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번지는 사적 제408호는 왕궁리 유적이다. 이곳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혹은 별도설 등이 이곳이라는 학설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안승의 보덕국설과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기도 하다.

한창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왕궁리 유적지를 찾았다. 마침 공사를 쉬는 날이라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유적지를 한창 발굴하고 있는 중인데, 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표시를 한 곳은 아마 건물터인 듯하다. 유적지 앞쪽에 우뚝 서 있는 국보 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안정감 있는 형태의 왕궁리 석탑

오층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대궁」등의 명문기와가 발견이 된 점으로 미루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왕궁리 석탑은 발굴, 복원 전까지만 해도 기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밑에 석물로 된 가단부가 발견이 되어 원형을 복원되었다.


발굴중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

멀리서 보아도 왕궁리 오층석탑은 균형이 잘 잡혀있다. 돌 하나하나를 맞추어 쌓아올린 것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 주춧돌이 놓고, 우주석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다. 탑은 옥신과·옥개석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몸돌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우주석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지고, 옥개석도 그에 따라 넓이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5층까지 올라가면서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며, 등분을 하지는 않았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4층과·5층은 4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추녀는 얇고 추녀 밑은 수평이며, 끝부분에는 종을 매달았던 풍령공이 뚫려있다.





발굴 중이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줄을 쳐놓아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뒷면과 탑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금지를 시킨 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줄을 스스로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탑이 높아 상륜부가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륜부에는 노반과 부발, 앙화, 그리고 부서진 보륜 1개가 남아 있다.

왕궁리 석탑 국보라서 다르다. 그 아름다움이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탑을 보아왔지만,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안정감이 있게 조형물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마치 거대한 틀에 부어 만든 것만 같은 정교함이 놀랍다. 국보로 지정이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국보로 지정된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치 후원 한편에 꼭꼭 숨겨졌다가, 발을 걷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고 나타나는 여인네와 같은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아한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가자’는 일행의 목소리에 놀란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끌며 돌아서지만, 그 단아한 아름다움은 한참이나 남아있을 것만 같다.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성은 대개 산 위에 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쉽다. 그러나 성의 종류를 보면,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은 산성과, 수원 화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이용해 쌓은 성곽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홍주성과 같이 평지에 성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명칭을 보아 ‘○○산성’이란 명칭이면 산을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고, ‘○○성’이면 평지에 쌓은 성으로 볼 수가 있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사라지고, 성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동문이었던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곳까지 성이 연결이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8월 29일이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왜 하필 많은 성 가운데 홍주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홍주성이 국치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항일의 성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과 홍주성 전투그림. 칼과 죽창을 든 의병들이
신식무기인 총을 가진 일본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을사보호 조약을 반대한 의병들의 항거

국치의 시작이기도 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한 의병들이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다. 홍주성에는 의병장인 민종식과 이세영,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과 보령, 청양 등 충남의 요지를 점령한 후,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이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해 5월 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주성.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돌출이 된 치가 보인다(가운데와 아래)

의병장 이세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을 도와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의병장 안병찬은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변호사가 된 안병찬은 1909년 안중근의사 공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발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비록 의병들이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홍주성에 머물면서 신식화기를 가진 일본군과 3일간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홍주성이 언제 축성이 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초기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홍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터인 듯하다. 성벽이 트여있는 안으로 들어가니 와편이 보인다. 전각이 이곳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초기 성 쌓기 방법을 충실히 따른 성곽

홍주성은 문종 때 성 주위가 4,856척에 높이가 11척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가 사라진 홍주성은 홍성군에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중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네모난 돌들을 가지런히 맞춘 성벽에는 담장이가 타고 오른다. 성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성은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지리적으로 비워져 허전한 곳에는 치를 내어 보강을 하였다. 잠시 걸어가니 성벽이 트인 곳이 나온다. 아마 성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터진 곳으로 들어가니 한편에 와편이 쌓여있다.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성에는 모두 세 곳의 문이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과 북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위치로 보아 이곳이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몇 기의 비들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의 비는 충남 지정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이다.


홍주성을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수성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고 볼품없는 비 하나. 이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황폐된 홍주성을 보수하면서 세운비로, 내용을 보면 순조 23년 이곳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상을 수리하기로 하고, 그 해 8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고 기록을 했다. 완성된 성의 길이는 7리이고, 공사시간은 100일이라는 것이다.

한양을 지키는 길목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홍주성. 오늘 이 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아픔을 거울삼아, 다시는 가슴 찢기는 또 다른 형태의‘국치’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성벽 위에 난 길과 담장이로 인해 아름다운 성벽. 이 아름다움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로 지켜진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피로 지켜지는 역사는 없어야 한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소재한 운현궁은 사적 제257호이다. 운현궁은 많이들 알고 있듯이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다. 운현궁은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 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하고 있다.

노락당과 통로로 연결이 된 이로당은 노락당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별채의 형태로 꾸며졌다. 이로당은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힌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은밀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운현궁 안채 담장의 특별함 


여인들이 기거하는 노락당과 이로당은 안 담장으로 연결을 했는데, 이 담장의 문양이 특별하다. 담장은 일반적으로 같은 문양을 사용한다. 그러나 운현궁의 안 담장은 글자를 넣어 문양을 각기 다르게 꾸몄다. 운현궁만의 특별함이 보인다. 담장에는 ‘수벅강령락’이라는 한문으로 문양을 넣었고, 그 글자마다 다른 문양을 넣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오늘 (8월 19일) 아침. 출장길에 잠시 운현궁을 들렸다. 사진을 촬영하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그에 올린다는 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현궁을 한 바퀴 돈 후 본 안채의 담장. 당당한 세도가의 집답게 온갖 치장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담장에는 '수복강령락'이란 한문과 함께 각기 다른 문양으로 꾸며졌다.

운현궁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를 하시는 한 어르신은 담장의 문양 위에 요철로 굴곡진 것을 “저것은 사람이 살다가보면 파란만장하게 굴곡된 삶을 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이겨내고 전주 이씨가 대대로 왕위를 계승해 나가기를 바라는 뜻이다”라고 말씀을 하신다.


운현궁은 이 담장의 문양만 갖고도 훌륭한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여러 건물을 다녀보지만, 한 담장 안에 이렇게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은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운현궁이 더욱 특별한 것이겠지만.  




안채인 노락당과 이로당을 연결하는 바깥 담장은 문양만 갖고도 훌륭한 작품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