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소재한 전등사.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375년에 창건한 이불란사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전등사를 창건한 것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1266년에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 16년이 지난 충렬왕 8년인 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

 

전등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범종각 안에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이 있다. 이 종은 우리나라의 범종과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이 쇠로 만든 철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금속류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광복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전등사 철종은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높이는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나열하고,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겉에는 상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정사각형사이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 명문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 곧 고려 숙종 2년인 1097년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수탈되었던 종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로 평가를 받고 있는 전등사 철종. 이 종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등사로 유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공출이 되었던 종이, 무사히 전등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일이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 소재한 보물 제19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성주사지 중문지를 지나 석등과 오층석탑, 금당지가 일렬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를 지난 106일에 찾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도 뿌리는 날 찾아간 성주사는, 인적도 없이 고요함뿐이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다. 금당 터 뒤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는 탱주를 새겨넣었다.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평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인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우아한 모습의 오층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목개석, 몸돌 등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 두었으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다.

 

대개 신라의 석탑은 기단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곳이 옛 백제의 지역이므로 신라와 백제의 석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시기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이므로, 새로운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형태로도 보인다. 현재는 상륜부가 사라진 오층석탑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재 보호는 개인이 할 수 없어

 

전국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은 어느 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문화재 보호란 해당관청은 물론이려니와,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등 모든 분야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나 그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것을 종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포털 사이트 등은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재보호, 참으로 소중하고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늘 문화재보호 운운하는 그런 속보이는 짓거리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정한 문화재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는데 벌써 찬바람이 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인해 날씨가 더 쌀쌀해질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평택 만기사를 찾았다. 이곳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이 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기사(萬奇寺)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번지에 소재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만기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벌써 만기사를 다녀온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만기사는 많은 불사를 이뤄 가람 안에 전각이 늘어났다. 전형적인 산지가람 형태인 만기사. 주차장에서 걸어올라 천왕문을 지난다.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사찰

 

만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낮은 산비탈을 깎아 3단으로 전각을 배치한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만기사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입증할 만한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된 철불인 철조여래좌상 뿐이다.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헌종 9년인 1843년에 기록한 <진위현읍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는 만기사에 대해서

만기사는 무봉산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데, 맛이 달고 차다. 옛날 세조가 이 절 앞에 수레를 멈추고 우물에 가 물을 마시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이나 감로천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임금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어, 만기사가 조선조에도 법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만기사에 기록은 기내사원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기내사원지는 진위현읍지의 기록을 예를 들어 만기사를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보국사 창건문 등에도 만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기사는 큰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조까지도 사세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72년부터 사격을 갖추기 시작해

 

현재 만기사의 당우로는 보물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무봉서원, 명부전, 종각, 감로당, 심우당, 원통전, 요사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기사는, 주지인 김혜송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 삼성각을 지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서요사를 신축하였으나, 1979년 동요가사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고,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만기사의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이 유일하다.

 

길상좌를 하고 있는 단아한 철조여래좌상

 

높이가 1.43m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은 현재는 금으로 도금하였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라는 길상좌를 하고 앉았는데,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이 자세는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인 항마촉지인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평택 만기사. 잠시 멈추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쌀쌀해질 텐데, 답사의 속도를 높여야만 할 것 같다.

 

얼핏 보면 복잡한 탑이다라고 생각이 든다. 탑 하나에 많은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 오래 전에 장비도 부족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돌에다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하다니, 그저 놀랍다라고 할 밖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천년고찰 갑사. 그 경내에는 특이한 승탑 한기가 서 있다. 보물 제2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이 탑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놀랍다.

 

106일과 7일의 답사는 꽤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근 한 달간이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답사를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삐 돌아보는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하고 발도 아팠지만, 문화재를 만난다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힘든 답사일정도 즐거움이었다.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탑 아래 배례석에서 참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그 후 위덕왕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했다. 의상대사는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갑사는 수차례 찾아간 곳이다. 많은 문화재도 있지만, 갑사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신선이라도 될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찾아본 승탑. 언제 보아도 놀랍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악비천인상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갑사 승탑은 높직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상중하 받침돌로 나뉘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하층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고, 거의 팔각이 아닌 원에 가까운 가운데기단에는 각 귀퉁이마다 귀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는 주악비천인상을 새겨 놓았는데, 금시라도 연주소리가 울려 나올 것만 같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상층기단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의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사자 조련사가 맞아?

 

하층 기단에 조각한 사자들을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 중 한 마리의 사자 앞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이 탑에 조각한 사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예전 갑사에 들렸을 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사자들을 먹이느라 저렇게 하루 종일 사자 우리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다. 하지만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진 것이 흠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갑사 승탑. 또 다시 만날 때는 무엇이 또 보일까? 문화재를 만나면서 늘 하는 기대이기도 하다.

 

 

대개 절의 범종은 범종각이라는 전각 안에 불교의 사물인 북, 운판, 목어 등과 함께 배치를 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인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종은 그 만든 연대나 제작을 한 장인들이 밝혀지고 있어서, 철조구조물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6천과 색계(色界)’18, ‘무색계(無色界)’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삼십삼천이라는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언제 조성이 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종소리로 인해 지옥에서 구제가 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왕의 만수무강을 위한 종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갑사. 천년고찰인 갑사에는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甲寺銅鐘)’이 있다. 갑사동종은 조선조인 선조 17년인 1584년에 만든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종 꼭대기에 조성한 용뉴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발로 종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107일 찾아간 갑사. 초가을의 날씨지만 한 낮에는 기온이 높다. 경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땀이 흥건히 배어온다. 동종각 바로 옆에 물이 있어 찬물을 한바가지 떠 마신다. 내장 속까지 시원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물 한 모금이 고마울 수가 없다. 동종은 전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는데, 사진을 촬영하기가 만만치가 않다.

 

공출이 되었던 수난의 갑사동종

 

전각의 사방을 모두 나무판벽으로 막고, 위는 살창으로 꾸며놓았다.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살창 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본다. 갑사동종은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네 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딴 곳의 종들이 유두가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갑사 동종은 유두도 깨끗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의 아랫부분은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치하에서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크지는 않지만 조성연대가 뚜렷하고, 동종의 조성의 목적이 전해지고 있는 갑사동종. 문화재마다 많은 사연이 있지만, 갑사동종은 민족의 수난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재이다자칫 사라질 뻔한 문화재이기에, 더욱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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