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 느끼는 점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란 우리에게 당장은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하기에 이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에 가면 사벌국의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능이 있다. 이곳을 들어가는 입구에 보면 삼층석탑이 1기가 보인다. 그저 색다를 바 없는 석탑이지만 보물 제1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달리 삼층석탑이다. 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1층의 몸돌이 유난히 큰 삼층석탑

 

전반적으로 비례가 불균형하고 기단부의 일부가 훼손되어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구의 석조여래좌상이 1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나,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화달리 삼층석탑은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형태다. 1층의 몸돌은 그 높이가 유난히 높고 커서 기단보다도 큰 형태이다. 지붕돌의 귀퉁이는 처마처럼 위로 솟아 석탑에 날렵함을 불어 넣었다. 석탑의 위에 올리는 상륜부는 아무런 장식도 남아 있지 않다.

 

기단부 위에 올려놓은 목 없는 석불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이 탑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탑의 기단부 위에 놓여 진 목 없는 석불 때문이다. 목이 없는 석불좌상은 얼핏 보아 탑과 같은 석질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일대가 혹 절터였을 것으로도 생각하지만, 아직 정확한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곳이 혹 비사벌 왕릉을 지키는 원찰이 있었던 곳은 아니었을까? 생각은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저 석불이 왜 하필 저곳에 앉아 계신 것일까? 그리고 누가 저렇게 석탑의 기단부 위에 목 없는 부처님을 올려놓은 것일까? 석탑의 기단부도 한쪽이 깨어져 나가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 위에 목이 없는 부처님까지 좌정을 하셨다니. 아마 어떤 재화에 이렇게 훼손이 된 것에 대한 시위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더욱 석탑 기단부의 깨어져 나간 면을 보니 이건 최근에 깨어진 듯 하다.

 

 

 

문화재 보존, 좀 더 적극적이어야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다. 그 문화재의 현실은 한마디로 ‘어렵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모든 국보나 보물을 다 관리를 못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예산이 없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판에 박은 소리들이다. 일 년이면 축제를 한다고, 수억에서 수십억을 사용하는 지자체들도 같은 소리들이다.

 

한 마디로 축제할 예산은 있어도, 문화재를 관리할 예산은 없다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러다가 보니 산 중에 있는 문화재, 혹은 마을 한편에 아무렇게나 있는 문화재들은 언제든지 손을 탈 수가 있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강구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시일이 조금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다.

 

 

화달리 석탑과, 그 기단 위에 좌정한 목 없는 부처님.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 해야 한다고 입만 벌리면 되뇌는, 우리 문화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언제나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소재한 삼막사. 삼막사의 내력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삼막사사적비’에 보면, 신라 문무왕 17년인 5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도 이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적비는 조선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만큼 삼막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다.

 

비문에는 신라의 원효(617-686)등이 창건하고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여 ‘관음사’라고 개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여말 선초에는 나옹, 무학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을 드날린 고찰이라는 것이다. 그 뒤 조선 태조 때 왕명으로 중수되었다는 등의 사실이 적혀있다.

 

 

사적비를 지나 오른 산신각

 

사적비는 삼막사 경내를 들어서면 좌측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자리한다. 이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를 직접 깎아서 조성한 돌계단이 있다. 삼막사 인근은 바위가 많은 곳으로, 삼막사에는 남녀근석과 마애불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사적비를 촬영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곁을 지나 위로 올라간다. 그 위편에는 전각이 보이지를 않는데, 바위에 대고 수없이 절을 한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산 쪽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밑에 산신각이란 이정표는 있는데 정작 위편에 전각이 보이지를 않아 의아해했는데, 계단 위를 올라서는 순간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바로 바위를 안으로 깊이 파내고 그 곳에 산신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전각은 바로 이렇게 바위에 산신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기분 좋은 답사

 

삼막사 입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 오른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을 물도 없이 한 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답사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절 삼막사. 전통사찰인 삼막사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찾아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올랐으니,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한 답사 길이다.

 

그렇게 찾아 올라간 삼막사. 저 멀리 까마득하게 마을이 보인다. 거의 산 정상부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시원한 물을 한 대접 마시고 올라가 만난 사적비와 산신각이다.

 

 

 

이 산신각 명물 되겠네.

 

삼막사 바위암벽 산신각은 바위면을 안으로 네모나게 깊게 파 들어가, 그 안에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 등을 돋을새김 하였다. 양 편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으며, 바위를 보고 우측 위편에는 구름을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산신이 타고 앉은 호랑이를 보고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산신님이 들었으면 노했을 듯도 하다.

 

 

 

호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옛 만화에 나오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앙편에 새겨 놓은 동자상도 조금은 어색하다. 아마도 지금은 기계를 갖고 조형을 했을 텐데, 일부러 옛 분위기를 만드느라 민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조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사람인가가 또 올라와 절을 한다. 이 더위에 그늘도 없는 곳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서 덕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이런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이 산신각에도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고, 그 후에는 명물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온 바람 한 점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나와 안동 쪽으로 가는 큰길을 벗어나, 마을 안으로 난 작은 길로 접어들면 우측에 우뚝 선 전탑이 보인다.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소재한 이 전탑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조탑리 전탑은 안동 동부동의 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축조가 되었다. 탑은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몸돌을 만들었다. 탑의 높이는 8,65m이고, 기단의 너비는 7m이다. 남면에는 감실을 내었고, 감실 양 편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아직도 힘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각 기법이 뛰어나다. 천년 세월을 이 인왕상이 전탑을 지킨 것인지도 모른다.

 

돌과 벽돌로 쌓은 희귀한 전탑

 

1층 지붕돌부터는 한 변이 27cm에 두께가 5,5cm가 되는 벽돌을 사용하여, 어긋나게 쌓아올렸다. 몸돌은 1층의 높이에 비해,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보존 상태는 깨끗하다. 다만 조선시대에 수리를 거치고, 1917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탑들은 일반 석탑에 비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다. 국보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을 보더라도, 그 탑을 세우기 위한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밭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전탑을 보면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참 수난을 많이 당했음을 느낀다.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주변에 똑 같은 크기의 고무 통에 연꽃을 수도 없이 심어놓았다. 커다란 불심이라도 작용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쓸쓸히 서 있는 보물인 탑이 너무 한적해 보였기 때문인가.

 

 

 

뛰어난 전돌 쌓기로 조성한 탑

 

이 조탑리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1층의 몸돌은 화강암을 이용했으며, 위로는 전돌을 사용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6~7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한 마디로 조탑리 5층 전탑은 일반적인 전탑의 형태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조성을 해 눈길을 끈다.

 

아무리 열변을 토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 문화재 역시 남다른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다.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 주변에 놓인 고무 통 속에 연꽃이 만개를 할 때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사연도 참 많다. 이런 저런 사연을 듣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그만큼 재미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이다. 왜 힘든 문화재 답사를 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답사의 재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주에 있는 보물 제121호인 굴불사지 사면석불. 극락정토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보인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사면에 석불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가 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사>라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절터로 추정

 

최근에 들어 이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으며, 출토유물 가운데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현재 백률사라는 절이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지나 있는데, 이 절은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라고 전한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높이 3.5m 정도의 커다란 암벽 사방에 부처와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이다. 흔하지 않은 사방불이라 그 가치도 높지만 사방에 새겨진 불상의 조각이 뛰어나다. 사면석불은 산을 향해 올라가면서 정면으로 보이는 서면은 아미타삼존불, 동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면에는 삼존입상, 북면에는 보살상이 돋을새김이 되어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중 아미타삼존불

 

뛰어난 조각이 돋보이는 사면석불

 

사방불을 조성할 때는 남방에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북방에는 미륵불, 동방에 약사여래, 서방에 아미타불을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굴불사지 사면석불도 서방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했다.

 

아미타삼존불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몸체는 돋을새김을 하여 놓았다. 머리는 따로 조성을 하여 몸체에 올려놓은 형태이다. 아미타불의 죄우에 모신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따로 조각을 하여 좌우에 모셔놓았다. 대세지보살의 경우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가 알아볼 수가 없다

 

11면의 관음보살, 마모가 심해

 

아미타삼존불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돌면 북면에 돋을 새김한 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크게 들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돋을새김을 한 보살상의 옆으로는 희미하게 음각을 한 선이 보인다. 분명하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11면의 얼굴과 6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 알아볼 수는 없고, 형체는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 암석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불상을 새겨 넣음으로써 극락정토를 그리며 살았을 것만 같다.

 

위 사진은 북면 보살상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북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이며, 아래사진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동면에 돋을새김한 약사여래상 이다

 

돔면을 상징하는 곳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머리는 크고 높은 육계로 표현을 했다. 상반신에는 희미하게 법의가 음각을 한 선으로 표현이 되어있으나, 이 또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희미하다.

 

훼손이 된 부조, 정말 아쉽고 또 아쉽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으나 오른손은 파손이 되어있다. 사면석불 중 그 어느 것보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아마 석불의 뒤편에 조성이 되어있어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훼손을 막은 듯하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 좌측은 아예 떼어낸 듯 사라졌다.

 

남면의 보살입상을 보면 좌측이 무엇인가 떼어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원래는 세 분의 보살입상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돋을새김한 두 분의 보살 중 한분은 머리가 사라진 상태다. 남면의 보살입상은 신체의 비례가 적합하고 조각수법도 빼어나다. 둥근 연꽃대좌를 만들어 발밑을 받치고 있으며, 배 모양의 신광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다양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해가 따갑다. 하루에 몇 군데를 돌기위해서는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보면 흐르는 땀조차 주체를 못한다. 물 한 병은 1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물병을 수두룩하게 짊어지고 다닐 수도 없는 답사 길이다. 그러다가보니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만나는 석불에게도 속으로 기원을 한다. 즐겁고 평안한 답사 길이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또 하나 흉측하게 변해버린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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