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소재한 고찰 쌍계사. 지리산의 남쪽기슭에 자리한 쌍계사의 경내에 서 있는 8각 석등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쌍계사석등(雙磎寺石燈)’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석등을 보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석등이란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로 불을 켜는 화사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쌍계사 석등에는 화사석과 지붕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석등이란 원래 3단으로 이루어진 받침 위에,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리고 지붕돌을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어야 하지만, 이 쌍계사 석등은 화사석과 지붕돌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떤 연유로 인해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석등의 의미는 매우 깊어

 

석등이란 절 안의 어둠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석등은 부처님의 진리를 빛으로 시방세계를 비춘다는 뜻으로 조성한다. 이것은 곧 중생을 빛으로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또한 석등의 등불 하나하나는 부처님이 계시다는 수미산과 같고, 석등에 불을 켜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기에 사찰에서 조성을 하는 석등은 공양구 주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여긴다. 하기에 석등은 언제나 부처님이 계시다는 대웅전과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거나 부처님을 상징하여 조성하는 탑과 함께 조성을 하는 것이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은 화사석과 보개석이 없기 때문에 그 원형을 알기가 어렵다.

 

 

 

조각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보여

 

경남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쌍계사 석등은 화사석을 올리는 상대석 위에 복발과 보주가 놓여있다. 상대석 아래로는 팔각의 간주석이 놓여있으며, 그 밑으로는 아래 받침돌인 하대석이 놓여있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사석과 지붕돌이 사라져버려 처음의 형태는 알 수가 없다.

 

아래받침돌인 하대석에는 엎어놓은 연꽃문양인 복련을 둘렀고, 상대석인 위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문양인 앙련을 조각하였다. 가운데기둥인 간주석은 가늘고 길며 중간이 부러져 있던 것을 나중에 맞추어 놓았다. 처음에 얼핏 보면 흡사 두 개의 돌로 간주석을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불을 켜는 곳인 화사석과 지붕돌인 보개석이 없어진 자리에는, 상륜부에 올려놓았던 머리장식만 놓여 있다. 상륜부는 낮은 받침위로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와, 엎어놓은 그릇모양을 한 복발 등이 남아있다. 이 쌍계사 석등은 가운데기둥의 단조로움과, 상대석과 하재석 등에 조각한 세련된 연꽃무늬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또한 제대로 된 형태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면, 뛰어난 걸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재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2년인 723년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당나라 6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대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창건했다고 전한다. 830년에는 진감해소 국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두 스님이 지은 절에 영당을 짓고, 절을 크게 중창한 후 사찰명을 옥천사로 고치고 이곳에서 입적을 했다.

 

 

그 후 정강왕이 이웃마을에는 옥천사가 있고 산문 밖에는 두 내가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라고 불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 대공탑비를 비롯해, 보물 제500호인 대웅전을 비롯한 보물 9, 일주문과 천왕문 등 지방문화재 20점 등 총 30점의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쌍계사를 일러 문화재의 보고라 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쌍계사. 그 경내에 서 있는 석등의 화사석은 언제 사라진 것일까? 쌍계사를 들릴 때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 오늘부터는 하루에 한 개씩만 송고 하겠습니다. 단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너무 급하게 달려온 듯합니다. 이제 좀 벗어나고 싶습니다.

 

보물 제136호인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66-2에 소재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뒤편에 조성한 광배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된 약사여래불을 조성했다. 광배 뒤편에 새긴 약사여래불이 처음부터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렇게 앞으로는 석조여래좌상을 조각하고 뒤편에도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이다.

 

마귀를 쫓는 항마촉진인의 내력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칼은 작은 소라 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근 편인데 은은한 웃음을 띤 표정이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나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 주름을 새겨 넣었다.

 

결기부좌를 한 형태로 좌정한 석조여래좌상의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옛날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에 정각산의 선정굴에서 내려와, 보리수 아래 앉아 결가부좌하고 다시 선정에 들어갔다.

 

 

선정에 든 석가모니를 본 제6천의 마왕 파순은, 만약 석가모니가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면 일체의 중생이 구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성불을 하고나면 마왕의 위력이 중생들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을 해, 염욕, 능열인, 가애락이라는 3인의 미녀를 보내어 석가모니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계의 모든 군사를 동원했다. 마왕 파순은 칼을 석가모니에게 겨누면서 "비구야, 나무 아래 앉아서 무엇을 구하는가. 너는 신성한 금강보좌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이여 이를 증명하라." 고 하면서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향했다.

 

그러자 지신이 땅에서 튀어나와 마왕 파순을 물리치며 석가모니의 말을 증명하였는데, 이 때의 수인이 바로 항마촉지인이다. 항마촉지인은 항마인, 촉지인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 수인은 오직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이다.

 

마귀는 쫓고 중생은 고치고

 

불상의 뒤편에 조성한 광배는 장식적이다. 광배에는 작은 부처상인 화불과 보상화, 넝쿨무늬 등을 화려하게 조각을 하였다. 광배 뒤편에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밀양 무봉사와,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등에서 보이는 특이한 경우이다.

 

 

경주 남산 미륵곡 보리사 터에 소재한 석조여래좌상. 전면은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좌상이 세상의 악한 기운을 쫓고, 뒤편에는 약사여래불을 조성해 중생을 질병에서 구제하고 있다. 이렇게 앞뒤로 조성한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편해지기를 바란 것일까?

 

내년 봄,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날을 잡아 경주일대를 한 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남산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수많은 부처님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신라 제41대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으로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당시 해안사 절터이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성종 16년인 1485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명종 원년인 1546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아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하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금포정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그러나 헌종 13년인 1847년에 은해사 큰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시주하였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그리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 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인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자료 은해사)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금포정을 들어서다

 

은해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금포정은 소나무와 금강송이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다. 2km나 되는 이 길은 1714년 조선조 숙종 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에 10m가 넘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길이다. 2007년과 2008년도에는 금강송 1080주씩을 이곳에 식재하였다.

 

은해사에는 보물인 괘불탱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된 대웅전 등 많은 문화재들이 부속암자와 은해사에 소재하고 있다. 은해사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쌍거북바위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왜구들이 의해 훼손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주변을 정비하던 중 목이 달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지역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현지에 마애삼존불과 함께 복원을 하였다. 은해사 거북바위는 무병장수와 가정의 안녕을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다녀온 지가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답사란 항상 다녀온 후 바로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사지란 예전 절이 있던 곳이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절터가 있다. 지금은 비록 절은 사라졌지만,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이다. 그 많은 절터 중에서 가장 잊지못하는 곳이 바로 물걸리사지이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 이 절터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이 물걸리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옛 기록을 알 수 없는 물걸리사지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파편 4, 철쇄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 대좌(보물 제543),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 삼층석탑(보물 제545)이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절터에서 발굴이 된 많은 유물들은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 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옛 절은 어디로 가고,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석조물들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대신 전각 뒤편에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는 5대보궁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소재한 정암사이다. 정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창건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서원했다. 한 범승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튿날 한송정으로 달려간 자장율사에서 문수보살이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사라졌다. 태백산을 헤매던 자장율사는 사람들에게 갈반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그 지명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갈반지를 찾게 되고, 그곳에 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후 백일기도를 드린 후 밤에 칡넝쿨 세 가닥이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 세운 것이 바로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정암사의 법당 자리라고 한다. 당시에는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여 갈래사라 칭했다.

 

서해용왕이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

 

보물 제410호인 정암사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보낸 마노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7층의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 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한 수마노탑

 

정암사 수마노탑은 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놓인 배례석은, 새겨진 연꽃무늬나 안상 등이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 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cm, 두께 5~7cm로 정교하게 쌓여져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이 옥신부터 기단부까지 사이에서 5개가 발견이 되었다. 또한 금, , 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암사에서 느낀 기운은 맑기만 한데

 

그만큼 시대가 흐르면서도 정암사 수마노탑은 진신사리탑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깊은 가을에 찾아간 정암사.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걷는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아마도 탑의 기운이 탑 주변에 넓게 자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를 조아려 서원을 한다. 무엇이나 이곳에 와서 간절히 서원을 하며 이루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일어나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가을이 짙어가는 산에는 붉은 빛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숱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마노탑.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암사. 아마 자장율사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은 아닐까? 자장율사가 평소에 짚고 다니던 주장자였다는 주목 한 그루가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회생을 했다고 하니, 정암사야 말로 세상을 다시 살아나갈 사람들에게는 좋은 곳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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