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는 언제부터 우리가 사용을 했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誌 魏志 東夷傳)』 고구려조에 보면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부경(浮京)이라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여 저장을 잘하며, 발효된 음식을 먹기를 즐겨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제31대 신문왕조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왕비의 집에 보내는 예물품목이 쌀, 술, 기름, 간장, 포와 젓갈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 저장구인 옹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수옹도기라는 단어가 나오며, 규모가 높이 6자 너비 4자 5치, 용량이 3섬 2되가 든다고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는 이미 옹기를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조선옹기 특별전시장>의 간판과 옹기를 둘러보는 사람들

서민들과 함께 한 옹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많은 기록에서 옹기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 세 곳에서 황옹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국대전』공정 외공장조에 보면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이 한 사람이 있으며, 공전 경공장조에는 본조 봉상시 등 14개 기관에 옹장이 104명에 각각 뒷일꾼 2명씩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진 옹기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많은 종류의 옹기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서민 생활에서 꼭 필요한 그릇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건너편으로 30m 정도를 이목대 쪽으로 가면 팔도 옹기전을 열고 있다. 여기저기 널린 다양한 옹기들을 관람 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매매도 이루어진다. 팔도옹기전에 보이는 옹기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옹기들을 둘러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기들


'술독'이다. 술을 빚은 날짜와 몇번 째 슬독인지, 누가 담구었는지를 적게 되어있다. 높이는 5자 정도이며 길고 위가 불룩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맨위는 '청수단지'다. 청수단지란 이른 아침에 주부들이 깨끗한 물을 길어 부어놓고,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 때 사용을 하는 옹기이다. 가운데 것은 '좀도리'라고 하는 옹기이다. 좀도리란 매일 밥을 할 때마다 조금씩 쌀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옹기항아리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볼 수 있는 그릇이다. 아래 항아리는 '물두멍'으로 물을 많이 담아주기 위한 항아리다. 물두멍은 키는 낮고 배가 불룩하며 주둥이가 넓어 편하게 물을 퍼담을 수 있다.




위에 것은 '시루'라고 부른다. 흔히 떡을 찔 때 사용하는 것이다. 가운데는 '자배기'라고 하며 물건을 담아두거나 물을 담아 두기도 한다. 장독을 덮을 때도 사용을 했으며, 집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옹기 중 하나이다. 맨 아랫 것은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높이는 85cm, 둘레는 295cm로 곡식, 물, 김치 등을 담아둔다.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배둘레가 크고 키가 작아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맨 위에 것은 '간장통'이다. 중간에 꼭지가 있어 간장을 따르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가운데는 '소줏고리'라고 부른다. 좌측은 경상도 소줏고리이며 우측은 전라도 소줏고리이다. 소줏고리는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용기이다. 아랫것은 조선조 말에 만들어진 '똥 항아리'이다. 높이는 135cm, 둘레는 395cm이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똥통으로 땅에 묻어 사용을 했다.




위에 것은 '앵병'이라 부르는 옹기이다. 짠지를 담아두기도 하고 청주나 막걸리를 담아 두기도 한다. 가운데는 '씨앗항아리'다. 각종 씨앗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을 했다. 맨 아래는 '장군'이라 부르며, 누여 사용하고 보관은 세워둔다. 어떤 액체를 담느냐에 따라서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으로 부른다.


이 옹기는 '귀때단지'라고 부르는 물을 담는 용기이다. 둘레의 한편에 주둥이가 달려 물을 따르는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부터 민초들이 즐겨 사용하던 옹기.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여 음식을 담아 놓으면 오래도록 상하지가 않는다고 한다. 선조들이 어떤 그릇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그래서 재미있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7년 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토기조각, 청자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절터가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문화재의 가치를 보아 보물로 지정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과 불대좌, 광배 등을 보면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걸리를 찾아 나선 길은 정말 한 낮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로부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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