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2011년 9월의 끝 날이다. 벌써 가을이 시작되었지만, 요즈음 날씨가 하도 변덕맞아 가을이 실종이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가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온 산천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단풍을 생각한다. 단풍이란 가을철 잎이 떨어지기 전에 초록색 엽록소가 파괴되어, 엽록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색소들이 나타나거나, 잎이 시들면서 잎 속에 있던 물질들이 그때까지 잎 속에 없던 색소로 바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단풍(丹楓)’이란 붉게 물드는 것을 말하지만, 단풍의 색은 크게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붉은색 단풍은 잎 속에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타난다.


색소에 따라 달라지는 나뭇잎의 색

은행나무 잎처럼 노랗게 물드는 것은 잎 속에 카로티노이드라는 색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 색소는 잎이 만들어질 때 엽록소와 함께 만들어지나, 엽록소의 1/8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잎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엽록소에 의해 초록색을 띠지만, 가을로 접어들고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잎은 카로티노이드의 색깔인 노란색 또는 갈색으로 물들게 된다.

노란색으로 물드는 나무들로는 고로쇠나무, 느릅나무, 포플러, 피나무, 플라타너스 등이 있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고 일조량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져, 예년보다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색색의 단풍 때문이다. 또한 자연의 변화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은근히 아름다운 단풍에 대한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렇다면 단풍은 어떻게 해야 더 아름답게 만나볼 수가 있을까?

햇볕이 가장 강한 시간이 단풍색이 가장 곱다.

단풍은 하루 중에 오후 1~3시 사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이것은 그 시간이 햇볕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여러 곳을 다녀보지만 오후에 보는 단풍이 가장 강렬한 색을 띠우고 있다.



햇볕을 마주하면서 단풍을 감상하라.

단풍은 그늘에서 보아서는 그 진가를 모른다. 그늘보다는 햇볕을 받을 때가 더 빛깔이 곱다. 하지만 정작 단풍을 더 아름답게 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단풍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가 해를 마주하고 단풍을 바라보면 최상의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볼 수가 있다.

햇볕을 마주하면서 단풍을 올려다보라.

단풍은 내려다보는 단풍보다 올려다보는 단풍이 더 곱다고 한다. 위에서 햇볕이 내려쬔다면 최상의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사이로 햇볕이 들어 아롱거리는 단풍을 본다면, 그 이상의 단풍은 없다는 것이다.

붉은색만을 고집하지 마라.

물론 단풍은 붉게 물들었을 때가 아름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을 했지만 단풍은 붉은색과 노란색, 그리고 갈색이 있다. 그 모든 것이 섞여있는 단풍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볼 수 있다. 더불어 이야기한다면 조금 물이 덜든 색까지 곁들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단풍을 보고 싶다면 꼭 명소를 찾아가야만 할까? 물론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명소를 찾아가 감상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지만 단풍은 어디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단풍놀이를 하는 것도 좋다. 간간한 음식을 준비해 붉게 물든 단풍 밑에서 가족들과 모여 단풍감상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올 가을 최고의 단풍놀이를 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누구는 그래도 재물이 있어야 한다고도 할테고, 누구는 건강이 최고라고도 할 것이다. 또 누구는 그래도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맞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택할 것인지. 

며칠 전부터 영 몸이 좋지가 않다. 행사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행사를 총 기획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두드리고 앉았으니, 무슨 힘이 들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과중한지 알 수가 없으니, 그냥 놀고 먹는 줄 아는가보디.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곁을 지키는 사람

이것저것 행사 준비를 체크하고 관계기관과 수시로 통화하고, 거기다가 행사 당일에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공연팀이 많다보니, 수시로 참석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또 전시까지 준비를 해야한다. 이 모든 것이 육체적인 부담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을, 곁에서 보기에는 알 수가 없으니 그냥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이런 행사를 해본 사람들 같으면 그 기획이나 진행이 얼마나 힘든 것인줄을 알겠지만, 주변에 이런 행사는 처음 있는 일이니 아무도 받는 스트레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아침에는 급기야 목이 따갑고 침조차 삼킬 수가 없다. 기침을 할 때마다 목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절집 안에서 산다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바로 몸이 아플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곁에 사람이 필요할 때는 몸이 아플 때라고 이야기들을 쉽게하고는 하지만, 그런 환경에 처해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조차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왜, 그러고 사나? 라고 물으면 할말이 없다. 바로 인생을 잘 못 살아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에 살가운 사람들이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지난 세월을 후회를 하는 것이지만 그도 이젠 지쳐버렸다.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 말이라도 걱정을 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나이먹어 사는 삶에도 종류가 있다는데

나이가 먹어 사는 세상은 각기 그 사는 정도에 따라 별칭으로 표현을 한다. 신선처럼 사는 사람은 노선(老仙). 학처럼 여유롭고 기픔이 있게 살면 노학(老鶴), 나이가 먹어서도 젊은이처럼 살면 노동(老童), 그저 평범한 노인네처럼 살면 노옹(老翁)이라고 한다. 노광(老狂)은 말 그대로 미친 것처럼 심술이나 부리고 사는 사람을 말하며, 노고(老孤)는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늙어서 돈 한푼 없이 궁상을 떨고 사는 것을 노궁(老窮)이라고 하며, 몸도 마음도 병들어 추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노추(老醜)라고 한다,

나는 어디에 속했는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좋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럴 때 정말로 곁에서 온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혼자 있어 편하다는 말은 정말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을 한다. 사람은 역시 사람하고 살아야 제대로 삶을 사는 것이란 생각이다. 몸도 마음도 아픈 날, 가을비까지 부슬거리고 내리니, 궁상 한 번 제대로 떨고 싶었나보다. 

나이가 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곁을 지켜주는 따듯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이란 생각이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터로 추정되는 사적으로 지정된 영암사지. 비가 내리는 지난 8월 20일 찾아간 영암사지는, 정말 사지 중의 최고였다는 기억이다. 우선 주변 경관이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엄청난 넓이의 전각 터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영암사지의 맨 위쪽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법당터. 그곳에는 보물 제489호로 지정이 된, 합천 영암사지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나누어 자리하고 있는 이 귀부 2기는, 영암사 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한 기씩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와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인 귀부만 남아

원래 비는 받침돌인 귀부와 몸돌인 비석,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가 위에 얹혀 있다. 그러나 현재 영암사지 법당 터에는 받침돌인 귀부만 양편에 남아있다. 양편에 남아있는 귀부는 기단의 형태가 달라, 동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당 터 앞에는 석등인 듯한 석물이 있다. 받침과 간주석만 있는 이 석물은 간주석, 중간이 잘려져 있다. 숱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아픔을 당한 증거이다. 영암사가 언제 창건이 되었는지, 언제 소멸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터에서 발굴되는 많은 석조물들이 신라 때의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창건이 된 절로만 추정하고 있다.



동서편의 귀부가 각각 특징을 지녀

석등인 듯한 석조물의 뒤편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기단이 있고, 계단이 일부 남아있다. 동쪽의 귀부는 거북의 등 무늬가 6각형이며, 비의 몸돌인 비석을 괴는 네모난 비좌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조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귀부의 특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비석은 통일신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쪽에 놓인 귀부 역시, 6각형의 등 무늬인 귀갑문을 배열하였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을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쪽의 귀부는 동쪽의 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졌다. 동쪽의 귀부는 조금 크며 귀갑문을 새긴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는 귀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누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두 개의 귀부만 남아있는 영암사지 귀부, 도대체 그 비에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누구의 비였는지 궁금하다. 영암사지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조에 걸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 동쪽의 귀부가 시기적으로 조금 이른 듯이 보이는 영암사지 귀부. 그 비문에 적힌 내용이 궁금하다. 말없는 귀부는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옛 절터를 찾아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사지(寺址)’에는 절터만 있는 곳도 있지만, 많은 문화재가 함께 있는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지를 들어가면 많게는 5 ~ 6점의 문화재를 함께 답사를 할 수가 있으니,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소재한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지어진 절로 보인다.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에는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견고한 성을 연상케 하는 사적 제131호 합천 영암사지의 석축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 터

합천 영암사지. 비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쏟아진다. 요즈음은 이상하게 멀쩡하던 날씨가 나만 움직이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요즘 별명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별명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한 별명이다. 영암사지에 도착해서도 비는 멈추지를 않는다.

처음 영암사지를 보고 내가 한 행동은 탄성이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대규모 사찰을 이룩할 수가 있었을까? 그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아, 많은 석재를 날아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정말로 대단한 절터였다. 지금은 복원을 많이 해 놓아 정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한편에는 미쳐 정비를 하지 못한 듯하다.


삼층석탑이 서 있는 축대 아래편의 절터와(위) 금당지로 오르는 중앙계단 


저 곳까지 마저 복원을 마친다면, 얼마나 웅장한 절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암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인다.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을 보면,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886년은 신라 정강왕 원년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아마도 신라 헌강왕 이전에 지은 절이란 생각이다.

밀교의 절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영암사지

황매산의 절경인 암벽을 뒤로하고 있는 영암사지는 모두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높은 돌로 쌓은 축대는 성벽을 방불케 한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더 위쪽에 자리한 서금당. 회랑터와 기타 건물터 등이 확인이 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조사된 바로는 금당은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축대 밑으로도 넓은 절터가 조성이 되어있으며, 삼층석탑 부분, 그리고 석등이 있는 곳의 금당터와, 양편에 귀부가 남아있는 곳으로 구분이 된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과, 보물인 삼층석탑, 귀부 등 당시의 건물 받침돌과 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이곳 영암사지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과,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 후면을 제외한 삼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이다. 이런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금당지 위를 돌아보다가 비에 젖은 잔디에 주저 앉고 말았다. 15cm정도의 석재 같에 돋을새김한 정교한 조각(위)과 금당지 축대 외벽에 조각한 동물상 때문이다.


금당지를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다.

금당터, 석등을 본 후 금당터로 오른다. 중앙에 분리를 시켜 양편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계단의 남은 석물로 보아, 화려한 조각이 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삼면으로도 층계를 놓았다. 위로 오르니 주춧돌과 함께, 본존불을 모셨을 자리가 있다. 그 한쪽 편을 보고 놀라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낮은 석축 표면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 남은 부분에도 이런 비천인인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영암사지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을 감고 옛 모습을 그려내 본다. 장엄한 영암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황매산을 뒤로하고,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가람이.


아마도 이런 사지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만 같다. 영암사지, 그 장엄한 절이 언제 소실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만 같은 곳이다.

옛날 마을에 망나니가 있으면 사람들이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멍석에 말아놓고 뭇매를 가하던 ‘사형(私刑)’이 있었다. 이를 흔히 ‘멍석말이’라고 한다.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를 두고 '덕석마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멍석을 덕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멍석말이는 멍석으로 감은 사람을 때리는 형벌로 주민들에 의해 행해진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문중이나 동네의 회의를 거친 뒤 어른 앞에 끌고 간다. 그리고는 멍석을 펴서 눕히고 둘둘 말거나 뒤집어놓고, 온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해 버릇을 고쳐주는 습속이다.


합천에 멍석말이 터가 남아있다.

이 멍석말이는 관청에 신고하는 대신 이 같은 방법을 썼으므로, 오히려 문중의 형벌이나 ‘동리법(洞里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으며, 마을의 사회규범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을 했다.

8월 20일(토), 오전 근무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합천으로 들어서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은 듯하다. 차가 하염없이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런 경우 조바심이 난다. 비가내리는 날은 오후 5시를 넘으면 답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서 가는데, 길 좌측 편에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곁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축대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안내판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어 가까이 가보니, ‘선도대(善導臺)’라는 곳이다. 직사각형으로 네모나게 돌을 쌓고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다.

멍석으로 둘둘말아 이 네모난 단 위에 올려놓고 매를 친 듯하다.

‘선도대’가 도대체 무엇일까? 말대로라면 사람을 선도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훈계한다니, 왜 이곳에서 했을까? 선도를 어떻게 한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이곳이 멍석말이를 행하는 곳이란 설명이다.

‘물산(勿山)마을 관이’인 멍석말이는 누구에게 가했을까?

옛 마을 규약인 향약에 이르기를 마을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을 주게 하였는데, 모두 8가지의 죄목을 나열해 규범을 삼았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一曰 불효지형이오(효를 행하지 않은 불효자를 벌하다)
二曰 불목지형이오(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三曰 불인지형이오(남녀사이(부부를 말하는 듯)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四曰 불제지형이오(윗사람에 대해 공경하지 않음을 벌하다)
五曰 불임지형이오(책무와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벌하다)
六曰 불휼지형이오(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음을 벌하다)
七曰 조언지형이오(거짓말을 하는 자를 벌하다)
八曰 란민지형이라(주민을 괴롭히는 자를 벌하다)




이렇게 여덟 가지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이곳 선도대에서 멍석말이를 하고 죄를 고지하여 부끄럽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이 선도대의 멍석말이의 조건을 읽어보다가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이 멍석말이가 지금 가장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말로만 듣던 멍석말이. 이런 사람이 정말로 멍석말이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지.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데도 책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
백성에게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
혼자만 잘 살겠다고 밑에 사람을 마구 부리는 사람.
국민이 내는 세금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데 반대하는 사람.
그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조하여 같이 떠벌리는 사람,
자연을 마음대로 휘저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고 마음 같으면 문화를 업신여기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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