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지금의 내소사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절을 중창할 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의 규모는 정면 3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짠 장식구조가 다포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꽃 창살의 아름다움은 창호의 백미

 

내소사 대웅보전의 앞쪽 문에 달린 창호의 창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 등 꽃문살 무늬는 문마다 모양이 다르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 꽃잎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대웅보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꾸몄으며,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목침으로 꾸민 내소사 대웅보전

 

이 보불로 지정이 된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전설이 전한다. 대웅보전 오른쪽 천장의 목침이 왼쪽의 것보다 하나가 부족한데, 그에 관해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소사가 퇴락해 가고 있을 때 창민대사는 날마다 내소사 일주문 앞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웅전을 짓기 위해 목수가 찾아왔다. 그 목수는 나무를 목침만한 크기로 잘라 다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그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만 계속하였다. 주지인 청민대사는 기다리기만 했다.

 

그 절에 상좌스님이 목수를 곯려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3년 동안 목수는 목침 다듬기를 다 마친 후 수북이 쌓아둔 목침을 세더니 눈물을 흘리며 청민대사를 찾아갔다. 목수는 목침 하나가 없어졌으니 대웅전을 지을 인연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청민대사는 목침이 하나 없는 채로 법당을 짓도록 부탁을 했고, 목수는 그 목침을 이용해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을 완성하자 청만대사는 화공을 불러와 단청을 그리도록 했다. 단청이 완성될 때까지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법당 앞에는 항상 목수가 지키고 있었다. 상좌스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목수에게 대사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오색영롱한 작은 새가 부리에 붓을 물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좌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가 날아가 버렸다. 법당 앞에는 큰 호랑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청민대사는 대호선사여, 생사가 하나인데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내소사의 대웅보전. 벌써 다녀온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올 봄 꽃이 필 때는 내소사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소재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절이다. 절의 명칭을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 하였다가 내소사로 바뀌었다. 절의 명칭이 바뀐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그 시기가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내소사에는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과 설선당, 보종각 등 전각이 있으며, 부안군 벽산면의 실상사 터에서 옮겨 세운 연래루가 있다. 특히 대웅전은 조선 인조 2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지은 건물로, 건축양식이 정교한데 단충과 보상화를 연속적으로 조각한 창호가 눈여겨 볼 만하다.

 

 

내소사에 소중한 성보문화재 고려 동종

 

내소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보물 제277호인 고려 동종이 남아있다. 이 동종은 고려 고종 9년인 1222년에 내변산에 소재한 청림사에서 제작되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된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가 조선 철종 4년인 1853년에 내소사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후기의 동종이다.

 

보물 제277호인 부안 내소사 동종은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종의 높이는 103, 입지름 67의 크기이다. 이 종은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종의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유두가 멸실이 된 부분도 보인다.

 

 

삼존상을 조각한 내소사 동종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을 했으며,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우리나라의 종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로 삼존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오랜 세월 매몰이 되어서인가, 삼존상의 정확한 형태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용은 힘차게 용틀임을 하고 있으며, 당장이라도 종을 박차고 뛰어나올 듯 힘이 엄쳐 보인다.

 

 

내소사 경내 보종각(寶鐘閣)에 보관하고 있는 내소사 고려 동종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의 동종의 양식을 잘 간직한 종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마다 전하는 많은 문화재 중에서 수많은 동종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종에 대한 가치를 접어두고, 종을 주술적인 형태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각종 철조조형물인 범종은 한국예술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종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범종이라 함은 청정한 불사나 범찰에서 사용하는 종을 말한다. 범종은 홍종, 포뢰, 경종, 화경, 거경, 조종, 당종 등 그 규모나 용도에 따라 반종, 만종 등으로 구분하나, 대부분 통틀어 범종이라고 부르고 유형별 구분은 하지 않는다.

 

사찰에서는 아침에는 28추를 치고, 저녁에는 33추를 울린다. 아침에 26추는 곧 28숙을 의미한다. 곧 마하가섭부터 육조혜능까지 28조사를 상징한다. 저녁에 치는 33추는 수미산 위에 있는 천계인 삼십삼천을 의미한다. 중앙에 제석천이 있고 사방에 팔천(八天)33천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명칭을 육송정 홍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다리 부근 어딘가에 육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1337호인 고성 육송정 홍교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가 두 곳의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 홍교를 놓은 내가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간성읍에서 고성 건봉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군 훈련장과 같은 곳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는 다리 옆에 육송정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홍교는 보물인 건봉사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24년인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는, 이 홍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건봉사 능파교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 암반을 이용해 축조한 홍교

 

육송정 홍교는 하천의 폭이 12.3m 정도가 되는 곳에, 10.6m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위는 양편으로 네모난 장대석을 줄지어 놓고, 그 위에 황토 등으로 메우는 방법을 택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육송정 홍교는, 동쪽은 그대로 암반을 이용해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을 올렸다.

 

서쪽은 3단의 지대석을 쌓은 뒤, 그 위에 홍예석으로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 지대석의 1단은 땅 속에 묻혀있어,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단과 3단의 지대석은 커다랗고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각각 두 장의 돌을 붙여놓았다. 그 크기는 2단의 높이가 70cm 정도이고, 3단은 60cm 정도인데, 3단의 가운데는 안쪽으로 파손이 되었다.

 

 

이 육송정 홍교는 축조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능파교와 함께 영조 21년인 1745년 대홍수 때 붕괴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능파교를 축조한 숙종 30년인 1704년이나 그보다 앞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꾸밈이 없는 단아한 육송정 홍교

 

이 육송정 홍교의 특징은 홍예와 날개벽 사이의 교각 면석을 장대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적인 냇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편에는 큰 돌을 위편에는 작은 돌을 써서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단칸 홍교로는 보기 드물게 단아한 형태로 축조가 된 육송정 홍교는, 20066월에 홍교를 해체 복원하였다.

 

 

홍예를 구성하고 있는 장대석은 갈고 짧은 것을 적당히 섞어 공고하게 축조를 하였다. 2~3장의 장대석으로 이를 맞추어 쌓은 홍예는 매우 견고하게 보인다. 홍예밑으로 흐르는 물은 암반 위로 흐른다. 하기에 물이 스며드는 것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듯하다.

 

동편 홍예의 지대석을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육송정 홍교는 단아하다. 화려하게 모양을 낸 여느 홍교와는 달리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다리 하나를 놓으면서도, 이런 세세한 면까지 신경을 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할만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육송정 홍교. 아마도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육송정 홍교 위에 서서,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감탄을 한다.

험상궂은 괴수의 얼굴을 하고, 머리의 양 옆 귀 뒤에는 물고기 지느러미와 같은 형상을 한 용머리. 그리고 몸은 거북의 몸체에, 발톱은 용의 발톱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는 보물 제78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이 탑비는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소재 사적 제168호 거돈사 터에 자리하고 있다.

 

거돈사지를 찾아가면 우측 한편에 서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의 고승인 원공국사(930 ~ 1018)의 행적을 적은 탑비이다. 비문은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라는 김거웅이 써서, 현종 16년인 1025년에 세웠다.

 

왕사를 지낸 원공국사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속성은 전주 이씨인데, 자는 신칙이다.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8세의 어린나이에 동진출가를 하여,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광종 6년인 955년에는 오월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광종 21년인 970년에 15년 만에 귀국하여 대선사, 왕사가 되었다.

 

 용머리에 거북이 몸을 갖고 있는 탑비의 받침돌

 비문에는 원공국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다. 최충이 글을 지었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현종 3년인 1012년에 왕사가 된 원공국사는, 1016년 병을 얻어 현종 9년인 1018년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다. 이러한 원공국사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이 비는 형식적으로는 신라비의 형태를 취했으나, 세부적인 기법이나 고려초기의 비 받침에서 나타나는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조각 솜씨에 절로 감탄이

 

받침돌 위에 네모난 돌을 올려 비를 받치고 있다.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연곷문양과 만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문을 적은 비의 몸돌이 받침이나 머릿돌보다 적다.

 

한 겨울에 찾아간 거돈사지. 눈이 쌓인 빈 절터에는 탑비와 반대편에 석탑 1기,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석조물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공국사승묘탑비이다. 받침돌인 거북의 잔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 안에 '만(卍)'자와 연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눈이 쌓인 거북의 뒤편도 눈을 치워놓고 보니, 육각형 안에 똑같이 만자와 연꽃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비몸은 머릿돌인 이수와 받침에 비해 작은 편이다. 거북의 몸에는 사각형의 편편한 돌을 얹어 비 받침을 장식했는데,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 때의 탑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겨 넣었다. 탑비는 전체적으로 높이가 499.7cm, 폭은 비신의 폭이 123.8cm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탑비이다.

 

비의 머릿돌에는 구름위에 요동치는 두 마리의 용이 가운데 놓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밑 부분에도 꽃잎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머릿돌의 뒤편 역시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머릿돌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반대로 하고, 뛰쳐나갈 듯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있다. 아래편 비 받침의 용머리가 전설 속의 괴수와 같은 모습이라면, 머릿돌에 조각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머릿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보주를 자기 위해 다투고 있는 형상이다.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탑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 탑비의 머릿돌인 이수를 옮기려고 수 십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어 움직이려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머릿돌을 움직여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근처 농가에 가서 소 한 마리를 빌려와 끌어보았더니, 바로 움직였다고 한다.

 

머릿돌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뜻일까? 탑의 주위를 돌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하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전설 하나로,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눈밭에서 서성이다니. 오후의 햇살이 흰 눈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시다. 저녁 햇살을 받은 탑비의 용머리가 더욱 괴이하다. 또 몇 날인가 이 해답을 얻기 위해 골이 아플 듯하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27번지 내동 안골마을에는 햇골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기슭에서 약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는, 동쪽을 향해 바라다보이는 곳에 보물 제1401호인 봉황리마애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다. 5년 전에 찾아깄을 때는 보수 공사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돌아 섰던 곳이다.

 

지난 48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암벽의 높이 약 1.7m 정도 너비 5m 정도 되는 넓다란 바위암벽에 일렬로 불좌상 1구와 공양상, 반가상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마애불상군의 형태는 육안으로 쉽게 판별이 되지 않는다.

 

 

마애여래불과 화불을 알현하다

 

삼국시대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는 이 불상군은 육안으로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만큼 많이 훼손이 되어있다. 암벽의 석질이 약한 것인지 곳곳에 균열이 가고,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군은 정확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옆에 자세한 설명을 한 그림이라도 한 장 붙여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곳 마애불상군으로부터 남쪽으로 벼랑을 따라 50m쯤 가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한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 3.5m, 8m의 바위면에, 높이 2m정도 되게 돋을새김한 주존불인 마애여래좌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무릎도 큼직하게 표현을 해 안정감이 있고, 전체적으로 고식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의 두광에는 높이 34cm 정도의 화불 5구가 둘러서 조각이 되어있어 돋보인다. 앞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큰 내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이곳에서는 목조 가구의 흔적과 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이 되어, 어느 시기엔가 이곳에 전각을 세운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전파되다

 

이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자리한 위치의 선택은, 강을 따라 조형문화의 전파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1978121일에 발견된 것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33일 보물 제1401호로 조정이 되었다.

 

 

현재는 마애불상군이 있는 암벽으로 오르는 철계단을 조성하여 놓았다. 계단을 올라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애불상군은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각각의 크기는 1m 안팎의 이 불상군은, 공양상에서 보이는 고리장식과 띠 등은 삼국시대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이 마애불상들은 많은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이 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발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에도 창동 마애불이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절벽에 조각이 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훼손이 된 마애불의 경우도, 불교의 조형미술이 강을 따라 발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강변에 위치한 문화재들을 좀 더 심도있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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