 하는 편이다. 그저 우리나라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지 않기를 먼저 바란다. 그리고 아직도 제자리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많은 문화재들의 조속한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충북 충주시 단월동 455에 소재한 단호사. 단호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단호사 경내 대웅전 앞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이며, 1층 기단 위에 탑신부가 놓여 있다.

 

단호사 삼층석탑은 늙은 노송 아래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 540년 정도가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8.5m에 나무둘레는 210cm 정도이다. 현재 충청북도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옆으로 뻗어 많은 지줏대를 설치해 놓았으며, 한 겨울에 만난 노송은 가지에 눈이 쌓여 그 멋을 더하고 있다.

 

득남을 하게 한 단호사 소나무

 

단호사의 소나무는 전설이 있다. 이 소나무는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이다. 수령이 540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히 조선 초기에 심어졌을 것이다. 강원도 지방에 문약국을 경영하던 사람이 재산은 많은데 슬하에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손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충주 단호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손을 바라던 이 사람은 단호사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고 살다가 적적하여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불공을 드리면서 소나무를 지극정성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고향 집 마당에다 소나무를 심고 안방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꿈을 꾸었다는 것.

 

더욱 기이한 것은 고향에 있는 부인도 꿈을 꾸었는데 단호사 법당이 자기집 안방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부인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같은 꿈을 꾼 것은 서로 모여 살라는 부처님의 뜻으로 생각이 들어 강원도의 재산을 정리해 단호사로 법당 옆에 살림을 차렸다. 그 후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소원성취를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

 

소나무의 가지가 덮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에는 양우주가 가운데에는 탱주의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이 탑은 일부가 약가 부서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새겼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직하며, 4층 몸돌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충실히 갖춘 안정감이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답사 힘든 여정의 연속

 

단호사는 큰 절은 아니다. 하지만 대웅전에는 보물 제512호인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 단호사는 처음 고려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하는 소나무 전설에 보아도 이미 이곳에 조선 초기에 절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 날 찾아간 충주 단호사. 비록 화려하거나 많은 전각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방색이 강한 철불 등으로 보아, 철불과 석탑이 모두 옛 자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길은 늘 험난하다. 어느 곳 하나 편안하게 문화재를 만나지 못한다. 더울 때는 몸에서 쉰내가 나게 걸어야 하고, 땀을 비오 듯 흘려야한다. 겨울에는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장마철이 되면 카메라라도 젖을까 걱정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사시사철 고된 여정이다.

 

하지만 그런 고된 여정을 스스로가 택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몇 사람만 더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우리 소중한 문화재들이 지금보다는 더 보전이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조성한 간결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은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과 버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한 겨울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미륵대원지. 그곳에서 만난 석등은 그저 아무런 밀도 없이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 , 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받침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위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대원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오측석탑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석등이 서 있다.

 

 

이 두 개의 석등은 사각 석등과 팔각 석등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를 처음 석굴사원으로 보성할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석등은 간결하지만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석등에 쌓인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사계절을 다 돌아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문화재는 여름철에 더 아름답고, 또 어느 문화재는 겨울철에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미륵대원지야 말로 겨울철에 가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 겨울에 눈 속이 묻힌 석등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봄철에 이곳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는 충주미륵대원지이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 사원터로 밝혀졌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미륵대원지에는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 그리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당간지주, 삼층석탑, 귀부, 사각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각형으로 조형이 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이 된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이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와 화사석, 그리고 위에 올린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벌써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동안 이름도 바뀌고 비지정으로 남아있던 석조물들이 지정문화재로 바뀌기도 했다. 사각석등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아. 오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화형문양으로 장식을 한 간주석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을 장식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형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는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면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특이한 화사석의 결구수법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롭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사각석등에서 보이는 화사석의 결구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 현화사, 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든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비록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며 답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많은 문화재를 만났다는 행복이 더 깊었나보다. 남들이야 그 행복을 알 수 없겠지만, 30년 세월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보다 즐거움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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