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38에 소재한 내원사. 지리산 내원사라고 부르는 이 절은 양편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름철 계곡에 물이라도 불어나면, 암반으로 된 계곡 바닥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한 곳이다. 가끔은 천둥이 치듯 굴러 떨어지는 물소리에 막힌 가슴이 확 트이기도 하고.

지난 8월 13일 찾아간 내원사. 내원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붕괴되어 있고, 아름답던 계곡은 여기저기 파여 나갔다. 내원사로 들어가는 마을의 길도 한편이 뭉툭 잘려나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번 집중호우 때 지리산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하더니, 그 때 수마가 할퀴고 간 자국을 남겼는가 보다.



빗속에 찾아간 내원사, 삼층석탑을 보다

내원사에 도착 했을 때는 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하는 비 때문에 제대로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시원한 마당과 산 밑으로 나란히 선 전각들이 보인다. 내원사의 대웅전을 바라보면, 대웅전 앞에 역간 비켜 서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이다.

내원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과 3층의 탑신, 그리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며 높이는 4.8m이다. 이 석탑의 북쪽에는 옛 법당지가 있고, 주변에 석등부재와 석탑의 상륜부재, 각종 조각석의 파편 등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남향한 1탑 가람으로 현재 탑의 위치는 예전 그대로의 원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손상이 된 삼층석탑,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 않아

내원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 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조금은 의아해 할 것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까 하고.

그러나 문화재를 지정할 때 조성 시기나 그 형태 등을 보아, 연대가 정확한 것은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그 후 부수어진 탑을 1961년에 내원사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한 것이다.



석탑은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개의 우주와 두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 상면에는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몸돌을 받고 있는 점과, 특히 기단부의 구성 및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깨지고 많은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내원사 삼층석탑. 석탑을 돌아보고 있노라니 비가 더욱 거세게 쏟아진다. 그 빗속에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작은 동자상 하나가 엎드려 있다. 비를 맞으며 돌아 본 내원사 삼층석탑. 그 당당한 모습에서 신라인의 자태를 떠올려본다. 그 안에 삼국을 통일한 기개가 서려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다양한 문화재에 관련된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에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답사를 나가보았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소개하는 <러브人 문화유산>이라는 코너에, 소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문화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라고 곧잘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 ‘미쳤다’ 라는 표현이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적 파사성 / 2009, 10, 18 답사

‘힘들다’ 느낄 때에 채찍질이 되다

사실 요즈음은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여건이 점점 그렇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진다. 역시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은 ‘팔팔한 청춘’이라고 말은 하지만, 남몰래 저려오는 팔다리는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촬영 중에 프로듀서가 묻는다. ‘왜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인가?’를. 그렇게 질문을 하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왜? 라는 질문이 참 낯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왜’가 아닌, ‘당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적부터 그렇게 당연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일상이요, 당연이다. 답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조급하다.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에 찾아간 수옥폭포 / 2010, 2, 15 답사

나는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문화재 답사란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불이며, 탑, 마애불 등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그리고 나무들과 스스로 대화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답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왜'가 아닌 '당연'이라는 해답을 찾는다.

내가 선조들에게 묻는 것이 바로 ‘왜?’이다. 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조성하였을까? 왜?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피땀을 흘린 것일까? ‘왜’는 바로 내가 만난 문화재에게, 그리고 그것을 조성한 낯모르고 이름 모를 선조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 왜는 때로는 엉뚱한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서 왜? 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재는 바로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

문화국가, 문화재사랑. 참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문화재를 소중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나 과연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아마 다만 몇 사람만 있어도, 그 마음들이 모아지면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란 생각이다.

단종이 귀향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여주 골프장 안에 있다) / 2009, 11, 11 답사 

문화재가 국가소유, 지자체소유, 아니면 개인소유일까? 아니다. 그것이 비록 법적인 주인은 국가나 지자체, 혹은 개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혹 우리 것이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 우리 것이기에 소중히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 아마 그런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도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선다.

수령 450년의 매화나무. 수령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고, 남명 조식 선생이 심은 나무라 해서 더 유명하다. ‘남명매(南冥梅)’ 조식(1501 ~ 1572) 선생이 심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산청의 오래 묵은 매화나무 두 그루 중 하나인 이 나무는, 선생이 61세에 심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만 열중한 선생은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재주가 뛰어났다. 한 마디로 팔방미인인 선생은 명종과 선조 대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직 제자를 기르는 데만 힘썼다.


비를 맞으며 산천재를 찾아가다

남명매는 조식 선생이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그 앞에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고 한다. 8월 13일, 산천재에 도착했을 때는 장맛비처럼 비가 내리 쏟고 있었다. 우산을 들었다고 해도 바람까지 불어, 카메라가 비에 젖을까 봐 행동이 부자유스럽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남명매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산림처사’라고 자처한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었다. 61세에 이 집을 짓고 명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선생의 제자들은 늘 선생이 천왕봉과 같은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선생의 교육 때문에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 모여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선생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성공을 거둔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힘든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당당한 매화나무

선생이 남은여생을 보냈다는 산천재. 그 앞마당에 심은 매화나무는 10여 년 동안 선생과 함께 생활을 했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을 찍다가
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아마도 이 시를 지을 때는 매화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매화를 심은 지 10여 년 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선생과 함께 한 매화나무는,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450년 세월을 묵묵히 천왕봉을 바라보며 산천재를 지키고 있다.



비록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여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선생의 기개처럼 당당히 서 있는 나무이다. 매화나무를 보고 난 후 옆 전각의 마루에 걸터앉는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매화나무 잎 하나가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그 오랜 세월, 선생의 마음을 닮아 산 남명매. 앞으로 얼마나 더 선생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것인지. 그저 세세연년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창) 강쇠란 놈의 거동봐라 저 강쇠란 놈의 거동봐요. 삼십명 나뭇꾼 앞세우고 납작지게를 걸머지고 도끼는 갈아 꽁무니차고 우줄 우줄 넘어간다. 거들거리며 넘어간다. 이산을 넘고 저산 넘어 산돌아 들고 물돌아 들어 죽림 산천을 돌아들어 원근 산천을 바라보니 오색초목이 무성하다.

마주섰다고 향자목 입마추면 쪽나무요. 방구 꾸며는 뽕나무요. 일편단심에 노간주며 부처님 전에는 회양목 양반은 죽어서 괴목나무 상놈을 불러라 상나무 십리 절반에 오리목 한다리 절뚝 전나무요. 오동지신이 경자로다 원산은 첩첩 태산은 층층 기암은 주춤 낙수는 잔잔 이 골물이 출렁 저 골물이 솰솰 열에 열두골 물이 합수되어 저 건너 병풍석 마주치니 흐르나니 물결이요 뛰노나니 고기로구나. 백구편편 강상비요 낙락장송은 벽상치라


(아니리) 여봐라 하 이 변강쇠란 놈이 나무를 나가 나무는 못하고 사면팔방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선 큰 장승을 패다 불을 땠더니 아 이 장승이 또 무슨 죄로 남의 집 아궁이 귀신이 되겠느냐 말이지.

변강쇠타령에서 장승이 강쇠에게 굴욕을 당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강쇠는 잘 마른 장승만 패다가 불을 놓았다고. 전국에 장승들이 비상이 걸렸다. 노들 대방장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더니, 장승들이 각각 강쇠녀석의 몸에 병균을 하나씩 심었겠다. 결국 강쇠란 놈은 오만잡동사니 병이 다 들어 죽고 만다.

장승은 성기숭배사상에서 기인했을까?

장승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것일까? 가장 오랜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의 ‘비명(碑銘)’에 적혀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9년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장승의 기능은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장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기록은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석표’이며,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생,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보인다. <용재총화>와 <해동가요> 등의 옛 문헌에도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장승은 어떻게 세우게 되었을까? 가장 많은 학설은 ‘남근숭배’와 사찰의 경계표시에서 나왔다는 ‘장생고표지설’ 등이다. 또한 솟대나 선돌, 서낭 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속기원설‘도 있다. 그러나 장승이 언제 무슨 연유로 최초로 세워졌는가에 대한 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장승은 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장승, 행로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축귀장승, 성문이나 병영, 해창(海倉)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영은사지 석장승을 찾아가다

함양 백전면 백운리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이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예전 신라시대 영은조사가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영은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6일 밤새도록 심하게 토사를 한 덕에 답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데도, 답사를 떠난 것이다. 백운면에 들어서 마을 주민에게 장승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단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요즘 내비게이션은 웬만한 문화재는 다 안내를 해준다. 그러나 정작 영은사지 석장승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빗길에서 물어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겨우 장승을 찾아냈다. 백운암으로 오르는 산길 입구 양편에 두 기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딴 곳의 장승과는 다르다. 양편에 서 있는 장승의 형태와 크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두 장승이 같은 목적을 갖고 제작이 되었다는 것은 복판에 음각된 ‘우호대장군’과 ‘좌호대장군’이란 글씨 때문이다. 이 장승은 각종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호법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강쇠도 도망갈 험상궂은 모습

산으로 오르는 좌측의 장승은 키가 작다. 복판에 글씨를 보니, 밑 부분이 땅에 많이 묻힌 듯하다. 원형에 가까운 돌을 위를 잘라 관처럼 만들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을 새겼다. 눈은 양쪽으로 치켜져 올랐으며, 코는 주먹코이다. 입은 아랫입술이 두터우며 이빨이 듬성듬성 나있다. 복판에는 좌호대장군을 음각했는데 ‘좌호’만 보인다.

길 우측에 있는 석장승은 네모난 돌의 윗부분을 뾰족하게 조성하였다. 흡사 고깔을 뒤집어 쓴 듯한 형상이다. 눈썹은 굵게 표현했으며, 눈은 왕방울 눈이다. 코는 좌우로 퍼졌으며, 입은 두툼하고 이빨이 굵게 옥수수 알처럼 조각이 되었다. 복판에는 우호대장군이라 음각을 하였다.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좌호대장군의 오른쪽 아래에 영조 41년인 1765년을 표시하는, ‘건륭 30년 을유 윤2월’이라고 적혀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찾아간 영은사지 석장승. 입가에는 수염이 여러 가닥 있어 더욱 험상궂게 보인다. 아마도 이 영은사지 장승을 변강쇠가 만났다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빗속에 서 있는 장승을 뒤로하며.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경내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비

위와 같이 해인사의 창건내력을 적고 있다.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70여점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해인사 경내를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탑을 비롯하여 많은 비들이 서 있다. 그 끝에 보면 비각이 하나 보인다. 이 비각에는 <원경왕사비>라고 현판이 붙어있다.

보물 제128호인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의 왕사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는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비는 신라시대의 비와는 달리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얇고 단출한 것이 특색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인 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의 스승이기도 한 원경왕사는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인종 3년인 1125년에 조성한 이 비는,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시대의 비의 특징을 보이는 원경왕사비

이 비를 보면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비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비받침을 보면 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머리가 용을 형상화 한다. 화려한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한 초기의 작품에 비해, 원경왕사비의 귀두는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 받침인 귀부에는 귀갑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결부분 양편에는 卍자 두 개를 겹쳐 조각을 하였다. 거북이의 발 등도 힘차고 날카로운 초기의 거북이에 비해, 뭉툭하게 조각이 되었다. 귀갑문 역시 초기의 것들이 작고 섬세한 것에 비해, 크고 조금은 둔하게 보인다.



귀두의 조각 역시 단조롭다. 원경왕사비는 전체적으로 초기의 비 밭침에 비해, 많이 약소화 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는 오석으로 얇게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자리 부분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여름에 만난 원경왕사비. 그 많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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