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은 일개 지자체로서는 전통사찰이 가장 많은 곳이다.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대둔산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인 서기 638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이 될 사찰이다. 6·25 동란 이전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를 가진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6·25 때 불에 타버리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부도와, 안심사 비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년고찰 대둔산 안심사

 

 

토요일이라 그런지 나들이객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 안심사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답답하게 막히던 길이 전주 시내를 벗어나면서 시원하게 뚫렸다. 완주군 운주면은 충남 금산과 논산과 접해 있다. 운주면소재지를 지나 논산 양촌면으로 가는 지방도로에서, 좁은 마을길로 3km 이상을 대둔산을 향해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는 안심사. 현재 안심사에는 대광전과 산신각, 삼성각, 요사가 있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나 부도 등이 있을 경우,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유리 등으로 벽을 내어 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전각이다. 안심사 계단 옆에는 대웅전을 세우기 위해 많은 돌들을 나열해 놓았다. 아마 이곳에 묻혀 있던 주초 등을 찾아낸 것인가 보다. 커다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보니, 과거 안심사의 규모를 대충은 짐작할 만하다.

 

 

 

뛰어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안심사 석조계단

 

보물 제1434호 안심사 석조계단은 부처님의 치아사리 1과와, 의습 10벌을 봉안하기 위해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 이후 1759년 이전에 조성하였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1613년 조성된 대구 용연사의 석조계단과 친연성을 갖고 있으나, 조각수법 등은 용연사의 석조계단보다 월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앞면과 옆면에 장대석 돌을 놓아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비슷한 크기의 돌 판을 한 줄로 얹었으며 계단 면석에는 연화문과 격자 문양을 조각하였다. 계단의 중앙에는 석종형 부도가 서 있고, 네 귀퉁이에는 장군모양의 차림새를 한 신장상을 사방에 놓았다. 이 신장상들은 신체 부위와 갑옷의 조각기술이 뛰어나다. 앞쪽으로 서 있는 양편의 신장상은 조금 크며, 뒤편의 신장상은 조금 작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가 176cm 정도로 아래는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부도를 올렸다. 아래편의 받침돌에도 조형을 하였다. 위편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엷게 조각을 했다.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탁월하고 연화문과 격자문양의 조각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뛰어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신장상들의 표정이나 갑옷 무늬 등의 수법은 능에 세워놓은 문인상이나 무인상들보다 더 세련되며,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였다.

 

눈 부라린 신장상에 반하다

 

석조계단의 네 귀퉁이에서 사로 마주하고 있는 무인모습의 신장상. 아마도 사방을 둘러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석종형 부도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보다. 신장상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투구를 쓰고 칼을 양손으로 잡고 있다. 칼끝은 아래로 했는데, 금방이라도 무엇을 벨 수 있을 듯하다. 툭 불거진 눈에 주먹코, 굳게 다문 입에 어깨까지 내려온 귀. 얼핏 보아도 석장승과 석불을 혼합시킨 듯한 모습이다. 그러한 신장상들의 모습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앞선다.

 

 

 

갑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표현을 한 안심사 석조계단의 신장상. 어느 곳을 가보아도 이렇게 세밀한 조각수법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안심사 석조계단의 가치를 더 높이는가 보다. 토요일 바쁜 걸음으로 달려간 대둔산 자락 안심사에서, 또 하나의 희열을 맛본다. 불거진 눈으로 사방을 지켜내고 있는 신장상들로 인해서.

우리나라에 문화재로 지정된 동종 중에 국보는 4점뿐이다.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 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용주사 동종 또한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종을 들어 올리는 형태로 제직을 한 용뉴 등, 화려한 장식과 뛰어난 조형미가 아름답다.

 

또 하나의 동종은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으로 국보 제280호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상원사 동종

 

오대산 상원사에는 우리나라 동종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5월 6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소재 고려암의 신도들이, 하루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삼사순례에 간다고 하여 길을 따라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그리고 여주 신륵사를 돌아보는 순례길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상원사로, 제일먼저 동종을 보려고 종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다녀온 지가 꽤 오래서인가, 상원사의 입구서부터 옛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종각도 옛 자리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모조 종을 만들어 놓고, 국보인 종은 유리로 벽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그 옆에는 종각을 새로 짓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마 이 순례길에 만난 국보 상원사 동종의 진본을, 밖에서 만나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비천상에 빠져들다

 

내가 상원사 동종을 처음 만난 것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났는가 보다. 그 처음의 만남에서 난 종각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종에 새겨진 비천인 때문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비천인들은 금방이라도 종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두 번인가 종을 만났다.

 

 

 

상원사 동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발톱을 고추 세운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이 비천상은 비파와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어, 당시의 음악을 연구하는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구슬과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현존하는 한국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 24년에 조성이 되어,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힘이 있게 표현한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아름다운 문양으로 조각된 상대와 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이 되었다.

 

이 상원사 동종은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우리나라에서 주조되는 모든 종에 계승된다. 뛰어난 이름다움을 보이는 상원사 동종. 그리고 그 동종에 조각된 비천인상. 난 이번에도 그 비천인상에 빠져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어서가자’고 재촉하는 일행들을 뒤따라 내려가면서도, 내내 그 비천인이 어느새 내 머리 위를 날아오를 것만 같아서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 (석수동 212 - 1)에 자리한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시기가 당간에 적혀있어, 조성연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당간에 지주명이 명기되어 있어

 

당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

 

 

이로 인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초사에는 많은 무리의 승려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작은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만 보아도 10여명이 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소임을 맡지 않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한은 것으로 보임)에서 8월 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월 1일에 중초사에 도착을 한 것으로 적고 있다.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불구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하기에 절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이 당간은 당과 당간, 그리고 지주로 구분이 되어있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굳게 닫힌 문, 한 바퀴 돌아오니 활쫙 열려

 

2012년 3월 3일 안양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석수동 인근에 있다는 문화재들을 촬영한 욕심에서이다. 먼저 중초사터를 찾아 들었으나, 당간지주와 석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에는 굳게 잠을통이 걸려있다. 한참을 밖에서 애를 태우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토요일이면 12시에 문을 걸고 담당자가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근 30분 이상을 안양시청과 구청, 동사무소 등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음’이란다. 어딜 가나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는 것에 가장 분통이 터진다. 더욱 요즈음은 주말과 휴일이면 문화재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잠겨 있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참 답답하다.

 

근처에 있다는 석수동 마애종을 먼저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있다. 걸음을 빨리해 쫒아가니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려있다. 아마도 그 안에 건물이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밖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문화재를 만난 것이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섬세하지는 않아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중초사가 어떤 절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변 가까운 것에 마애종들을 볼 때 아마도 당시 중초사란 절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중초사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90번길 19, 옛 구읍리에는 사적 제403호인 반월성이 있다. 반월산성은 총 길이 1,080m 이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이 반월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 에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눈길을 밟으며 반월성에 오르다

2월 5일 아직 산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모리산성을 돌아보고 난 뒤, 이어서 찾아간 반원성. 하루에 두 곳의 산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눈길에 오른 산행이라 다리도 아프지만, 그레도 인근에 있으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여름에는 차가 성지까지 올라간다고 하는데, 눈길에 위험할까봐 그런지 입구를 막아 놓았다. 할 수없이 걸어 오르는 수밖에. 길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미끄럽다. 언덕길을 올라 반원성의 남쪽 성곽 쪽으로 다가갔다. 수령 40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서부터 천천히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부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반월성은 성벽을 높게 쌓고, 일부구간은 안과 밖을 함께 성벽을 쌓아두기도 했다. 서쪽에는 문지인 듯한 곳 옆에 치성을 쌓았다. 이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상당하다. 성 위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왕방산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포천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에서 내려오는 길목, 고구려의 전진기지

성 위에서 보면 성 밑으로 난 길이 훤히 보인다. 철원으로 가는 길에는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보아, 반월성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에서 성벽 위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보니, 좁은 문루가 있었던 곳이 보인다. 암문이 있었던 곳일까?



조금 더 가니 건물터가 보이고 동편으로 난 문지가 있다. 반월성은 문을 그냥 바닥에 놓은 것이 아니라, 돌을 쌓고 그 위에 문을 내었다. 1m 가 넘는 축대 위에 문을 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문지 안으로는 건물터가 있고, 조금 더 가니 삐죽 내민 치성이 보인다. 반월성은 상당히 견고한 성곽이었을 것이다.



해발 283.5m의 청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테뫼식 석축산성인 반월산성. 고구려는 이곳을 남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신라는 북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천지역의 주성(主城0으로 역할을 했다. 이곳을 발굴 당시 <마흘수해공구단>이란 명문이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흘군’이 바로 포천지역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월성이란 마치 성이 반월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성 중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성이었다는 반월성. 고구려가 쌓은 이성은 통일신라 시기까지 사용을 하다가, 고려 때는 폐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반월성. 한 바퀴 돌아본 반월성은 상당히 요충지에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매우 견고하게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돌아본 반월성. 아마도 완전히 복원을 마친다면,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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